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사상]
민족 독립과 평화 열망한 안중근, 조선 국권 침탈 주도한 이토 저격
사형 전 감옥에서 쓴 '동양평화론'… 제국주의 막기 위한 3국 협력 주장
이토 처단은 테러 아닌 '의거'예요
최근 경찰이 제작한 테러 예방 포스터에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 무늬가 새겨진 황당한 일이 있었어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 의사의 손도장을 테러와 연관시킨 탓에 많은 사람이 "안중근 의사가 테러리스트란 말이냐"며 크게 화를 냈죠. 경찰서에도 시민 항의 전화가 폭주해 문제가 된 포스터는 다 수거됐다고 합니다.
테러리스트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함부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최근 유럽과 동남아 등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고한 시민을 공격하는 잔혹한 테러가 발생하고 있지요. 일본 극우 정치인들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몰아세우지만,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처단한 것은 테러가 아니라 '의거(義擧·정의를 위해 의로운 일을 도모함)'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함부로 폭력을 사용한 게 아니라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분명하고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었어요.
◇"이토가 동양의 평화를 깨뜨렸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 이토를 권총으로 저격한 뒤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토는 사망했고 러시아 측은 안중근 의사를 일본 총영사관으로 넘겼어요. 며칠 뒤 안중근 의사는 일본 총영사관 지하실에서 일본 검사에게 심문을 받았어요.
"무슨 이유로 이토 공을 저격하였는가?"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은 그가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고종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킨 죄, 죄 없는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안중근 의사의 말에 일본 검사는 이렇게 말했어요.
"일본과 이토는 청나라와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동아시아의 안전을 지켰다. 이토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 왔고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는 입으로는 평화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사람들을 파리 죽이듯 죽이고 러·일전쟁 때부터 동양 평화 유지와 대한의 독립 보장을 말했으나, 실제로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고 반박했습니다.
▲ 그림=정서용
안중근 의사의 말대로 이토는 일본 제국주의를 주도하며 조선의 국권 침탈에 가장 앞장선 정치인이었어요. 겉으로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키고 한국을 보호한다"고 말했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배후에 이토가 있었어요.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하고 직접 고종을 겁박해 강제로 퇴위시키기도 했죠.
그래서 안중근 의사는 "나는 살인자가 아니라 전쟁 포로"라고 말했어요. 이토를 처단한 것은 한 개인이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독립군 지휘관 안중근이 일본 제국주의를 주도한 적국의 우두머리를 공격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국주의에 맞서 평화를 꿈꾼 안중근
안중근 의사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동양과 전 세계의 평화를 고민한 사상가였어요. 그가 사형당하기 전까지 뤼순 감옥에서 썼던 '동양평화론'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제국주의에 물든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한·중·일 3국이 협력해야 한다"고 말해요. 세 나라가 공동의 군대와 공동의 중앙은행을 갖고, 화폐도 같은 것을 사용할 정도로 깊은 협력을 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왜 일본에 대한 분노나 적개심 대신 평화와 협력을 말한 것일까요? 동양과 전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진정한 적은 제국주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은 "힘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말하며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수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어요.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며 국권과 삶의 터전을 지키려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요.
이런 맥락에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를 답습해 사람들을 죽이고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이토의 죄를 물은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100여년 전 유럽연합(EU)과 같은 평화 체제를 구상했다는 점에서 선구적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의 기억 속 이토 히로부미
우리의 국권을 강탈한 이토는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주역으로 기억되는 인물입니다. 에도 막부(幕府·무사의 우두머리인 ‘쇼군’이 통치하는 정부) 말기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이토는 영국 유학을 다녀온 뒤 “영국과 같은 강대국이 되려면 일본도 근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후 일본에 돌아와 쇄국정책을 펼치던 막부를 몰아내는 토벌 운동에 참가해 일왕 중심의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는 데 큰 공을 세웠어요.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이 시작되면서 이토는 서구 문물을 배운 경험과 타고난 정치 감각을 바탕으로 일본 정계를 주도했어요. 일본의 첫 근대적 헌법도 이토가 독일 헌법 등을 참고해 그 내용을 마련하였지요.
이토는 일본 제국의 첫 총리를 맡았고 이후에도 세 차례 더 총리를 맡아 일본의 근대화와 제국주의 침략을 동시에 이끌었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뉴스 속의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스 속의 한국사] 정약용의 애제자… 김정희도 극찬한 중인 출신 시인 (0) | 2021.11.07 |
---|---|
[뉴스 속의 한국사] 왕 자리 놓고 형제끼리 목숨 걸고 싸웠어요 (0) | 2021.11.07 |
[뉴스 속의 한국사] 포켓몬 많은 경복궁에서 숨은 역사도 함께 찾아봐요 (0) | 2021.11.07 |
[뉴스 속의 한국사] 중국 혼란 피해 온 이민자, 고조선의 왕으로 등극 (0) | 2021.11.07 |
[뉴스 속의 한국사] 할아버지·할머니가 세뱃돈 쓸 곳 정해줬대요 (0) | 2021.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