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호조에서 戶口 조사… 3년마다 가족 수·집 형태 파악했죠

bindol 2021. 11. 9. 04:20

[우리 역사 속 통계 조사]
통일신라 때는 촌주가 기록해 보고… 고려·조선시대는 호조에서 인구 조사
세금 부과하고 국가 재정도 관리해 기재부·국세청·통계청 합친 역할했죠

지난 9월 1일은 정부에서 정한 '통계의 날'이었어요. 1896년 9월 1일,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호구조사 규칙'을 공포했는데 이를 근대 통계의 시작으로 보고 기념일로 삼은 것이지요. 공교롭게도 '통계의 날' 며칠 전에 통계청장이 경질됐는데 이를 두고 논란이 컸죠. 통계청에서 정부 정책에 맞지 않는 통계 자료를 발표한 데 따른 조치라는 해석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근대화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도 통계를 내고 그 자료를 근거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이용했을까요? 오늘날 통계청 같은 관청인 호조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도 살펴봅시다.

◇통계의 시작, 호구조사

우리 역사에서 근대 통계의 시작이 된 '호구조사 규칙'을 보면 '전국 내 호수와 인구를 상세히 넣거나 만들어 백성이 국가가 보호하는 이익을 고르게 받도록 한다'는 목적이 나와요. 또 호구조사나 호적 작성을 위한 규칙을 어기는 백성을 처벌한다는 내용도 있죠. 그만큼 호구조사를 위한 규칙을 나라에서 엄격히 실시한다는 뜻이었어요.

 /그림=정서용

호적에는 호주의 나이, 본관, 직업 및 전 거주지, 집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 있다면 초가집인지 기와집인지, 집의 칸수는 어떻게 되는지 등을 기록하게 했지요. '호구조사 규칙'은 오늘날 인구와 주택의 규모 및 특성을 파악하기 위한 '인구·주택 총조사'와 같아요. 이처럼 국가가 백성에게 세금을 걷거나 병역 의무를 지우는 등의 목적을 위해 인구, 호적, 주택, 토지에 대한 통계를 작성한 것은 무척 오래전부터 있던 일이에요.

'호구단자'를 통해 고려와 조선시대 호구조사 방법과 그 내용을 알 수 있죠. 호구단자는 각 호(집)에서 호주, 즉 가장이 가족 구성원에 대해 정해진 형식대로 신고서를 작성해 소속 관청에 제출한 서류예요. 관청에서는 이를 확인한 다음 한 부는 보관해 호적을 고치는 자료로 삼고, 한 부는 제출한 사람에게 되돌려주었어요. 이 단자들을 고을마다 모아서 호적 대장을 만들어 행정의 근거로 삼았지요. 호구단자는 3년마다 작성했는데, 한 번 조사를 시작하면 1년 안에 마쳐 중앙에서 취합했다고 합니다

'신라장적'이라는 문서를 보면 통일신라 때도 호구조사를 했음을 알 수 있어요. 신라장적은 통일 신라 지방 관직인 촌주가 마을 사정을 기록해 중앙정부에 보고한 문서로 '신라 민정 문서'라고도 해요. 장적은 지금의 호적을 말해요. 여기엔 마을 이름과 둘레, 집 수, 인구, 논과 밭 면적, 과실나무 수, 가축 수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 문서를 통해 당시 농촌 생활과 통일신라 세금 및 행정 제도 등을 살펴볼 수 있어요.

◇호조판서로 이름 높았던 정홍순

고려와 조선시대에 호구조사를 하고 이 통계를 관리했던 중앙 관청은 호조(戶曹)라는 곳이었어요. 이 밖에 세금을 부과해 징수하고 각 관청에서 모아둔 금전과 경비 지출을 파악해 국가 경제에 관한 업무도 맡았어요. 오늘날 기획재정부와 국세청, 통계청을 합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죠.

숫자를 다루고 셈을 하는 업무가 많다 보니 호조에서는 이를 교육하는 부서를 따로 두었어요. 바로 산학청이죠. 지방 관청에서는 호방이라는 부서가 호조 업무를 담당해 지방 행정의 실권을 쥐었어요. 호조의 우두머리, 즉 최고 책임자는 정2품 호조판서였는데 조선시대 호조판서로 이름 높았던 인물로는 정홍순을 꼽을 수 있지요.

정홍순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 때 호조판서로 10년간 근무하면서 당대 제일 재정관으로 이름을 떨쳤지요. 정홍순은 훗날 우의정에 올랐는데 정승이 되고 나서도 검소함과 절약이 몸에 배었다고 합니다. 또 호조판서답게 신용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어요. 그와 관련한 일화가 하나 있어요.

정홍순이 호조판서가 되기 전 어느 날, 임금의 동구릉 행차 구경을 간 적이 있었어요. 그는 비 올 때 갓 위에 덮어 쓰는 갈모 2개를 준비했지요. 갑자기 비가 오면 하나는 자기가 쓰고 다른 하나는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려고 말이에요. 마침 소나기가 내렸고 어떤 선비가 정홍순에게 갈모를 빌려달라고 했어요. 정홍순은 그 선비에게 자기 집 주소를 알려주고 갈모를 꼭 돌려받기로 약속했지요. 그로부터 20년 후 정홍순이 호조판서가 됐을 때, 호조좌랑으로 임명된 사람이 직속상관인 정홍순에게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 정홍순은 신임 호조좌랑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20년 전 임금님 동구릉 행차 때 내 갈모를 빌려 가 돌려주지 않았지. 자네처럼 신용이 없는 사람은 호조좌랑 자격이 없으니 돌아가게."


[왕에게 인구를 보고하는 헌민수(獻民數)]

조선시대에 백성의 호구(戶口)를 조사해 임금에게 아뢰는 일을 '헌민수'라고 했어요. 문자 그대로 '백성 수를 바친다'는 뜻이에요. 유교 경전 '주례'에는 '백성의 수를 임금에게 드리면 임금은 절하면서 받는다'는 기록이 있어요. 인구가 느는 현상은 임금의 덕이 커서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렸기 때문으로 여겼지요. 임금 역시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는 마음으로, 백성 수를 받아들면 절하며 받았다고 합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