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선 LIVE] 누구를 위한 종전 선언인가
美는 순서·시기·조건에 이견
문 정부, 빈약한 외교 상상력
이미 실패한 외교 교본 반복
차라리 ‘외교적 여백’ 두라
강인선 부국장 - 조선일보
강인선 부국장, 편집국 편집국 에디터(외교안보·국제 담당) 겸 뉴스레터팀 팀장, 최고의 조선일보 기자가 쓰는 뉴스를 1등 디지털뉴스 조선닷컴에서 지금 만나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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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는 문재인 대통령./연합뉴스
임기 말에 접어든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 선언’에 올인하고 있다. 지난 9월 문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 이후 정부는 요란하게 종전 선언을 밀어붙이고 있다.
한국전쟁 종전 선언은 문 정부 입장에서 ‘다 된 밥’이었다. 2018년 트럼프· 김정은의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 미국 실무팀은 양국 지도자들의 서명란까지 들어 있는 종전 선언문을 준비해갔었다. 양국 지도자가 서명하면 기념식도 열 기세였다. 트럼프도 그때 “70년 된 한국 전쟁의 종전을 논의한다는 걸 믿을 수 있느냐”며 흥분했었으니까. 싱가포르에 이어 하노이까지 미·북 정상회담은 북한 비핵화를 위해 반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끝났다. 종전 선언도 없던 일이 됐다.
문 대통령이 다시 종전 선언 카드를 던졌다. 바이든 정부는 다르다.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협상으로 노벨상 평화상을 받겠다는 꿈에 도취해 있을 때, 종전 선언이 가져올 여파를 걱정하던 미국 외교 주류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3년 전 워싱턴의 많은 전문가는 한국 방어에 대한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주한미군의 지위를 변경하고 유엔사 해체의 빌미를 줄 종전 선언의 후폭풍을 우려했다. 종전 선언이 이뤄지는 순간 어디선가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군인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봤다. 설익은 종전 선언은 북한과 중국에 좋은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 “(종전 선언의)각각의 단계에 대한 정확한 순서, 시기, 조건과 관련해 한국과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북한 반응도 부정적이었다. 남북 경색 국면에서 종전 선언을 추진하는 것은 “아파트 기초를 무시하고 10층부터 짓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김여정은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문 정부가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종전 선언의 정치적 의미는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커질 수 있다. 북한은 종전 선언을 이용해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내년 한국 대선을 앞두고 북한이 ‘평화 쇼’를 한다면 이 이상의 호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를 위해 기억해둘 것이 있다. 종전 선언이 평화를 가져오진 않는다. 북한 비핵화에 진전이 있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 동계 올림픽 모델’을 다시 한번 시도하고 싶을 것이다. 평창에서 미·북을 설득해 싱가포르·하노이 정상회담으로 이어갔던 것처럼, 내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정상회담과 종전 선언 등으로 ‘실적’을 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대화가 아니라 핵과 미사일 개발에 전력투구하는 요즘 문 정부가 제안한 종전 선언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대립 관계를 방치해둔 채 종전을 선언해도 잉크가 마르기 전에 대결의 악순환에 빠져들 것”이란 얘기였다.
2021년 10월 29일 교황청을 공식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과 단독 면담에 앞서 DMZ 철조망을 잘라 만든 평화의 십자가를 설명하고 있다. /교황청 제공
안타까운 것은 문 정부의 빈약한 외교적 상상력이다. 2년 째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세계는 지도가 없는 땅에 들어섰다. 미·중 경쟁·갈등 속에 동맹과 우방 구도가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다. 그런데 문 정부는 3년 전 한계에 부딛혀 서랍 속으로 들어간 ‘종전 선언’을 또 꺼내 들었다. 문 대통령이 교황에게 방북을 설득하는 장면은 3년 전과 너무 똑같다. 실패한 교본을 그대로 쓰는 건 문 대통령의 고집이 너무 세기 때문일까. 아니면 참모들이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일까.
문 정부도 종전 선언을 대단한 외교·안보 업적이 될 것으로 보고 추구하진 않을 것이다. 이렇다 할 업적이 없는 마당에 종전 선언으로 마무리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임기 말 문재인 유산을 만들기 위해 무리하기보다는 차라리 ‘외교적 여백’을 다음 정권에 넘겨주는 쪽이 더 큰 기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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