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 세상을 말하다] 詭辯<궤변>
한자세상 11/28
궤변(詭辯)의 특징은 왜곡(歪曲)이다. 궤변은 우격다짐을 앞세우는 무단(武斷), 황당함이 두드러지는 요언(謠言)과 구별된다. 무단과 요언은 마음을 끌지 못한다. 궤변은 왜곡된 근거를 여럿 동원하기 때문에 미혹하는 힘이 강하다.
인간의 간특(奸慝)을 보여 주는 사례가 성경에 나온다. 불의(不義)한 유대인들은 주장한다. 인간의 불의로 인해 하나님의 의(義)와 영광이 드러났다면, 이는 하나님께 공헌한 것이고, 따라서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대표적인 궤변으로 이를 소개한다. 허물을 감추고 징계를 피하기 위해 왜곡된 논리로 대응하는, 교활한 논법이다.
궤변은 얼핏 보기엔 그럴듯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비(是非)가 전도(顚倒)되고, 흑백(黑白)이 섞여 있다. 사람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들고, 결국 빠져들게 한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오종세가(五宗世家)에서 “팽조(彭祖)는 교묘한 말과 꾸미는 낯빛으로 지나치게 아첨한다. 속이 깊고 법률에 밝아, 궤변으로 마음을 빼앗는다(彭祖, 爲人巧佞 卑諂, 足恭而心刻深, 好法律, 持詭辯以中人)”고 전한다.
궤변의 바탕에는 궤휼(詭譎)이 깔려 있다. 궤휼은 기이하고 기괴하며, 헷갈리게 만들고, 종잡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음모, 간계, 교활의 뜻도 묻어 있다. 비범한 조어(造語) 능력으로 몽환적인 세계를 탁월하게 묘사했던 당(唐)대 시인 이백(李白)은 『상운락(上雲樂)』에서 “만약 이처럼 기괴하고 기이한 경치를 다 보지 못한다면 어찌 조물주의 신묘함을 알았다 할 수 있으리오(不覩詭譎貌 豈知造化神)?”라고 노래한다.
궤변으로 이름 높은 한 지도자가 궤변을 내세워 대선 결과에 불복하자 한동안 시끄러웠다. 행정 공백으로 시민들이 신음해도 그는 끄덕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도 궤변에 능한 지도자가 드물지 않다.
공자(孔子) 같은 현인은 누구를 대놓고 미워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자는 단호했다. 제자 자공(子貢)이 묻는다. “군자도 사람을 미워하나요(君子亦有惡乎)?” 공자는 답한다. “미워하는 일이 있다(有惡).” 누군가 또 공자에게 묻는다. “덕으로써 원한을 갚으면 어떨까요?” 공자는 반문한다. “그럼 덕은 무엇으로 갚으려고(何以報德)?”
모든 악을 일일이 상대할 순 없다. 그렇다고 거악(巨惡)에도 침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진세근 서경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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