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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어른들의 수능’ 공인중개사

bindol 2021. 11. 1. 04:12

[만물상] ‘어른들의 수능’ 공인중개사

강경희 논설위원

 

강경희 논설위원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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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부터 밤 10시, 늦으면 새벽 2시까지 공부했어요. 전국 모의고사 4회부터는 학원에 신청해서 직접 모의고사 봤고요. 4회 모의고사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점수가 잘 나와 그때부터 나사가 하나 빠졌습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8시까지만 공부했어요.” 수능 준비하는 대입 수험생 얘기가 아니다. 29세의 공인중개사 수험생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다.

▶월북 소설가 이태준의 1937년작 단편 ‘복덕방’에는 ‘세 늙은이가 모였다’는 묘사가 나온다. ‘언제, 누가 와서, 집 보러 가 잴지 몰라, 늘 갓을 쓰고 앉아서 행길을 잘 내다보는, 얼굴 붉고 눈방울 큰 노인은 주인 서 참의다. 처음에는 겨우 굶지 않을 만한 수입이었으나 대정 팔구년 이후로는 시골 부자들이 세금에 몰려, 혹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만 몰려들고, 그런 데다 돈은 흔해져서 관철동, 다옥정 같은 중앙 지대에는 그리 고옥만 아니면 만원대를 예사로 훌훌 넘었다.’ 오랫동안 이렇게 각인된 부동산중개사 이미지는 확 바뀌었다.

 

▶올해 공인중개사 시험 응시자가 역대 최다인 40만명에 이른다. 1·2차 시험을 한날 보기 때문에 중복을 감안해도 응시생이 20만명을 훌쩍 넘는다. 시험에 학력, 나이 제한이 없어 작년엔 10대가 30여 명, 90대도 1명 응시했다. 성별도 남녀 거의 반반이다. 먹고살기 힘든 시대에 ‘자격증 하나라도 따두자’는 생각에 ‘제2의 수능’ ‘어른들 수능’이 됐다.

 

▶첫 시험이 치러진 1985년에 합격률이 38%였다. 응시자가 많아지니 난도도 점점 높아져 작년 합격률은 21~22%였다. 일정 점수만 넘으면 무조건 합격하는 절대 평가 방식을 상대 평가로 바꾸겠다고 하니 제도 바뀌기 전에 시험 치자고 응시생이 더 몰렸다. 네이버의 공인중개사 수험생 카페 ‘공인모’ 열기는 고3생이나 고시생 못지않다. “2년 만에 합격했어요. 첫 번째 떨어지고 두 번째 울면서 재수하고 미친 듯이 공부했지요.” 2년 반 동안 퇴근 후와 주말에 독서실에서 꼬박 공부했는데도 불합격했다는 50대 남성은 “난이도 보니 2~3년 더 공부해야 할 것 같아 중도 포기하겠다”고 글을 올렸다.

 

▶정부가 ‘반값 복비’를 시행했음에도 집값과 전셋값이 워낙 올라 어지간한 서울의 아파트 한 건 거래에 복비가 1000만원도 넘는다. 1년에 몇 건만 중개하면 월급쟁이 안 부럽다 생각되니 공인중개사 시험 응시생 10명 중 4명꼴로 2030세대다. 미친 집값에, 취업 한파가 겹친 씁쓸한 ‘공인중개사 열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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