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16] 소아마비 공포서 인류 구원, 러시아계 의과학자 소크
소아마비 팬데믹이 정점에 달했던 1952년 한 해 미국에서만 5만8000여 명이 발병해 3145명이 숨지고 2만1269명의 다리가 마비됐다. 33세이던 1947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설립한 소아마비 국립재단이 지원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맡은 유대인 의학자 조너스 소크는 마침내 1952년 3월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위 시사 만화는 1957년 퓰리처상을 받은 톰 리틀의 ‘왜 우리 부모님은 내게 소크 백신을 맞히지 않았을까?’. /게티이미지코리아
20세기 들어 뇌나 척수 신경조직이 손상되어 죽거나 하반신이 마비되는 폴리오 바이러스 전염병이 위세를 떨쳤다. 대공황 때 선출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이 병에 따른 하반신 마비 환자였다. 루스벨트는 39세에 이 병에 걸렸지만 보통은 10세 전후 어린아이가 많이 걸려 이를 ‘소아마비’라 불렀다. 당시 미국에서만 환자가 매년 수만 명 발생해 미국인들에게 소아마비 전염병은 원자폭탄 다음으로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공포에서 인류를 해방한 의과학자가 조너스 소크(Jonas Salk)다.
소크는 1914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이 유대인이라고 욕하며 돌을 던지는 탓에 골목 맨 끝에 있는 히브리 학교 등굣길이 두려웠다. 소크는 말년에 의과학자가 된 이유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유대인의 비극과 고통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이런 사악한 고통의 고리를 끊으려면 뭔가 인류를 위해 큰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소크는 13세에 영재 고등학교 조기 입학, 16세에 뉴욕시립대 화학과 조기 입학, 20세에 뉴욕 의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뉴욕시 의사의 15% 이상이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임상 의사보다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의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 무렵 만연하던 전염병 백신 개발에 헌신하는 길이 자신이 받은 소명이자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라 믿었다. 이후 소크는 뉴욕 마운트시나이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은 후, 당시 바이러스 연구로 유명한 미시간대학 프랜시스 교수를 찾아가 바이러스 실험실에서 6년간 독감 백신을 개발하며 바이러스 연구 경험을 쌓았다.
하루 16시간 휴일 없이 연구
1947년 소크는 33세 나이로 피츠버그 의대 세균학 부교수로 초빙받아 바이러스 연구소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루스벨트 대통령이 설립한 소아마비 국립 재단이 지원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1950년쯤 소아마비는 세계적 대유행(팬데믹) 상태였다. 팬데믹은 오래갔다. 미국은 1952년에 정점에 달해, 환자가 무려 5만8000명 발생해 3145명이 사망하고, 2만1269명의 다리가 마비되었다. 일단 병에 걸리면 42.5%가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어린 자녀를 둔 가정은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일부는 아이들을 외딴 산이나 사막으로 대피시켰다. 소크는 공포의 바이러스에서 인류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연구에 매진했다. 7년 동안 하루 16시간씩 휴일도 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미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소아마비 백신 연구에 몰두하는 조너스 소크.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그림으로 명성 높은 미국 일러스트레이터 에드워드 베벨의 1955년 작. /게티이미지 코리아
백신 대량생산 방법에 몰두해
당시 소아마비 백신 개발을 위한 주류 연구가 숙주가 아닌 외부 환경에서 바이러스를 오래 배양하여 독성이 약해진 ‘약독화’ 바이러스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바이러스 배양 자체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약화된 바이러스 독성의 동물시험 과정을 여러 차례 거쳐야 했다. 게다가 3종류의 폴리오바이러스 타입 모두에서 약독화된 바이러스를 얻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전염병 공포가 극에 달하면서 대중과 지원 재단은 짧은 시일 안에 성과가 있기를 바랐다. 다른 연구자들이 약독화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할 때, 소크는 단기간에 백신을 대량으로 만들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감 백신 연구 경험을 살려 포르말린을 이용해 바이러스의 생물학적 활성을 죽인 ‘불활성화’ 백신을 만들기로 했다.
천장 높은 공간서 아이디어 얻어
하지만 소크 연구팀은 200여 차례 실험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계속되는 실패와 시행착오에 심신이 지친 소크는 이탈리아 아시시 수도원으로 떠났다. 답답한 연구실에만 있다 천장이 높은 수도원에 오니 그의 사고 공간 역시 확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번쩍이는 영감과 함께 아이디어가 떠올라 급히 연구실로 돌아왔다. 소크는 쥐 실험, 원숭이 실험 등을 연속으로 진행하며 심지어 원숭이 콩팥 세포를 믹서기에 갈아 바이러스 증식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단백질 분해 효소(트립신)로 분리된 원숭이 콩팥 세포에서 폴리오바이러스 생산 수율이 현저하게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바이러스 대량생산 기술을 확보한 것이다. 이 바이러스들을 포르말린으로 죽여 불활성화한 ‘사균 백신’을 만들었다. 1952년 3월, 마침내 소크는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무엇보다 백신 대량생산에 성공한 것이다.
자신과 가족 상대 임상 시험
다음 문제는 임상 시험을 할 대상을 구하는 일이었다. 소크는 1953년 11월 자신을 대상으로 최초로 인체 시험을 실시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이 먼저 접종받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며 임상 시험 참여를 설득했다. 그 결과 지원자 22만명을 모아 임상 시험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안전성이 입증되자 소크는 소아마비 백신 개발 성공 소식을 루스벨트 대통령 사망 10주기인 1955년 4월 12일에 맞춰 라디오를 통해 알렸다. 미국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축제처럼 기뻐했다. 이날은 국가적 경축일이 됐다. 백신이 보급된 지 2년 만에 소아마비는 90% 이상 감소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요?
소아마비가 이렇게 단기간에 감소한 데는 소크 박사의 위대한 결단이 있었다. 여러 제약 회사가 특허를 사겠다고 제안했다. 백신 가치는 약 70억달러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 생명과 의술을 돈과 연결할 수 없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백신을 무료로 공급했고 백신 만드는 방법도 공개했다. CBS 인터뷰에서 사회자가 물었다. “백신의 특허권자는 누구입니까?” 소크 박사는 답했다.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요?” 소크 박사 덕분에 백신은 전 세계에 빠르게 공급돼 소아마비를 퇴치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크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그를 ‘인류의 은인’이라 불렀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그를 위해 ‘천장이 높은’ 소크 생물과학연구소를 샌디에이고에 지어주었다.
앨버트 세이빈
또 다른 유대인 의과학자 앨버트 세이빈의 경구 백신
소크의 불활성화 백신이 대량 보급됐을 때 약독화 백신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유대인 의과학자가 있었다. 폴란드계 유대인 앨버트 세이빈은 불활성화 백신은 3번 접종해야 하지만 약독화 백신은 1회 투여로 면역을 갖게 되는 장점을 부각했다. 또한 사탕이나 시럽 형태의 경구 투여는 점막 면역을 형성하기 때문에 주사로 접종하는 불활성화 백신보다 완벽한 면역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소크의 백신으로 많은 사람이 항체를 갖게 된 상황에서 약독화 백신의 대규모 임상 시험을 미국에서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세이빈은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1958년 싱가포르와 체코, 이후 소련에서 무려 1500만명을 대상으로 임상 시험을 해 백신의 안전성과 효과가 입증되었다. 세이빈의 백신은 1961년 사용 허가를 받아 1회 경구 투여의 간편함 덕분에 불활성화 백신을 제치고 주력 백신이 되었다. 당시 집중적 접종 캠페인에도 주사 맞기 싫어 접종받지 않은 어린이가 미국에서만 9000만명에 이르는 바람에 소아마비 발병이 다시 늘어났다. 이때 등장한 구원투수가 경구 백신이었다. 굳이 아이를 달래가며 아픈 주사를 놓는 게 아니라 사탕이나 시럽 형태 백신을 먹이면 되니 우선 간편했다. 이후 소아마비 발병 환자는 대부분 나라에서 사라졌다. 두 유대인 의과학자가 개발한 백신 두 종류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소아마비를 퇴치했다. 참고로 이스라엘의 한 제약사가 집에서 복용할 수 있는 저렴한 ‘경구용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끝내고 임상 시험을 준비 중이다. (자료: ‘남궁석의 신약 연구사’ 백신, 소아마비 퇴치까지, 바이오스펙테이터 등)
[백신을 단돈 100원에 보급]
세계보건기구를 통해 보급되는 소아마비 백신 1개 값은 단돈 100원이다. 개발자 조너스 소크 박사가 백신을 무료로 공급했기 때문이다. 1993년 타임지가 그를 20세기 100대 인물에 선정한 이유는 백신 개발보다는 연구 성과를 인류의 공동 자산으로 함께 나눈 숭고한 과학자 정신에 있었다. 소크는 미국 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편 소크의 값싼 ‘불활성화 백신’(사균 백신)이 이미 등장하여 ‘약독화 백신’(생균 백신) 개발이 돈이 안 됨을 알고 있음에도, 끈질기게 또 다른 소아마비 경구 백신을 개발한 유대인 의과학자가 앨버트 세이빈이다. 그는 독성이 약화된 ‘생균 백신’의 우수성을 믿었기에 끝까지 매달려 백신 개발을 성공시켰다. 이 두 유대인 의과학자가 인류를 소아마비 전염병에서 구출했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멍텅구리 계산기에 ‘뇌’를 접목... ‘논리 기계’로 바꿨다 (0) | 2021.11.03 |
---|---|
“타이태닉 침몰” 전한 전보기사… 라디오·TV시대 열었다 (0) | 2021.11.03 |
[바로잡습니다] 20일 자 A28면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의 ‘아관파천’ 박스 기사 중 (0) | 2021.11.03 |
러시아의 박해에 분노한 유대인, 러일전쟁 때 일본 밀어줬다 (0) | 2021.11.03 |
약속의 땅? 2000년만에 정착한 땅엔 물도 기름도 없었다 (0) | 2021.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