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러시아의 박해에 분노한 유대인, 러일전쟁 때 일본 밀어줬다

bindol 2021. 11. 3. 04:56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15] 러일전쟁 승리한 일본… 그뒤엔 유대인의 물밑지원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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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 세력을 넓힌 러시아가 압록강 주변에서 벌채 사업을 하다 1903년 4월 압록강 하구 의주 용암포를 기습적으로 불법 점령하자 일본과 러시아는 일촉즉발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후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통치권을 놓고 수차례 협상을 벌였다.

다급해진 일본은 “만주는 러시아가, 한국은 일본이 나누어 갖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만주는 전적으로 우리 것이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권리는 인정하지만 그 이상의 정치적 권리는 인정 못 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후 1903년 9월 러시아는 일본에 최후 통첩안을 던졌다.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일본이 지배하자’는 분할 통치안을 역으로 제안했다.

만주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은 1904년 초 전쟁으로 치달았다. 일본이 연전연승한 배경에는 해외 국채 발행을 통해 확보한 막대한 군자금의 힘이 있었다. 국제 금융계의 실력자였던 유대인 제이컵 시프가 일본을 위해 거액의 국채 판매를 알선해준 덕분이었다. ‘평양 북쪽에서 충돌하는 일본과 러시아 기병대’, 일본 메이지 시대의 화가 구로키 한노스케의 그림, 미 의회도서관 소장. /위키피디아

러일전쟁 시작되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일본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1904년 2월 6일 일본 함대가 인천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시키고 남양만과 백석포에 군대를 상륙시켜 서울을 점령한 후 북진했다. 일본 함대는 러시아 극동함대 사령부가 있는 뤼순(旅順)항으로 직진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것이 러일전쟁의 시작이다.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 정복욕을 드러낸 것이다. 이후 일본군은 압록강 전투에서 승리하여 만주로 진격했다. 일본이 강대국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보았던 서방세계는 일본의 연전연승에 깜짝 놀랐다.

유대인과의 운명적 만남

러일전쟁 때 일본 전비는 청일전쟁 때보다 8.5배나 많았다. 당시 일본 GDP 6.6년치 규모였다. 일본은 전쟁자금을 국내외 국채 발행으로 충당했다. 이 중 40%가 해외 차용이었다. 전쟁 지속가능 여부는 전적으로 얼마나 많은 자금을 해외에서 얻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었다. 당시 런던 채권시장에서 신용등급이 낮았던 일본이 어떻게 그 큰돈을 빌릴 수 있었을까?

해외차용 임무는 일본 중앙은행이 맡았다. 책임자는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1854~1936) 부총재였다. 그는 전쟁 직후 전비를 마련하라는 특명을 받고 런던으로 날아 갔다. 다카하시는 런던 금융가에 제법 지인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일본 국채 인수에 응하지 않았다. 일본이 이미 런던에서 발행한 국채가 인기가 없었을 뿐 아니라, 전쟁 위험 리스크 때문에 회피했던 것이다. 그 무렵 런던에서 발행된 국채 이자율을 보면 멕시코, 그리스, 에콰도르가 4%, 중국과 쿠바가 5%인데 비해 일본은 6%로 신용등급이 가장 낮았다. 다카하시는 금융기관을 찾아가 1000만파운드 국채 발행을 협의한 결과, 일단 절반만 발행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이 무렵 그는 런던의 한 친구가 초대한 만찬에서 우연히 미국 투자금융회사 ‘쿤-롭사’ 대표 유대인 제이컵(야곱) 시프(Jacob Henry Schiff·1847~1920)와 나란히 앉았다. 시프는 러일전쟁에 큰 관심을 보였다. 다카하시는 그에게 전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국채 발행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다음 날 시프는 나머지 절반을 자기가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지금 돈으로 50억달러에 달했다. 알고 보니 그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대리인으로 국제 금융계에 꽤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일본군이 압록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일본은 1200만파운드 규모의 두 번째 국채 발행에 나섰으나 국제 금융계는 일본 국채 인수에 미온적이었다. 일본이 러시아 극동함대 본부 뤼순항을 신속하게 점령하지 못하자 승전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시프가 발 벗고 나서서 뉴욕과 런던에서 동시에 국채를 발행토록 해주었다.

‘일본’과‘러시아’라고 쓰인 곰과 개로 보이는 동물 두 마리가‘한국’이라는 뼈다귀를 놓고 다투는 가운데, 담장 밖의 세계는“그냥 한판 붙으라”고 부추기고 있다. 미국 만화가 밥 새터필드의 신문 만평, 1904년 미국 타코마 타임스 게재. /위키피디아

시프, 치밀하게 러시아 혁명을 지원하다

왜 제이컵 시프는 일본을 지원했던 것일까? 그는 러시아가 유대인을 박해하는 데 분노하고 있었다. 러시아 차르(군주)는 혁명 세력을 다독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을 핍박했다. 유대인들을 발트해와 흑해 사이에서만 살도록 거주지를 제한했다. 차르의 유대인 억압 조치는 국민의 반(反)유대주의를 자극했다. 게다가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도 소년을 잡아가 종교의식을 위해 죽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곳곳에서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시프는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러시아 유대인들을 구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껴, 자신의 부와 정치적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는 1906년 미국 유대인위원회(AJC) 창설을 주도해 러시아와 동구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민 올 수 있도록 미국 정부를 압박해 이민 문호를 확대했다.

 

러일전쟁 당시 사실 은밀한 전쟁은 러시아 내부에서도 진행되었다. 시프를 위시한 유대 금융인들은 유대인 레온 트로츠키가 주도하는 혁명을 지원했다. 한편 1905년 1월 일본이 뤼순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군 2만2000명을 포로로 잡았을 때, 시프는 포로들에게 볼셰비키 혁명의 정당성을 교육시켜 이들이 귀국하면 혁명 전선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시프, 일본 국채 발행에 독일도 끌어들이다

일본이 만주 전투에서 우세를 보이자 세계는 경이로운 눈으로 일본의 연전연승을 지켜보았다. 이런 분위기는 일본의 3차 국채 발행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번에는 시프가 일본 국채의 이자율을 낮춰주도록 금융가들과 직접 협상을 벌였다. 1905년 3월 3000만파운드의 일본 국채가 4.5% 금리로 발행되었다. 1905년 6월경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러일전쟁을 중재하고 나섰을 무렵 일본 정부는 다카하시에게 네 번째 국채 발행을 지시했다. 하지만 런던 금융계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일본이 큰 규모의 국채를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발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시프는 독일을 끌어들여 미국, 영국, 독일이 각각 1000만파운드를 인수하는 4차 국채 발행을 성사시켰다.

러일전쟁 군비 마련을 위한 국채 발행을 맡았던 다카하시 고레키요(오른쪽) 일본은행 부총재와 발행을 도운 유대인 은행가 제이컵 시프(왼쪽). /위키피디아

러시아, 금융전쟁에서 지다

근대 이후의 전쟁은 본질적으로 금융 전쟁이다. 시프가 지원하여 판매한 대규모 일본 국채는 일본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 힘이 되었다. 일본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계속 상상을 초월하는 외자를 도입한 반면, 러시아는 처음에 프랑스에서 자금을 조달했으나 나중에는 국내에서조차도 국채 발행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당시 러시아는 전국적으로 혁명이 일어나 일본은 유리한 입장에서 러시아와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출처 : ‘러시아의 유태인 학살에 분노, 일본을 밀었다’, 강영수 전 코트라 관장, 월간조선 2004. 3월호)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포츠머스 강화조약

1905년 9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중재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한국은 물론 뤼순과 다롄의 조차권과 사할린까지 양도받았다. 대신 루스벨트는 일본이 요청한 막대한 배상금은 묵살했다. 루스벨트는 부통령 시절 ‘조선인은 자치 능력이 없어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던 인물이다. 게다가 포츠머스 강화조약 두 달 전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 사이에 ‘필리핀과 조선은 각각 미국과 일본이 차지한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진 상태였다.

루스벨트가 한국을 일본에 넘겨준 사실을 모르는 고종은 1905년 10월 루스벨트에게 친서를 보내고, 패전국 러시아에 매달렸지만 다음 달 11월 일본과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써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넘어갔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과,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유대인 경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러일전쟁 후 제이컵 시프는 천황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해 외국인으로 처음으로 최고훈장을 받은 뒤 조선도 방문한 바 있다.

[러일전쟁의 배경, 아관파천(俄館播遷)]

1894년 청일전쟁 패배로 청나라는 일본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까지 할양해야 했다. 러시아가 요동 반도의 할양을 반대했음에도 일본이 뤼순항을 차지하게 되자, 러시아는 일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해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으로 요동 반도를 다시 청에 반환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요동반도를 연결하는 동청철도를 건설하여 만주 지역으로 세력을 뻗쳤다.

1895년 10월 명성왕후가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군과 친일 세력에 의해 경복궁에 감금당한 고종이 이듬해 2월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 ‘아관파천’이다. 이 사건으로 일본의 영향력과 친일 내각이 붕괴되고 고종의 신변을 확보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져, 친러 내각이 구성된 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건국되었다. 이듬해에 러시아가 청나라와 비밀동맹을 맺어 일본이 반환한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조차하여 해군기지로 쓰자 일본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1904년 2월 대한제국의 운명을 가름하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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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