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농부 출신 國相 을파소(고구려 고국천왕 때 재상), 진대법으로 가난한 백성 도왔어요

bindol 2021. 11. 4. 04:27

식량 부족한 3~7월에 곡식 빌려주고 추수 뒤인 10월에 갚게 한 을파소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 된 명림답부는 후한의 대군을 '청야작전'으로 물리쳐…
두 재상 죽자 나라 전체가 울음바다

세월호 참사에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가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한 뒤, 어떤 인물이 새 국무총리가 될지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어요. 국무총리는 대통령에 이은 행정부의 둘째 우두머리로,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지휘하지요. 우리 역사 속에는 고대 삼국시대부터 국무총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관직이 있었어요. 그 역할을 멋지게 해낸 훌륭한 인물들도 있고요. 그 대표적인 인물을 찾아 166년의 고구려로 역사 여행을 떠나볼까요?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 된 명림답부

"내가 왕위에 오른 데에는 명림답부의 공이 크오. 그에게 특별한 벼슬을 주어야겠소."

"명림답부에게 어떤 벼슬을 내리시려 하옵니까?"

"국상(國相)이라는 벼슬이오.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보다 높은 새로운 관직이지."

"좌보와 우보보다도 높다면, 그야말로 관직 중의 으뜸이군요."

 그림=이창우

고구려의 제8대 왕인 신대왕은 왕위에 오른 이듬해에 명림답부(明臨答夫)라는 인물을 국상에 임명했어요. 국상은 국정에 관한 일뿐 아니라 군사 지휘권까지 행사하는, 왕 다음가는 높은 관직이었지요.

그전까지 명림답부는 조의(�七衣)라는 말단 관직에 있었어요. 그런데 고구려 제7대 왕인 차대왕이 포악한 행위를 일삼으며 백성의 삶을 고통에 빠트리자 명림답부가 이를 참지 못하고 차대왕을 살해하고 말아요. 차대왕이 죽임을 당하자 신하들은 차대왕의 동생인 백고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그가 바로 신대왕이지요. 물론 명림답부가 혼자서 차대왕을 살해한 것은 아니겠지요? 명림답부가 속했거나 아니면 차대왕을 반대하는 세력이 그를 도왔을 거예요.

◇청야 작전으로 후한의 군대를 물리치다

172년 중국의 후한(後漢)이 대군을 몰고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고구려 신하들은 후한의 군사와 맞서 싸우자고 주장하지만, 명림답부의 의견은 달랐어요. "후한은 멀리서 군대의 양식을 끌어왔으니 오래 버틸 수 없소. 우리가 성을 높이 쌓은 후 들판의 농작물을 모두 비우면 저들은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정예병을 동원하여 공격하면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주장에 따랐고, 후한의 군대는 명림답부의 말처럼 피로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후퇴했어요. 명림답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좌원이라는 곳에서 후한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지요. 명림답부가 쓴 이 작전을 '청야(淸野) 작전'이라고 해요. '청야'란 적이 사용할 물자나 식량, 건물 등을 말끔히 없앤다는 뜻이지요.

고구려의 국상이라고 하면 명림답부와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또 있어요. 신대왕의 아들로 고구려 제9대 왕이 된 고국천왕 때 국상의 자리에 오른 을파소(乙巴素)예요.

◇농부 출신으로 국상이 된 을파소

191년, 고국천왕은 신하들에게 관직에 오르지 않고 시골에 묻혀 지내는 사람 중에 어진 인물을 추천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이런저런 세력에 물들지 않은 인물 가운데 현명한 신하를 얻어 정치를 잘해 보려는 뜻이었지요. 이에 신하들은 안유라는 인물을 추천했지만, 안유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을파소가 자신보다 더 훌륭한 인재라며 그를 추천합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에게 사람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를 갖춰 그를 궁궐로 불러들였어요. 그리고 을파소에게 중외대부라는 관직을 내리지요. 그런데 을파소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정중하게 관직을 사양하였어요. "어리석은 저는 감히 대왕의 엄한 명령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현명한 사람을 뽑아 그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큰일을 이루게 하십시오."

이 말은 중외대부라는 관직으로는 다른 세력을 제압하고 제대로 정치를 해 나가기 어렵다는 뜻이었어요. 을파소의 뜻을 알아차린 고국천왕은 그를 최고의 관직인 국상에 임명하여 나랏일을 맡깁니다.

◇진대법을 실시하여 가난한 백성을 돕다

국상이 된 을파소는 고국천왕을 도와 194년에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합니다. 진대법은 식량이 부족한 3월부터 7월까지 국가가 백성에게 식구 수에 따라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 뒤인 10월에 갚게 하는 제도예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구휼(救恤) 제도로, 오늘날의 사회보장제도 또는 사회복지정책이라고 볼 수 있지요. '삼국사기'에는 을파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어요. '지성껏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를 밝게 하고 상벌을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그러자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였다.'

명림답부와 을파소가 얼마나 훌륭한 재상이었는지는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어요. 명림답부가 죽자 신대왕은 직접 그의 집을 찾아가 슬퍼하고, 7일 동안이나 신하들과의 조회를 중지한 채 그의 명복을 빌었다고 해요. 을파소가 죽자 백성은 물론 높은 벼슬아치나 왕까지 통곡하여 나라 전체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고 전해지고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한 고구려의 명림답부와 을파소처럼 우리나라에도 대통령을 잘 보좌하며 국민의 존경도 듬뿍 받는 국무총리가 등장했으면 좋겠지요?

[함께 생각해봐요]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에도 고구려의 국상처럼 국무총리 같은 역할을 하는 관직이 있었을까요? 백제와 신라의 관직 체계를 살펴보세요.

해설: 백제는 고이왕 27년(260년)에 생겨난 좌평과 전지왕 4년(408년)에 두었던 상좌평이 오늘날의 국무총리와 같은 역할을 하였어요. 신라에서는 초기에는 대보, 법흥왕 18년(531년)에는 상대등, 진덕여왕 5년(651년)에는 집사부의 우두머리인 중시라는 관직이 국무총리 역할을 하였답니다.

지호진 |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감수=서영대 | 인하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