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하고 풀어보는 한일 악연 500년사②
* 술자리에서 남들 다 아는데 혼자 모르는 낭패감 혹은 혼자만 아는 사실을 떠벌리며 대화를 주도하는 통쾌함. 낭패를 막고 쾌감을 얻는, 알면 재미있고 몰라도 행복한 ‘박종인의 땅의 잡사’
조선이 쇄국을 고집하는 동안 나이 어린 일본 소년들이 바티칸에서 신을 만나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 금의환향한 소년들은 히데요시로부터 자랑스럽다는 환대를 받았다. 그들이 환대를 받는 그 순간 조선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성리학적 아집과 세계관에 사로잡혀 정세를 읽지 못했다. 일본에 와 있던 세계를 읽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계는 언제 일본으로 왔는가. 서기 1543년, 정확하게는 1543년 9월 23일이었다.
◇상선의 좌초와 철포의 전래
‘철포기’라는 일본 기록에 따르면 1543년 9월 23일부터 며칠 간 다네가시마에서 벌어진 일은 이러했다. 다네가시마는 일본 가고시마항에서 남쪽으로 2시간가량 배를 타고 가면 나오는 작은 섬이다.
<큰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선원만 100명이 넘었다. 생김새도 기이했고 말도 통하지 않았다. 동승했던 명나라 유생 오봉五峯은 이들이 서남만인西南蠻人 상인들이라 했다. 이틀 뒤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가 이들을 만났다. 이 가운데 모랑숙사牟良叔舍와 희리지다타맹태喜利志多佗孟太가 인사를 했다. 이들 손에는 두세 자짜리 작대기가 들려 있었다.
작대기는 가운데가 뚫려 있었다. 바위 위에 술잔을 놓고 그 작대기에 눈을 대고 겨누니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나며 잔이 박살났다. 은으로 만든 산도 무너뜨리고 쇠로 만든 벽도 뚫을 것 같았다. 도키타카는 “보기 드문 보물이로다”라며 거금을 주고 두 자루를 사고 화약 제조법도 배워 가보로 삼았다. 이름은 철포鐵砲라 했는데,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열다섯 살인 도키타카는 “모든 이가 원하는 것이니 내 어찌 이를 혼자 숨겨두겠는가”라며 기슈紀州에 있는 승병 장군 스노기노보衫坊에게 보냈다. 한 자루는 대장장이인 야이타 긴베에八板金兵衛에게 하사해 역설계를 명했다.>
요약컨대, 서남만인 즉 포르투갈 사람들이 해적선을 타고 다네가시마에 표류했고 이들을 통해 열다섯 살 먹은 섬 영주 다네가시마 토키다카는 철포를 구입했다는 뜻이다. 이들 포르투갈인이 들고 온 작대기는 100년 전 유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발된 화승총, 아쿼버스였다. 마흔한 살 먹은 대장장이 야이타는 도주 도키타카가 명한 대로 철포를 분해해 국산화 작업에 들어갔다.
문제는 나사였다. 화약 폭발력에 탄환이 발사되도록 총열 뒤를 막아야 하는데, 아무리 쇠를 불로 녹여 구멍을 막아도 터져버리곤 했다. 두꺼운 뚜껑에 나사산을 파서 단단하게 결합시켜야 했지만, 일본은 나사라는 부품에 대해 무지했다.
◇대장장이 야이타와 외동딸 와카若狹
야이타 가문 전승에 따르면 그때 포르투갈인 제이모토가 외동딸 와카若狹를 각시로 주면 기술을 전수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다음은 동화다. 전형적인 아시아 효녀와 충신 이야기다. 야이타는 와카와 부둥켜안고 며칠 밤을 울었다. 와카는 “다이묘(大名, 영주)에게 충성을 바치시라”는 당부와 함께 제이모토를 따라 포르투갈로 떠났다. 국제결혼을 한 첫 일본 여자였다. 사위 제이모토는 이듬해 각시와 함께 돌아와 장인에게 나사산을 파는 기술과 이를 고정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와카는 귀국 며칠 후 죽었다.
효녀는 지금 다네가시마 공동묘지 왼쪽 언덕에 잠들어 있다. 복잡하고 험한 세월 속에 와카 유골함 위에 서 있던 비석은 파손돼 자연석처럼 보인다. 커다란 소철 두 그루가 와카 비석을 호위하며 서 있다. ‘철포기鐵砲記’에는 없는 이야기이고, 야이타 문중에 구전되는 이야기다. ‘철포기’에는 ‘이듬해 돌아온 만종 상인에게 나사 제조술을 배워 제작에 성공했다’고 돼 있다.
◇열다섯 살 먹은 도주의 선택
‘도키타카는 아름다운 장식이 아니라 실전 효용을 원했다. 사격술을 배운 이들 가운데 백발백중인 자가 셀 수 없었다. 이후 이즈미(和泉, 현 오사카) 상인이 와서 기술을 배워 간 이래 기나이(畿內, 교토 주변)까지 철포가 퍼져나갔다.’
철포라고도 했고 그저 ‘다네가시마’라 부르기도 했다. 불과 2~3년 사이에 철포 수백 정이 생산됐다. 1556년에는 이미 일본 전역에 있는 철포가 30만 정이 넘었다. 그때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 군인 핀투는 ‘동방편력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가 다섯 달 정도 일본에 머물다 떠날 때쯤 이미 일본인들은 철포를 600정이나 제작해놓았다. 그리고 1556년 우리는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다이묘가 있는 분고국豊後國 수도 푸체오豊前를 다시 찾았다. 그때 덕망 높은 상인이 푸체오에 철포가 3만 정이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그는 일본 전역에 30만 정이 넘고 이미 류큐 왕국에 2만 5,000정을 판매했다고 말했다. 그 짧은 기간 그렇게 많은 총이 만들어진 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30만 정은 당시 유럽대륙 전체가 소유한 소총보다 많은 숫자다. 핀투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사실일 확률이 높다. 1693년 조선 관리 신경申炅이 쓴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30만 정'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일본에 살고 있던 명나라 사람 허의후가 명나라 지방군 사령관에게 보낸 임진왜란 첩보 편지다.
<일본의 새 관백 평수길이 8개 나라를 합병하고 오직 관동關東만 항복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1590년 정월 8일에 여러 장수들을 궁전 앞에 모아 놓고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관동 지방을 치라고 명하면서 “성을 겹겹으로 에워싸고 사방에 성을 쌓아서 지켜라. 나는 곧 바다를 건너 명나라를 침략하겠다” 하고, 비전 태수에게 명해 배를 만들라고 했다. (중략) 관백의 친병 50만 명을 더하여 합계 100만 명, 대장이 150명, 전마가 5만 필, 큰 괭이 5,000자루, 참도 10만 개, 장창 10만 개, 도끼 10만 개, 땔감용 칼 50만 개, 조총 30만 자루이며, 세 척 장검은 사람마다 몸에 차게 했다.>
검술에 유파가 있듯, 새로 들어온 무기에 매혹된 대장장이들은 저마다 유파를 만들어 철포를 제작했다. 사카이가 유명했고 구니토모도 유명한 철포 생산지였다. 때는 전국시대였다. 다이묘와 무사들은 권력을 향해 무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창과 활과 칼로 싸우던 그 악다구니판에 철포가 들어왔다. ‘구니토모 철포기’에 따르면 1549년 열다섯 살이 된 미래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가 구니토모 철포 장인으로부터 철포 500자루를 구입했다. 1575년 6월 29일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나가시노에서 다케다 가쓰요리 부대를 전멸시켰다. 노부나가 병력 7만 가운데 3,000명이 철포부대였다.
◇다이묘 요시나가의 편지와 조총
아사노 요시나가淺野吉長라는 다이묘는 또 다른 전쟁터에서 적에게 포위돼 곤경에 빠졌다. 요시나가는 아버지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닥치는 대로 총을 보내주십시오. 사무라이도 칼 대신 총을 가져오라고 엄히 하명하십시오.>
1582년 암투 속에 오다 노부나가가 자살했다. 이미 그 무렵 막강한 다이묘가 소유한 부대는 3분의1이 철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중국은 창이고 조선은 활이며 일본은 칼이다. 동아시아 3국이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인 무기 분야다. 화약을 쓰는 화기가 아닌 차가운 무기, 냉기가 세 나라 주력 무기였다. 창과 활과 칼은 각자 무시무시하고 잔인하고 끔찍한 무기다. 유럽에서 사용된 지 100년밖에 되지 않은 철포는 단점이 많았다. 적중률이 떨어지는데다 화약을 채운 뒤 탄환을 총신 앞으로 집어넣고 화승에 불을 붙여 격발할 때까지 시간도 많이 걸렸다. 하지만 일단 적의 몸에 맞은 탄환은 살 속 깊숙이 파고들어가 뼈를 부수거나 장기를 꿰뚫었다. 어디에 박혀 있는지 웬만한 외과의사가 아니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명중하면, 적은 대개 치명상을 입고 전투력을 상실하거나 죽었다.
중국과 조선은 화기火技에도 강했다. 다만 개인 화기가 아니라 들고 다니기에는 무거운 총통류였다. 그런데 1543년 그 날, 사람 손에서 불을 뿜는 개인 화기가 저벅저벅 걸어서 제발로 일본에 들어온 것이다. 일본은 즉시 화기를 택했다.
1525년 2월 24일,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파비아 전투에서 칼과 랜스 창을 든 중세 기사단은 아쿼버스 부대에 몰락했다. 18년 뒤 그 아쿼버스가 일본에 상륙했다. 1590년 전국통일을 앞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호조 우지나오와 최후 결전을 벌였다. 우지나오는 오다와라 성 성루에 각각 대포 1문과 철포 3정을 배치했고, 히데요시는 그 성을 향해 철포 수만 발을 퍼부었다. 철포 다이묘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했다. 칼을 놓지 않은 자는 패했다. 총을 쥔 자는 이겼다.
◇철포를 따라 들어온 문명
자, 그렇게 일본이 세계를 만났다. 1591년 오사카 주라쿠다이에서 조선 통신사들 옆을 스쳐간 그 세계가 일본으로 들어왔다. 철포 2정이 창조해낸 세상은 단순한 무기 거래 시장 이상이었다. 일본은 철포를 발견했고 유럽은 일본을 발견했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동과 서가 대등한 수준으로 교류를 시작됐다.
교류는 양방향적인 행위다. 유럽은 어마어마한 구매력을 가진 시장을 알게 되었다. 명나라처럼 머리를 숙이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 황제가 허락하는 물량만 주고받거나 밀무역으로 거래해야 하는 시장이 아니었다. 욕망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적극적으로 자유롭게 상품을 사고 팔 수 있는 개방된 시장이었다. 17세기 이후 동서 교류 주역은 욕망을 분출할 시장을 찾던 유럽과 시장과 구매력을 가지고 있던 일본이었다.
일본 권력자들은 대량살상을 너무나도 쉽게 가능케 하는 무기를 습득했다. 권력자는 권력을 더 강력하게 유지할 수 있었고, 사무라이들은 유럽 중세 기사들처럼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서기 1543년 9월 23일, 위계질서로 정교하게 설계돼 있던 천하天下가 파괴되고 지구가 세계世界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천하를 고집하던 나라들은 이후 각도를 달리하며 흐르는 역사에 질질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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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바로 그 무렵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얀 공작새 한 마리와 함께 조총이 하늘로 날아갔다.<다음편에 계속> /선임기자(‘매국노고종’, ‘대한민국징비록’, ‘땅의 역사’ 저자)
<동영상은 유튜브 ‘박종인의 땅의 역사'에서도 시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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