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서산 소나무 숲 속에는 봄이 아득하였다

bindol 2021. 12. 4. 15:08

255. 이 땅을 물들인 세 가지 봄 풍경

봄에는 꽃을 즐긴다. 그리고 가을에 열매를 거둔다 - 서산 유기방 고택 수선화./박종인
입력 2021.04.14 03:00
 
 
 
 
 

실용주의 학자 홍만선(1643~1715)이 봄을 즐기는 방법은 냉정했다. 그에게 꽃과 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땅에 맞게 나무를 두루 많이 심는다(隨地所宜 雜植樹木·수지소의 잡식수목). 그러면 봄에는 꽃을 즐기고 여름에는 그늘을 즐기며 가을에는 그 열매를 먹는다. 또 나무가 크게 자라 재목이 되고 쓰임이 되니 꽃과 그늘과 열매와 재목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春則賞花 夏則蔭涼 秋則食實 以至材木器用 亦皆取資於是·춘즉상화 하즉음량 추즉식실 이지재목기용 역개취자어시).(홍만선, ‘산림경제’2 나무심기(種樹·종수))

‘잡식수목(雜植樹木)’. 모내기를 하듯 처음부터 줄을 맞춰 심는 게 아니라 땅에 맞는 나무들을 되는 대로 심으라는 뜻이다. 그러면 봄에는 꽃을 즐기고 가을에는 그 열매를 취해 먹을 수 있고 재목은 따로 쓸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열매와 재목이 목적이며 꽃은 덤이다.

늘 그러하듯 이 땅에 봄이 왔고, 그 봄이 이제 간다. 가을 열매를 위해 피어난 봄꽃들이 대지로 돌아가는 그 풍경을 구경해본다.

충청남도 서산에는 봄이 폭발하는 중이다. 대대로 서산에 살아온 서산 류씨 집안 유기방씨가 고택 야산에 심은 수선화가 눈을 어지럽힌다. 봄은 꽃을 즐기는 계절이다. 꽃에 정신이 팔려 계절을 놓치면 가을에 거둘 열매도, 수확도 없다. 그래서 실용주의 학자 홍만선은 "봄에 꽃을 즐기되 가을에는 그 열매를 먹고 재목을 거둔다"라고 했다. 봄 풍경에 취하지 말라는 소리다./박종인

[박종인의 땅의 歷史] 255. 이 땅을 물들인 세 가지 봄 풍경

안개가 인도해준 고운사 산길

신라 말 학자 최치원은 육두품이었다. 성골과 진골 지붕을 뚫지 못하고 좌절한 그는 전국을 떠돌다 홀연히 사라졌다.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고운사는 그가 한 동안 은둔했던 절이라고들 한다. 일주문에서 그가 만든 절집 '가운루'와 '우화루'까지, 산길에 봄 안개가 자욱하다. 좌절한 사내 최치원이 걸어간 길이지만 지금은 아늑하고 신비하다. /박종인

경상북도 의성에 고운사(孤雲寺)가 있다. 신라 말 관료 최치원이 이 절에 머물다 부산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그래서 절에는 최치원 자(字)인 고운(孤雲)이 붙어 있고 부산 바다에는 또 다른 자인 해운(海雲)이 붙어 있다. 절로 가는 길은 봄이다.

성골, 진골 다음 신분인 육두품으로서, 최치원은 신분 상승을 꿈꾸며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서기 868년이다. 서기 874년 나이 열여덟에 외국인 대상 빈공과(賓貢科)에 붙어서 관료 생활을 했다. 10년 뒤 귀국한 최치원은 또 894년 진성여왕에게 세상을 개혁할 계책을 담은 시무 10조를 제출했다. 진성여왕은 이를 좋게 여겨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8년 2월) 아찬은 신라 열일곱 관등 가운데 여섯째 관등이다. 육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이다. 거기에서 최치원은 한 풀 꺾였다.

결국 최치원은 혼란한 세상을 만나 운수가 꽉 막히고(蹇屯·건둔) 움직이면 매번 비난을 받으니 불우함을 한탄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산 아래와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를 심었다. 책을 베개 삼아 읽고 시를 읊조렸다.(‘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그러니 고운사로 오르며 최치원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세상 등지겠다고 작정하고 오르는 산길이었으니까. 그가 시를 쓴다. ‘머나먼 만 리 길 사막 지나오느라 / 털옷은 다 해지고 티끌만 뒤집어썼네(遠涉流沙萬里來 毛衣破盡着塵埃·원섭류사만리래 모의파진착진애)’(최치원, ‘산예(狻猊·사자)’) ‘遠’은 ‘머나먼’으로도 읽히고 최치원(崔致遠)의 ‘원(遠)’으로도 읽힌다. 조심스레 사막을 헤쳐 나오니 옷은 누더기에 먼지투성이라는 뜻이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봄날, 최치원이 쓰린 마음으로 올랐던 그 길이 평화를 준다. 느릿느릿 20분 채 안 되는 길 끝에서 사람들은 피안(彼岸)을 만난다. 텅 빈 공간 가운데 벽도 없고 담도 없는 일주문(一柱門) 하나가 서 있다. 왼쪽 개울 위로 가운루(駕雲樓)가 가로지른다. 고운사에 은둔하며 최치원이 지었다는 건물이다. 가운루와 우화루(羽化樓) 두 집을 짓고서 최치원은 또 사라졌다. 말년에는 합천 해인사에 은둔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는 아무도 모른다. ‘삼국사기’에는 최치원이 다녀간 장소들이 열거돼 있는데, 고운사와 해운사는 나오지 않으니 기이하다. 봄은 거기, 고운사 오솔길 안개 속에서 시작했다.

수선화. 제주도 유배지에서 수선화를 본 추사 김정희는 그 꽃밭을 이렇게 묘사했다. '눈 감으면 그만이지만 눈을 뜨면 눈에 가득 들어오니 어찌 눈을 가려야 할지요.' /박종인

수선화로 강림한 서산의 봄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100년 된 고택에는 봄이 폭발하는 중이다. 서해안 고속도로 서산IC에서 그 집 앞까지 4㎞ 도로가 차로 막히지만 꾹 참고 들어가 보라. 일 년에 딱 한 번 폭발하는 봄을 목격할 수 있다. 집 이름은 ‘유기방 고택’이다. 충청남도 민속자료 23호다. 주소는 서산시 운산면 이문안길 72-10이다.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 세운 이 집에는 서산 류(柳) 씨가 산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 이름은 유기방(柳基方)이다. 올해 73세다. 23년 전 옆 마을에 살다가 이 집에 들어왔다. 서산 류씨는 ‘류'로 표기하지만 이 집 공식명칭은 ‘유기방 고택'이다. 집 솟을대문에는 여미헌(餘美軒)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넉넉한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다.

 

과연 넉넉하다. 유기방은 뒷산 대나무 뿌리를 다 뽑아버리고 수선화를 심었다. 모두 2만 평이다. 담벼락 바깥에 빈터가 생기면 그곳에 모조리 수선화를 심었다. 그물처럼 땅속에 얽힌 대나무 뿌리를 다 제거하고 꽃밭을 만들었다. “나무를 심으려면 10년을 보라”고 한 조선 학자 홍만선과 달리, 대한민국 농부 유기방은 자그마치 23년 동안 수선화를 심었다.

소나무와 수선화가 이리 어울릴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제주도에 유배됐던 추사 김정희가 벗에게 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수선화가 마치 흰 구름이 멀리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널리 쌓여 있는 듯합니다(漫漫如白雲 浩浩如白雪·만만여백운 호호여백설). 눈 감으면 그만이지만 눈을 뜨면 눈에 가득 들어오니 어찌 눈을 가려야 할지요.’(김정희, 완당선생전집3,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5’)

김정희를 황홀경에 빠뜨렸던 그 수선화가 서산에 가득 피었다. 봄이 폭발한다. 4월은 입장료를 받지 않으면 대혼란이 벌어질 정도로 인파가 몰린다. 올해는 더하다. 역병에 지친 사람들이 마스크 속에 웃음을 감추고 꽃에게서 위안을 찾는 것이다.

푸른 소나무와 노란 수선화가 이리 잘 어울린다. /박종인

백화산에서 사라지는 봄

서산 수선화밭에서 서쪽으로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태안 백화산이 나온다. 포장 잘된 임도변에는 벚나무가 꽃비를 흩뿌린다. 봄이 간다.

백화산으로 오르는 벚꽃길. 봄이 간다. /박종인

백화산에는 태일전(太一殿)이 있었다. 태일전은 태일성, 그러니까 북극성에게 제사를 올리던 사당이다. 태일성은 생사(生死)와 병란, 천지만물 생장을 관장하는 신이다.

별에게 지내는 제사를 초제(醮祭)라고 한다. 그런데 태일성이 45년마다 하늘에서 위치를 바꾸니, 태일초제를 지내는 태일전도 함께 자리를 옮겨다녔다. 고려 때 강원도 통천에 있던 태일전은 1434년 세종 때 경북 의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1477년 조선 성종 정부는 경상북도 의성에 있던 태일전(太一殿)을 백화산으로 옮겼다.(1477년 6월 1일 ‘성종실록’) 별이 위치를 바꾼 곳이 강화도냐 인천이냐 1년 가까이 격론 끝에 정부는 별이 태안으로 갔다고 결론내렸다.(1476년 8월 24일, 1477년 윤2월 18일 등 ‘성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태일전은 1479년 태안으로 이건이 완료됐다.

태안 백화산 태을암에 있는 태을동천. 태안에 살던 김해 김씨들이 자기네 족보를 암벽에 보관한 장보암이다. 뒤쪽 암반에는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태을암에는 국보로 지정된 태안 마애삼존불이 있다. /박종인

어렵게 백화산에 태일전을 만들고 나니 1518년에는 아예 태일전을 철거하자는 주장이 나왔다.(1518년 9월 4일 ‘중종실록’)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위에 앉힌 사림(士林)이 주인공이다. 성리학에 어긋나는 일체를 배격했던 사림에게 도교 성전은 있을 수 없는 이단이었다. 조선 왕실은 도교 또한 중요한 종교였기에 중종은 어물쩍 이 청을 넘겨버렸다. 하지만 1528년 윤10월 3일 태일전 멍석을 돗자리로 교체하라는 어명 이후 실록에서 태일전은 등장하지 않는다.

별은 사라졌다. 그런데 훗날 20세기에 그 태일전 자리에 김해 김씨 가문이 태을동천(太乙洞天)을 지었다. 백제 때 마애삼존불상이 있는 태을암 경내다. 태을과 태일은 같은 말이다. 동천(洞天)은 신령이 사는 영역이다.

1923년 태안 지역에 사는 김해 김씨 문중은 태을암 옆 암벽에 태을동천 넉 자를 새겨넣었다. 이듬해 이들은 암벽을 뚫고 새로 만든 족보 한 질을 집어넣었다. 바위 상단 왼쪽이 족보를 넣은 곳이고 오른쪽에는 ‘가락국 기원 1883년 갑자’라고 새겨져 있다. 서기 1924년이다.

장보암 세부. 왼쪽 뭉툭한 부분에 구멍을 뚫어 족보를 넣고 바윗돌로 막았다. /박종인

족보를 넣은 바위를 장보암(藏譜岩)이라 한다. 김해 김씨 장보암은 경남 산청에도 있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릉 건너 절벽에는 1896년 김해 김씨 일파가 족보를 집어넣었다. 전남 광양 다압에도 있고(김해 김씨) 충북 보은에도 있다(기계 유씨 보실과 능성 구씨 보갑). 전북 임실에 살던 경주 이씨는 고조부까지 5세대 족보를 바위에 새겨넣었다.

태을동천 족보는 바스러져 폐기됐다.(이왕기 등, ‘태안 김언석 가옥’, 태안문화원, 2015, p72)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충청도로 향불을 들고 별을 좇던 시절도 갔다. 고운사 숲길에서 최치원의 슬픈 뒷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추사를 황홀하게 한 수선화도 한철이다. 새털처럼 많았던, 봄날이 간다.

태을암 대웅전 앞에 있는 서양란. 공기 속에도 봄이 보인다. /박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