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인천 외국인묘지에서 구한말 역사를 만난다
262. 인천 외국인묘지 군상(群像)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있는 인천가족공원 안쪽에는 외국인묘지가 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인천과 인연을 맺었던 외국인들이 잠든 묘지다. 1914년 중구 북성동에 처음 조성됐다가 6‧25 때 파괴돼 청학동으로 옮긴 뒤 2016년 공원으로 이전됐다. 멀리는 150년 전 많은 꿈을 안고 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영혼들이 함께 안식한다.
영국,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 민간인과 병사들도 있다. 만 세 살을 갓 넘긴 저스틴 매카시(미국?)라는 아이도 묻혀 있고 한 살 갓 넘기고 죽은 독일(추정) 아이도 묻혀 있다. 하나 글로버 베넷(Hana Glover Bennett)이라는 스코틀랜드 여자 묘도 있다. 이 여자는 1873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38년 인천에서 죽었다.
그 가운데 구한말 조선이 맞닥뜨린 거대한 시대정신, 근대화(近代化) 물결과 함께 흘러간 사람들이 있다. 월터 타운센드(Walter Townsend‧미국) 그리고 오쿠가와 가타로(奧川嘉太郞‧일본). 비슷한 시기에 일본 개항지 나가사키에도 비슷한 생을 살았던 사람이 있다. 이름은 토머스 글로버(Thomas Glover‧스코틀랜드)다. 인천 외국인묘지에 잠들어 있는 하나 글로버의 친아버지다. 흥미진진한 소설이나 영화라면 좋았을, 150년 전 이방인들의 인생 유전과 구한말 조선의 얄궂은 만남.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2. 인천 외국인묘지 群像
개항, 갑신정변, 오쿠가와 형제
1883년 제물포가 개항됐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이 나라 문을 연 이래 조선 정부는 전국 주요 항구를 외국에 개방했다. 일본은 자기네와 가까운 부산, 그리고 수도 한성과 가깝고 대륙 진출이 용이한 제물포를 개항지로 요구했고, 관철됐다. 개항할 무렵 인천에 조선인은 10여 집밖에 없었고 ‘갈대만 무성히 자라고 월미도 동쪽과 만석동 해변 작은 어촌에서 슬픈 아리랑만 들려오는 땅’이었다.
개항하던 그해 조선인 공식 인구는 0명이었고 그 무주공산에 들어온 일본인은 348명이나 됐다. 러일전쟁이 터지자 전쟁 특수를 노린 모험 상인들이 쏟아졌다. 인천부사(仁川府史‧1933)에 따르면 1905년 인천에는 조선인이 1만866명, 일본인이 1만2711명으로 일본 사람이 더 많았다.(인천광역시, ‘제물포 진센 그리고 인천’(인천역사문화총서 39), 2007, p123 등)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터졌다. 48시간 만에 쿠데타는 대실패로 끝났고 주동자들은 일본군 엄호 속에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1878년 가족과 함께 돈을 벌러 입국한 오쿠가와 가타로와 동생 요시카즈(義一·기이치라고 읽을 수도 있다)도 죽었다. 형 가타로는 1883년 조선 정부 의뢰로 증기 기선을 도입하려 하기도 했고(나애자, ‘개항기 민간해운업’, 국사관논총 53집, 국사편찬위, 1994) 조선인과 합작해 일본식 사기 그릇 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전우용, ‘종로와 혼마치’, 서울역사박물관대학 24기 강연집, 서울학연구소, 2013)
갑신정변이 터졌다. 그 무렵 한성에 살고 있던 일본 민간인은 20여 명이었는데 난리통 속에서 많은 이가 죽었다. 정변을 지원한 일본인들은 정변에 반대한 사람들로부터 생명의 위협 속에 인천으로 달아났다. 오쿠가와 형제도 그때 죽었다. 일본인들은 이들을 ‘조난자(遭難者)’라고 불렀다.(국역 ‘경성부사’1권(1934), p550~552) 형은 32세였고 동생은 15세였다. 오쿠가와 집안에는 다행스럽게도, 외국인 묘지 일본인 묘역 첫째 자리에 형제가 잠들어 있다. 근대화라는 수레바퀴에 치여 희생된 영혼들이다.
근대화와 조선정부와 타운센드
조선은, 인천은 새롭게 열린 신천지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이 나라에서 부를 거머쥐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인천으로 입항했다.
월터 타운센드도 그중 한 명이었다. 보스턴 출신인 타운센드는 미국인 모스가 일본에서 운영하는 미국무역상사(American Trading & Co) 직원이었다. 그런데 1883년 개화파 김옥균이 차관을 얻기 위해 일본에 가면서 인연이 시작된다.
왜 차관이 필요했나. 돈이 없어서다. 뒤늦게 개항을 하고 근대화를 하려다 보니 조선 정부 재정이 부실했다. 1881년 청나라로 떠났던 군사유학단 영선사(領選使) 일행은 식비조차 없었다. 영선사 단장인 김윤식은 이렇게 기록했다. ‘가지고 간 인삼을 은(銀)으로 바꿔주지 않아 밤낮으로 빈궁해져 사방에 빚을 구걸하며 눈앞의 긴급함을 구하였다.’(김윤식, ‘음청사(陰晴史)’ 1882년 4월 27일) 조선 정부에 왜 돈이 없었는지 이야기하려면 국부(國富)와 강병(强兵)을 위한 부강책의 초장기 실종 사태에 대해 말해야 하니 밑도 끝도 없겠다.
어찌 됐든 김옥균은 근대화를 위해 차관을 빌리러 일본에 갔고, 일본 정부로부터 거부를 당했으며, 그때 미국 상인 모스가 차관 제의를 받아들였고, 이를 위해 모스가 조선으로 파견한 직원이 월터 타운센드였다. 조선 정부는 울릉도 벌채권을 담보로 차관 계약을 맺었다.
고종과 타운센드, 그 악연
그런데 1884년 갑신정변이 터지며 모든 게 돌변했다. 고종 정부가 이 벌채권을 대가로 일본에 체류 중이던 유학생 위탁 송환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일본에는 김옥균과 박영효가 보냈던 관비, 사비 유학생 18명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1명을 제외한 전원 송환을 타운센드에게 위탁했다.(하지영, ‘한국근대 미국계 타운센드상회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1995)
타운센드가 배 한 척 분량 목재를 팔아 만든 돈에 조선 정부가 관세 회계에서 빼낸 돈을 합쳐 고종 정부는 이듬해 6월 유학생들을 송환했다. 명분은 ‘정변 후 학업 소홀’이었지만 실질은 개화파 박멸이 목적이었다. 실제로 당시 미국 유학 중이던 유길준의 사촌 동생 유형준은 그때 송환돼 처형됐다.(이광린, ‘개화당연구’, 일조각, 1979, p214)
이후 타운센드가 고종 정부와 합작한 사업은 그 성과가 눈부시다. 1884년 평안도를 시작으로 금광을 탐사하던 타운센드는 당시 미국 공사 호러스 알렌에게 국내 최대 금광산인 운산 금광 정보를 알려줬고, 알렌은 왕비 민씨로부터 운산 금광을 ‘선물’ 받았다. 타운센드는 상인이기도 했고 광산 기사이기도 했다. 공무원 신분인 알렌은 조선 정부와 미국인 모건 사이에 계약을 주선했다. 훗날 고종은 현금 1만3500달러를 받고 운산 금광 40년 채굴권을 미국 회사에 팔았다. 1896년부터 미국 회사가 광산을 일본에 넘긴 1938년까지 미국 측이 가져간 순익은 1500만달러였다.(이배용, ‘한국근대광업침탈사연구’, 일조각, 1997, p91)
1887년 에디슨 전기회사의 경복궁 전등 설치 공사를 중개하고 부품을 수입한 사람도 타운센드였다. 1896년 미국 사업가 데실러(Deshler)가 하와이 이민 사업을 추진할 때도 타운센드가 개입했다. 1897년 3월 22일 경인철도 기공식에서 테이프를 끊은 사람도 타운센드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2권 3.본성왕복보고 1897년 3월 31일) 미국 스탠더드석유회사 한국 지점장 또한 타운센드였다. 을사조약 체결 사흘 뒤인 1905년 11월 20일 미국 공사관이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해 가진 만찬에도 타운센드는 미국 측 참석자에 포함돼 있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신천지에 발을 디뎠던 미국인 청년은 그 파란만장 혹은 화려한 생을 살고 1918년 62세로 인천에서 죽었다. 난리통에 목숨을 잃은 일본인 가장 오쿠가와도, 조선 근대사 골목마다 얼굴을 비췄던 젊은 미국인 사업가 타운센드도 인천에 잠들어 있다.
나가사키의 상인 글로버
일본 개항장 가운데 하나였던 나가사키에는 토머스 글로버라는 스코틀랜드 상인이 살았다. 타운센드처럼 대유럽 무역을 독점하던 상인이었다. 스물한 살 때인 1859년 일본에 입국한 이래 총포, 화약, 군함, 차, 도자기, 그림 따위 오만 잡것들을 수입해 파는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글로버는 조선소, 철도, 맥주까지 ‘일본 최초의 서구(西歐)’를 팔고 더 많은 돈을 모았다. 친딸 하나는 베넷이라는 상인과 결혼해 제물포에서 여러 무역상사를 운영하며 살았다.
‘신천지 성공 신화’라면 제물포에 살던 미국인 타운센드와 비교할 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글로버는 단순한 무역상이 아니라 일본 근대화 작업인 메이지유신에 깊이 간여한 인물이다.
메이지유신 5년 전인 1863년 근대화를 주도하던 조슈 번(현 야마구치현) 청년 5인이 극비리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조선 식민지화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이토 히로부미와 민비 암살 사건에 간여한 이노우에 가오루도 그 5명에 끼어 있었다. 막부 허가 없는 출국은 금지된 시대였다. 이들을 비밀리에 자기 회사 상선에 태워 밀항을 도운 사람이 글로버였다. 2년 뒤 1865년에는 사쓰마 번 청년 15명이 또 글로버 회사 상선을 타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앙숙지간이던 조슈와 사쓰마(가고시마현), 두 번이 동맹(삿쵸 동맹)을 맺은 배경도 글로버였다. 글로버의 동업자 혹은 ‘얼굴마담’ 격인 낭만적이되 걸출한 무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이 두 번을 중재했고, 그 중재에 따라 탄생한 삿쵸 동맹에 무기를 제공한 무기상이 또 이 글로버였다.
중앙정부 격인 막부가 독점한 무역을 당시 최강 번인 조슈, 사쓰마와 글로버가 나눠 가지며 글로버는 엄청난 부자가 됐다. 그리고 일본 근대화 ‘지사(志士)’ 집단은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을 강국으로 이끌었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서 벌인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지식인과 권력자들은 서구 자본가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이용해 나라를 새로 만들어갔다. 시대를 주도하는 실천력이 이뤄낸 역사다. 글로버는 ‘스코틀랜드 사무라이’라고 불린다.
지금 나가사키에는 글로버가 살던 저택 ‘구라바엔(글로버 정원‧’구라바'는 글로버의 일본 발음이다)이 보존돼 있다. 그가 열어놓은 무역 시장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글로버 저택은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배경이 됐다. 구라바엔에는 나비부인 프리마돈나 미우라 다마키(三浦環) 동상이 서 있다. 그 옆에는 1996년 이탈리아에서 기증한 푸치니 동상이 서 있다. 근대화라는 시대정신에 몇 걸음 물러나 있던 150년 전 조선에서 아쉬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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