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905년 5월 러일전쟁이 일본 승리로 끝났다. 일본이 ‘조선을 위한 성전(聖戰)’이라는 명분으로 노골적으로 조선 정복욕을 드러낸 전쟁이었다. 1905년 11월 마침내 조선은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에게 넘어갔다. 그때 대한제국 권력자들은 어떤 노력을 했을까. 최고 권력자 고종을 포함해 당시 국운(國運)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들의 행적을 들여다본다. 특히 고종이 풍전등화 같은 대한제국을 살리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살펴본다. 돋보기를 대고 뜯어보면, 세간에 알려진 바와 조금 다르다.
[232] 을사조약을 전후한 고종의 수상한 행적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6월 25일 신임 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
윌러드 스트레이트(W. Straight)는 러일전쟁 취재차 일본에 와 있던 AP통신 기자였다. 그러다 덜컥 대한제국 주재 미국공사관 부영사에 임명됐다. 1905년 6월 25일 신임 부영사가 황제를 알현했다. 알현 장소는 중명전(重明殿)이었다. 중명전은 경운궁에 딸린 왕실도서관이다. 아관파천(1896년) 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주로 중명전 2층에 거주해왔다.
알현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데, 고종이 그 뒷모습을 지켜봤다. 지금 미 대사관저인 미국공사관은 중명전과 맞붙어 있었다.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는 일찌감치 이렇게 일기를 썼다. ‘황제가 굴 같은 중명전에서 지내기 위해 이렇게 아름다운 궁궐(창덕궁)을 방치해야 했다니 정말 슬픈 일이다. 황제의 실정이 이 나라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붕괴시킨 것은 더 슬픈 일이다.(‘윤치호일기' 1904년 5월 6일: 이 일기를 쓴 때는 1904년 러일전쟁 첫 육전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창덕궁 후원에서 전승 파티를 연 때였다. 이에 대해서는 ‘땅의 역사 [190] 1904년 창덕궁에서 열린 러일전쟁 축하파티’ 참조) 중명전은 서양 공관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신임 부영사는 5개월 뒤 미 공사관 담 너머로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장면도 모두 목격했다.
대한제국으로 출발하기 전 스트레이트는 도쿄 항에서 러시아 군함 오룔 호를 목격했다. 3주 전 대마도해전에서 무참하게 포격당한 배였다. 크고 작은 포탄 67발을 맞은 오룔 호는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접수한 뒤 자기네 군함으로 재활용하기 위해 수리 중이었다. 갑판에서는 여자들이 웃으며 핏자국과 머리카락 범벅을 닦아내고 있었다.(‘윌러드 스트레이트 문서’ reel 1 segment 2, 1905년 7월 21일 ‘바크에게 보내는 편지’)
그 상반된 풍경. 한 제국은 세계 최강 러시아제국 군함을 차지했고 바다 건너 또 다른 제국에서는 서양 공관들 한가운데 도서관을 짓고 황제가 살고 있는 풍경. 기자였던 스트레이트 눈에 이미 두 제국 운명은 결정돼 있었다.
9월 19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가 부임하고 석 달 뒤 또 다른 귀빈이 대한제국을 찾았다. 1905년 9월 17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이 귀빈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그녀는 세계 최고국 귀한 공주다. 예사로움을 뛰어넘는 의지와 기개, 소탈하고 명랑한 자질과 깊고 고요한 학문은 일일이 논할 필요도 없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향기로운 수레가 머무는 곳과 공주가 청초하게 바라보는 곳에는 산천이 빛을 더하고 초목이 영광을 더함은 말해 무엇 하랴.’ 기사는 황제에 대한 조언으로 끝났다. ‘황제 폐하께서는 옥과 비단으로 예우를 베풀고 최고의 집에서 음식을 내고 음악을 베풀어 양국 우호를 달성하고 귀빈을 즐겁게 하여 예의가 굳건하게 된 연후에 너그러움을 베풀지니라.’(1905년 9월 17일 ‘대한매일신보’)
이 세계 최고 나라 공주님 이름은 앨리스 루스벨트(Alice Roosevelt), 제26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외동딸이다.
1882년 한미조약 ‘거중조정’ 조항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수교조약을 맺었다. 영국과 독일(1883), 러시아·이탈리아(1884), 프랑스(1886)와도 수교했다. 청 제국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 ‘천하(天下)’에서 마침내 정글 같은 ‘세계(世界)’로 진입한 것이다. 1882년 음력 4월 6일 미국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1조는 이렇게 규정했다. ‘타국이 불공경모(不公輕侮)하는 일이 있게 되면 상조(相助)하여 잘 조처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한다.’ 국제 분쟁을 일으킨 당사국 사이에 제3국이 끼어들어 분쟁을 해결한다는 거중조정(居中調停) 조항이다.
1882년 당시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이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려고 삽입한 이 조항을, 고종과 측근은 철석같이 믿었다. 러일전쟁 직전, 고종 최측근 이용익이 이 조항을 언급하며 말했다. “미국과 유럽이 조선 독립을 보장한다.” 러일전쟁 영국인 종군기자 매켄지가 답했다. “국력 없는 조약은 쓸모없다. 당신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데 남이 보호해줄 턱이 있는가.” 이용익이 답했다. “미국이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은 친구가 될 것이다.”(F 매켄지, ‘Korea’s fight for freedom’, 1920, p78)
철석같이 미국을 믿은 고종
나라가 완전히 거덜 난 상태에서 그 미국 대통령 딸이 대한제국을 찾았다. 수교 후 자그마치 23년 뒤, 세상이 완전히 바뀐 1905년에 대한제국 황제 고종 정권은 바로 이 조항을 생각해내고 미국 공주 앨리스를 극진히 접대한 것이다. 고종과 측근은 마지막 동아줄로 생각했다. 미 아시아함대 전함 오하이오호를 타고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앨리스 일행은 이런 대접을 받았다.
‘어제 오후 7시에 미국 대통령의 영랑(令娘)이 왔는데, 관리가 인천까지 가서 영접해 특별열차를 타고 신문외(新門外) 정거장(서대문역)에 도착했다. 궁내부대신 이재극이 황명을 받들어 황색 가마로 영랑을 모시고 앞뒤로 경무관과 순사들이 옹도했다. 한성 내외 사녀(士女)들이 영랑의 용모와 명성을 애모하여 도로 좌우에 운집하였다.’(1905년 9월 20일자 ‘황성신문’) 황제는 첫 만찬에서 ‘앨리스를 팔짱을 끼고 테이블로 인도했다.’ 미국을 ‘큰형(Elder Brother·한미관계자료집3, 1905년 9월 13일 ‘호러스 알렌이 국무부에 보낸 편지’)’이라고 불렀던 고종에게, 앨리스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홍릉에 나타난 버펄로 빌
다음은 스트레이트가 기록한 앨리스의 서울 체류 11박 12일 일정이다. ’19일 도착, 20일 황제 알현 및 연회, 21일 궁중 연회 및 공사관 연회, 22일 창덕궁 파티 및 미국 선교사 접견, 23일 전차 시승, 25일 승마 여행, 27일 전차 탑승해 왕비 민씨 왕릉 구경, 28일 환송 만찬, 30일 부산행 출발'. 축제와 만찬과 야외 파티와 여행이 전부였다. 한국인들은 이번 방문이 정치적으로 무슨 뜻이 있어서 미국 정부가 한국을 도와 위태로운 상황에서 꺼내 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사실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H. 헐버트, ‘The Korea Review’ vol.5(1905), 경인문화사, 1984, p332)
가장 극적인 장면은 왕비 민씨가 잠든 옛 청량리 홍릉(洪陵)에서 연출됐다. 조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왕릉 축하연회였다. 당시 고종 의전 담당이던 독일 여자 엠마 크뢰벨은 이렇게 기록했다.
'먼지가 뿌옇게 나더니 말 탄 무리가 나타났다. 앨리스 공주와 약혼자, 수행원들이었다. 그녀는 붉은색 긴 승마복에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반짝이 가죽장화를 신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말채찍을 들고 있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한 석상에 올라탔다. 약혼자에게 눈짓하자 그는 재빨리 카메라를 꺼내들고 초점을 맞췄다. 얼마 뒤 그녀가 모두 말에 올라타라고 명령했다. 일행은 마치 서부 가죽업자 버펄로 빌처럼 떠났다.'(엠마 크뢰벨, ‘나는 어떻게 조선 황실에 오게 되었나?’(1909), 민속원, 2015)
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는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루스벨트 일행은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정복했노라(The Roosevelt party came saw and conquered).'(‘윌라드 스트레이트 문서’ reel 1 segment 2, 1905년 10월 3일 ‘파머에게 보내는 편지’) 이게 미국 공주님이 했던 전부다. 고종은 ‘큰형의 딸’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고종만 몰랐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던 조선은 루스벨트 일행을 구명 장치로 생각하고 있었다.(윌라드 스트레이트, 앞 편지). 하지만 이미 운명은 결정된 상태였다. 루스벨트는 일찌감치 1900년 부통령 시절 ‘조선인은 자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한 대통령이었다.(김원모, ’19세기 말 미국의 대한정책(1894~1905)', 국사관논총 60집, 1994, 재인용) 또 9월 5일 러일전쟁 종전 협정인 포츠머스조약에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월한 지위가 인정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두 달 전 7월에는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 사이에 ‘필리핀과 조선은 각각 미국과 일본이 먹는다’는 땅 따먹기 밀약이 맺어진 상태였다. ‘미국 사교계의 스타’였던 앨리스 루스벨트는 미일 수교 50주년 축하라는 명분으로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 일행에 끼어 있었다. 7월 25일 도쿄에 도착한 이들은 이틀 뒤 밀약을 맺고 두 달 동안 필리핀, 싱가포르, 홍콩, 상해, 북경을 여행했다. 그리고 다시 도쿄를 들렀다가 조선을 찾은 것이다.
이 밀약은 1924년 8월 타일러 데넷이라는 학자가 미 의회도서관에서 문서를 발견함으로써 공개됐지만, 대략적인 실체는 이미 밀약 석 달 뒤 알려지기 시작했다. 10월 4일 도쿄 ‘고쿠민신분(國民新聞)’이 ‘일본과 미국이 동맹을 맺었다’고 보도했다. 이어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여러 미국 신문과 호주 신문들까지 이를 보도했다.(K 라슨 등, ‘태프트-가쓰라 밀약, 단순 대화인가 밀약인가’, The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 19 no 1, 듀크대 출판부, 2014) 무슨 말인가. 고종 빼고 다 알았다는 말이다.
1909년 엠마 크뢰벨이 베를린에서 펴낸 자서전에 홍릉 사건이 실렸다. 앨리스 측은 즉각 이를 부인했다. 아주 훗날 미국 코넬대학교 도서관 희귀본 컬렉션에서 앨리스 행적 사진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애시당초 불필요했던 논쟁은 종료됐다.
자서전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황제는 여전히 일본을 신뢰하고 있었고 그런 일본이 자국 정세를 간섭하거나 왕위를 찬탈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크뢰벨, 위 책 p238~239) 과연 그랬을까. 고종이 한 일들을 더 세밀하게 본다.<다음 주 ‘뇌물 받은 황제’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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