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수로·드무·방화장… 궁궐 화재 막는 지혜 담겼죠

bindol 2021. 11. 9. 04:19

[우리 역사 속 소방시설]
신라시대 동궁에 있던 화강암 수로… "화재 진압 위한 소방 시설" 주장 나와

안압지라고 불러온 경주 월지 옆 '동궁'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수로가 있어요. 너비 29~30㎝, 길이 107m로 아홉 번이나 꺾여 이어져 있는데 비가 오면 궁궐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월지로 흘려보내는 배수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졌어요. 그런데 최근에 그 돌 수로가 배수로나 아름다운 경치를 꾸밀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궁궐 건물에 불이 났을 때 효과적으로 불을 끄기 위해 만든 소화 시설이라는 주장이 나와 관심을 끌고 있어요. 그 주장대로라면 월지의 돌 수로는 우리 역사 속 첫 '소방 전용 시설'로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인 셈이지요. 그렇다면 월지와 동궁은 어떤 유적이며 언제 만든 것일까요?

◇안압지가 아니라 월지

'화려했던 궁궐과 아름다운 연못가 꽃 풍경은 간데없고, 잡초와 갈대만 무성하여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드는구나!'

 /그림=정서용

조선시대 선비들이 신라의 천년 도읍지였던 경주에 구경을 와 반월성 동쪽에 있는 별궁 터 큰 연못을 보며 이렇게 시를 읊었어요. 그 연못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74년에 문무왕이 왕실 위엄을 높이고자 지은 것이에요. 연못 가운데에 세 섬, 못의 북동쪽으로 열두 봉우리의 산을 만들었고, 꽃과 나무를 심고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해요.

679년에는 연못 주변에 화려한 별궁을 지었고, 규모가 큰 중심 궁전을 왕세자가 머무는 동궁으로 쓰면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잔치를 베풀기도 했죠. 그러나 신라가 멸망하고 세월이 흘러 별궁은 사라져 터만 남았고, 조선시대엔 거의 폐허가 됐어요.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드는 연못이라는 뜻에서 '기러기 안(雁)' 자와 '오리 압(鴨)' 자를 써서 '안압지(雁鴨池)'라고 부르게 됐죠.

그러다 수백 년이 지난 1980년, 이 연못에서 '월지(月池)'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면서, 본래 이 연못을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월지'라 부른 사실이 확인됐죠. 이때부터 '안압지'가 아니라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바뀌었답니다.

◇궁궐 마당에 놓여있는 큰 가마솥은?

그렇다면 동궁 옆에 큰 연못 월지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따로 소방 시설로 사용할 돌 수로를 만들었을까요? 궁궐 건물은 주로 목재여서 불에 약했어요. 한번 불이 붙으면 삽시간에 타오르기 때문에 초기에 꺼야 효과적이었죠. 월지에서 물을 길어 동궁에 난 불을 끄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거예요. 그래서 바로 끌 수 있도록 아예 건물 주위를 둘러 길게 수로를 만든 게 아닐까 짐작합니다.

경주 월지 옆 동궁에 돌수로를 만든 것처럼 우리 옛 궁궐에는 화재를 예방하거나 불을 끄는 여러 장치를 마련했어요. 조선시대 궁궐에는 궁궐 마당 앞이나 귀퉁이에 물을 담은 커다란 솥 '드무'를 만들어 놓았어요. 불길을 급히 잡기 위해 방화수로 사용하기도 했겠지만, 드무에 물을 가득 채워 놓으면 궁궐을 침입한 불귀신이 드무의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대요.

◇조선시대 화재 예방책

궁궐에는 다른 건물로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과 건물 사이 또는 건물과 담 사이를 떨어져 짓게 했어요. 또 불이 번지는 것을 막는 담인 '방화장'을 세워 오늘날의 방화벽 구실을 하게 했어요. 궁궐 안 곳곳에 설치해놓은 연못, 우물, 개천을 불을 끄는 소화용수로 이용하기도 했고요.

도성인 한양에는 다섯 집마다 물독을 설치해 방화수로 활용하게 했고, 처마 밑까지 담장을 쌓게 하거나 밀집 주거 지역의 가옥을 일부 철거하거나 도로를 넓혀 불이 났을 때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으려 했어요.

태종 때에는 화재 위험이 큰 볏짚 지붕 대신 기와를 만들어 민가에 보급하기 위해 '별와요(別瓦窯)'라는 민간용 기와 만드는 관청을 세워 기와를 굽게 했대요. 또 태종 임금은 1417년에 금화령(禁火令)이라는 법령을 만들어 실시하기도 했어요. 금화령에는 '실수로 자기 집에 불을 낸 자는 볼기 40대를 때리고, 이웃집까지 불태운 자는 50대, 종묘나 궁궐까지 불태운 자는 사형에 처하고, 곡식이나 물건을 쌓아둔 궁궐 창고 안에서 불을 피운 자는 볼기 80대, 궁궐 창고를 지키거나 죄인을 간수하는 관리들이 불이 났을 때 혼자 도망가면 볼기 100대를 친다'는 내용이 있어요. 불을 낸 자를 엄격하게 처벌해 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려는 것이었죠.


[금화도감과 멸화군]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소방서처럼 화재 예방과 진화 등 소방 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관청이 따로 있었어요. 세종 때인 1426년에 설치한 금화도감(禁火都監)이에요. 금화도감은 시전 점포에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는 담을 쌓고, 도성 곳곳에 우물을 파서 물을 저장해두며 화재에 대비했지요. 금화도감은 1481년(성종 12)에 수성금화사로 이름이 바뀌었고, 멸화군(滅火軍)을 따로 선발했어요. 멸화군은 24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불이 나면 즉시 화재 현장으로 출동하는 '조선의 소방관'이에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