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정약용의 애제자… 김정희도 극찬한 중인 출신 시인

bindol 2021. 11. 7. 05:00

[시인 황상]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정약용, 소년 황상 제자로 삼고 시 가르쳐
정약용 죽자 집으로 찾아간 황상… 아들 정학연과 두 집안의 우정 맹세
황상의 시에 감탄한 김정희, 유배 후 직접 찾아가기도 했어요

최근 일본 교토대 서고에서 조선시대의 희귀 자료 수천 점이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직접 쓴 시첩 '노설첩'과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쓴 '경세유표' 가장본(家藏本·집 안에서만 간직하던 것) 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어요. 노설첩은 그동안 우리나라에도 공개된 적이 없고, 경세유표 가장본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료입니다.

정약용과 김정희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이자 예술가예요. 김정희는 정약용을 아주 존경했고, 두 사람은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서 머물던 다산초당에 걸린 현판과 다산초당 내 정약용이 지내던 방 동암에 걸린 현판 모두 추사 김정희의 글씨지요. 정약용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김정희는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정학유와 교류를 맺고 지냈어요.

그런데 양반이 아닌 중인(中人·조선시대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있던 계급)임에도 정약용에게 제자로서 사랑을 받고 김정희가 뛰어난 시인으로 인정한 인물이 있었어요. 그 주인공은 조선 후기의 시인 황상(1788~1863)입니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여라"

정약용이 천주교와 관련 있다는 이유로 강진으로 유배를 가 있을 때였어요. 그가 임시로 머물던 주막집 골방에 소년 황상이 찾아와 공부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고, 정약용은 황상을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며칠 뒤 황상은 정약용에게 부끄러운 듯 이렇게 말했어요.

"선생님, 저처럼 둔하고, 막혔으며, 답답한 사람도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요?"

이에 정약용은 "오히려 외우는데 민첩하면 그 재주를 믿고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되고, 글짓기를 잘하면 그 솜씨를 뽐내려고 들떠 있고, 이해가 빠르면 대충 하려고 한다"면서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면 오히려 너 같은 아이가 더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답니다.

 그림=정서용

스승 정약용이 건넨 따뜻한 당부의 말을 황상은 '삼근계(三勤戒)'라고 부르며 평생 자신의 신조로 삼았어요. 정약용은 중인이라 과거를 볼 수 없는 황상에게 유교 경전 대신 시를 가르쳤는데, 부지런히 시를 배운 황상은 1년 반 만에 정약용이 감탄할 정도의 시를 써냈답니다. 이렇게 성실히 공부해 실력을 쌓은 황상은 정약용이 가장 아끼는 제자가 되었어요.

◇정씨 집안과 황씨 집안의 맹세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경기도 마재로 돌아가자 황상은 산속에 작은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부지런히 시를 지었어요. 그러다 정약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는 강진에서 스승의 무덤이 있는 마재까지 찾아갔지요.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은 황상이 꺼낸 누더기 같은 종이를 보고 크게 감동했어요. 정약용이 써준 글이 적힌 종이를 황상이 오랫동안 간직한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에 정학연은 감사의 뜻으로 새로 종이를 꺼내어 아버지가 쓴 글을 다시 적어주었어요. 또 황상에게 "두 집안의 자손은 앞으로 아름다운 인연을 잊지 말고 왕래하며 우정을 지켜나가자"는 약속의 글을 써서 보냈답니다.

이 문서는 두 집안 사람의 이름과 나이도 쓰여 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를 '정씨와 황씨 집안이 약속을 맺은 문서'라는 뜻으로 '정황계첩'이라 불렀어요. 황상이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정약용의 참된 제자였음을 알 수 있게 된 것도 이 정황계첩 덕분이었습니다.

◇김정희의 인정을 받은 황상의 시

"오! 지금 세상에 이런 작품이 없다. 역시 다산 선생이 아꼈던 제자답도다!"

추사 김정희도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8년 동안 제주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어요. 이때 김정희는 황상이 쓴 시를 보고 크게 감탄했고, 유배에서 풀려나자 강진에 살던 황상을 직접 찾아갔답니다. 김정희가 정학연에게 보낸 편지에도 "제주도에 있을 때 한 사람이 시 한 수를 보여주었는데, 묻지 않고도 다산의 뛰어난 제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물었더니 황상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어요.

황상이 쓴 '치원유고'라는 시문집에는 김정희와 김정희의 동생 김명희가 써준 서문이 적혀 있는데, 이를 통해 김정희가 황상을 시인으로서 인정하고 존경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문에는 "멀리서 구해보면 (황상의 시는) 두보와 같고, 한유와 같고, 소동파와 육유와 같고, 가까이에서 구하면 다산과도 같을 것이다"는 구절과 "두보의 시도 아니요 한유의 시도 아니요, 소식과 육유의 시도 아니요, 아울러 다산의 시도 아니다"는 구절이 쓰여 있어요.

두보와 한유, 소동파와 육유는 모두 중국에서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사람들입니다. 서문 속 두 구절은 얼핏 보면 모순되어 보이지만, 황상의 시가 위대한 시인들의 영향을 받은 듯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완성했다는 찬사의 뜻을 담고 있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