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27] 대주교인 친구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유럽 최강 국왕의 末路
잉글랜드 헨리 2세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1133~1189, 재위 1154~1189)는 ‘제국’에 준하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한 뛰어난 왕이었다. 프랑스 앙주(Anjou) 출신의 이 인물이 잉글랜드 왕이 되기까지에는 실로 복잡한 사연들이 얽혀 있다. 이야기는 1120년에 있었던 해상 사고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왕 헨리 1세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작도 겸하고 있었으므로 두 지역의 통치를 위해 영불해협을 자주 건너다녀야 했다. 이해 11월, 국왕 자신은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항해를 마쳤지만, 왕자 두 명과 귀족 300명이 탄 블랑슈-네프(Blanche-Nef)호가 암초를 들이받고 침몰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졸지에 왕위 계승자인 두 아들을 잃은 것이다. 남은 자식은 황제 하인리히 5세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는 바람에 친정으로 돌아온 딸 마틸다(Matilda)밖에 없었다. 헨리 1세는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한 후, 여러 전략적인 고려 끝에 마틸다를 앙주 백작 제프리 플랜타지네트와 재혼시켰다. 후일 이 결혼에서 나온 아들이 헨리 2세라는 이름으로 왕이 되어 플랜타지네트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20여년 내전 끝에 왕위 계승한 헨리 2세
1135년 헨리 1세가 사망하자 정해진 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았다. 마틸다를 여왕으로 추대한다는 선왕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후보가 여럿 나타났다. 이런 어수선한 시기에는 선수를 치는 게 중요하다. 마틸다를 비롯한 다른 후보들은 먼 지역에 있던 반면 선왕의 조카인 스티븐(Stephen of Blois)은 잉글랜드 남부까지 하루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런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왕위 쟁탈의 중요 요소이던 시대다. 스티븐은 런던 시민들과 일부 귀족을 설득하고 캔터베리 대주교에게서 도유식(기름 부음 의식)을 받아 왕관을 썼다. 선왕이 임종할 때 마음을 바꾸어 자신을 지명했노라는 허위 사실 유포까지 했다.
눈앞에서 왕위를 놓친 마틸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제 잉글랜드는 마틸다파와 스티븐파 사이의 내전으로 치달았다. 중앙 권력이 약화하자 지방 귀족들은 거칠 것 없이 권력을 행사했다. 농민들을 징발해 성을 쌓고 병사들을 길러 약탈 행위를 일삼는 ‘강도 귀족’도 많았다. 20년 가까운 세월 무법천지가 되자 사람들은 정당한 국왕의 올바른 통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다. 내전을 벌이던 양측도 오랜 투쟁 끝에 지쳐 타협에 들어가 1153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맺었다. 스티븐은 마틸다의 아들 헨리를 양자로 삼아 자신을 이을 계승자로 지정하고 국정에 미리 참여하도록 했다. 다음 해 스티븐이 죽자 헨리 2세는 순조롭게 왕위를 물려받았다.
헨리는 여러 차례 운 좋게 영토를 늘려갔다. 1151년 부친의 사망으로 앙주와 멘(Maine) 백작이 되었고, 다음 해 아키텐의 알리에노르와 결혼하여 그녀가 유산으로 받은 프랑스 중서부 영토도 차지했다(‘아키텐의 알리에노르’ 편 참조). 이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자 그는 스코틀랜드 변경에서 피레네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의 지배자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 영토는 ‘앙주 제국’ 혹은 ‘플랜타지네트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헨리 2세는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왕국의 지배자로 꼽혔다. 그 자신도 제국 통치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국정을 개혁한 ‘관습법의 아버지’
헨리는 잉글랜드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외국인이었다. 그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였으며, 영어는 알아듣기는 하나 말은 못 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히려 국내 사정에 연연하지 않고 개혁을 밀어붙였다. 국왕에게 대들다가는 대륙에서 막강한 군대를 끌고 와서 짓누를 태세였다. 무엇보다 사법권을 확실하게 장악해서 그동안 지방 영주 법정에서 다루던 많은 사건을 국왕 순회법정으로 넘기도록 조치했다. 국민들로서도 불합리한 점이 많았던 영주 법정보다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소집된 배심원들이 명백한 증거를 통해 판결을 내리는 국왕 법정을 선호했다. 전국에 동일한 법률이 적용되면서 점차 관습법(Common Law) 체계가 잡혀 가기 시작했다. 헨리 2세가 ‘영국 관습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다. 런던 고문서보관소에 보존된 엄청난 양의 문서를 보면 행정, 외교, 사법 등 모든 분야마다 헨리 2세가 얼마나 정력적으로 국정을 개혁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치세 중 일어난 중요 사건으로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 살해가 있다. 국왕은 즉위 직후 수도사 출신인 베켓을 천거받았다. 뛰어난 행정 능력을 갖춘 베켓은 치세 초기 국정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문제는 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벌어졌다. 지금까지 거의 친구처럼 잘 지내던 두 사람은 이후 원수 관계로 돌변했다. 자리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베켓은 대주교로 임명되면서 국왕에게 ‘여태 저를 총애한 것 이상으로 증오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말년에는 아내·아들과 전투
정치와 종교 간 갈등은 재판권 관할 문제로 폭발했다. 원래 교회 법정은 종교 문제만 담당해야 하지만 점차 더 많은 재판을 자기 관할로 삼으려 했다. 소유권을 다투는 문제도 신의 이름을 건 선서 위반 사건이라며 교회 법정으로 가져가는 식이다. 피고인들도 국왕 법정보다 관대하고 벌금도 적으며 구속도 잘 하지 않는 교회 법정을 선호했다. 이렇게 되면 국왕의 통치 기반이 약화할 수밖에 없다. 헨리는 베켓에게 종교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교회 직위를 박탈당한 사람을 세속 재판에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베켓은 거절했다. 국왕의 강압에 못 이겨 명령에 따른다고 했다가 프랑스로 도주해서는 교황에게 탄원하여 국왕을 파문했다.
파문으로 인해 잉글랜드 전체가 성무(聖務) 정지 상태가 되면 아무리 국왕이라고 해도 힘을 쓸 수 없다. 별수 없이 국왕은 베켓을 찾아가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힘을 되찾은 베켓은 곧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그동안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던 주교들을 파면하려 했다. 프랑스에서 이 소식을 접한 헨리 2세는 ‘내가 한낱 수도사의 조롱거리가 되는데, 신하 중 나를 위해 뭔가를 하는 자가 없다’며 탄식했다. 이럴 때 과잉 충성하는 자들이 꼭 문제를 일으키는 법. 기사 4명이 아무 말 없이 잉글랜드로 가서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베켓을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헨리 2세는 전 유럽에 걸쳐 악마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집안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헨리는 자신의 사후에 영토를 분할하여 아들들에게 넘겨줄 계획을 했다. 이것이 오히려 부모 자식들 사이, 형제들 사이에 분란을 가져왔다. 더 이상의 막장 드라마가 없다. 아들 중 리처드 편을 드는 왕비 알리에노르는 전 남편인 프랑스 국왕을 끌어들여 남편과 전투를 벌였다. 막판에는 부왕이 산속 오솔길로 도주하는데 그 뒤를 아들이 추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중병에 걸려 시농(Chinon) 성에 누워 있을 때 신하가 새로운 반역자 명단을 가지고 왔다. 제일 위에는 그토록 사랑하던 막내아들 존의 이름이 있었다. 존도 아버지의 힘이 약해지자 반역에 나선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나는 이 세상일을 생각할 기력도 없노라” 하는 말을 마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얼마 후 별세했다. 얼마나 무상한가, 세상의 권력이여!
<국왕의 최후>
헨리 2세를 끝까지 지킨 얼마 안 되는 신하 중 하나인 윌리엄 마셜(William Marshal)이 국왕의 최후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발뒤꿈치에서 시작된 병세가 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결국 온몸이 불타는 듯했다. 국왕은 고통 때문에 신음 소리를 내며 짐승처럼 꿈틀거렸다. 왕자 리처드는 왕위를 빨리 물려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 “늙은이가 코미디를 벌이고 있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즈음이면 거의 모든 신하가 다 도망가고 없었다. 마침내 왕은 피를 토한 후 죽었다. 윌리엄이 죽은 왕을 보니 팬티만 입고 있어서 외투로 덮어주었다. 장례식을 마칠 무렵 인근의 빈민들이 몰려왔다. 국왕의 장례식 때에는 빈민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돈 한 푼 남아있지 않아 음식을 주지 못하자 몰려든 빈민들이 화가 나서 다 때려 부수겠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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