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② 뇌물 받은 황제
을사조약 때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무엇을 했나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다.
앨리스 루스벨트 일행이 대한제국(이하 조선)을 방문한 것은 1905년 9월이었다. 황제 고종은 앨리스를 공주처럼 접대하며 조선 독립을 호소했다. 이미 두 달 전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는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우선권을 맞교환한 이후였다. 그리고 두 달 뒤 일본은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강탈’했다. 조선이라는 민족공동체에는 강탈이라는 말이 옳다. 그렇다면 고종에게는? 이제 1905년 11월 17일 조약 체결 전후로 고종이 한 행동을 하나하나 뜯어보자.
[233]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② 황제가 받은 돈 2만원
상소한 자들을 처벌하라
조약 후 첫 조치부터 이상했다. 고종은 조약을 반대했던 의정 참정대신 한규설을 “황제의 지척에서 온당치 못한 행동을 했다”며 조약 당일 파면했다.(1905년 11월 17일 ‘고종실록’) 그리고 조약 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을 영의정에 해당하는 의정대신 서리로 임명하고(11월 22일), 엿새 뒤 박제순을 참정대신에 임명했다.(11월 28일 ‘고종실록’)
일본공사관 기록에 따르면 이 인사는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공사 하야시의 충고에 따라” 이뤄졌다. 이날 고종은 ‘인심을 도발하는 상소자들을 가둬두기 위하여 강력한 조치를 취하시겠다는 결심을 보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11. 보호조약 1~3 (145) ‘이토 대사 작별 인사차 알현 및 시정 개선에 관한 정부 당국에의 훈유적 강화 건’) 일방적인 일본 측 기록임을 감안해도, 나라를 빼앗긴 국가 지도자가 보일 행동은 아니다.
고종 태도를 성토하는 상소가 말 그대로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실록을 본다.
“역적 두목을 의정대신 대리로 임용해 신으로 하여금 그 아래 반열에 나가도록 하니, 분한 피가 가슴에 가득 차고 뜨거운 눈물이 넘쳐흘러 당장 죽어 모든 것을 잊어버렸으면 한다.”(11월 24일 의정부 참찬 이상설)
“두렵고 꺼리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폐하 뜻이 견고하지 못함을 헤아릴 수 있으니 나라의 존망은 알 수가 없다.”(1905년 11월 26일 시강원 시독 박제황)
“나라를 주도해서 팔아먹은 박제순에게 총애를 베풀어 의정 서리로 삼고 다른 역적들도 편안하게 권위를 유지시켰다. 무엇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 저들의 위엄과 권세를 두려워해서 그런가.”(11월 26일 정3품 윤병수)
이런 이해 못할 처분에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삼천리 강산을 한밤중에 도둑맞았다. 이제 그저 궁내부에서 헛된 자리에 앉아서 (재정 고문) 메가타(目賀田)가 주는 황실비(皇室費)를 가지고 풍족히 살면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이 역시 한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없어질 것인데, 무엇을 꺼려 역적들을 섬멸하지 않고 도리어 총애와 영예를 안겨주는가.”(11월 28일 전 내부주사 노봉수)
노봉수 상소에는 본질적인 질문이 들어 있었다.
“선왕의 판도(版圖)를 일본으로 넘겨주고 조종(祖宗)이 남겨준 백성을 일본 포로로 모두 넘기려는가. 국토와 백성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가 비바람 맞으며 힘들게 마련한 것이지 폐하의 개인 소유가 아니다.”
이런 상소에 고종 답은 한결같았다.
“이처럼 크게 벌일 일이 아니고 또 요량해서 처분을 내릴 것이니 경들은 그리 알라.”(1905년 11월 27일 ‘고종실록’)
원로대신 조병세 무리가 궁중에 들어와 농성하며 상소를 하자 고종은 “반복하여 타이른 것이 서너 번만이 아닌데 왜 말을 받지 않는가”라며 이들을 궐 밖으로 쫓아버렸다.(같은 날 고종실록) 조병세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자 다음 날 무관장 민영환이 뒤를 이었다. 고종은 “번거로우니 속히 물러가라”고 답했다. 그래도 민영환이 물러나지 않자 고종은 이들을 체포해 징계를 내리라 명했다.(11월 28일)
이틀 뒤 민영환이 자결했다. 그 다음 날 조병세가 자결했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왜 조약을 주도한 박제순을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했는가. 황제는 왜 이들을 처단하라는 상소에 번거롭다는 반응으로 일관했는가.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힌트가 몇 군데 있다.
황제가 받은 접대비 2만원
‘내탕금(황실 자금)이 부족하다는 점을 이용해 심상훈을 통하여 황제 수중으로 2만원을 납입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 1주일 전인 1905년 11월 11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일본 외무성 기밀 제119호에 의거해 기밀비 10만원을 집행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22. 보호조약 1~3 (195)'임시 기밀비 지불 잔액 반납의 건', 1905년 12월 11일) 다음은 이에 대한 일본공사관 기록 전문이다. 이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공개돼 있다.
‘지난달 4일 자 기밀 제119호로 보호권 확립에 관한 조약체결 등을 위하여 무엇인가 비용을 필요로 하겠기에 기밀비 10만원을 송부하여 위의 목적에 지출하라는 훈시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신협약 체결 전에 있어서는 당장 이토 대사 내한에 즈음해 궁중 내탕금이 궁핍 상태라는 것을 탐지했기 때문에 대사 접대용 비용에 충당하는 명의 아래 금 2만원을 심상훈(沈相薰)을 거쳐서 황제 수중에 납입하고 금 3000원은 폐하 좌우에 있는 시종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구완희(具完喜)에게, 금 3000원은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에게 급여한 외에 나머지 2만원은 모두 조인 후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등으로 하여금 선후책으로서 그 부하를 위무시킬 필요상 지급할 것을 조치했습니다. 또한 참정 박제순 기타 한두 대신에게 같은 목적으로 지급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었기에 그 견적 1만5000원을 공제하고 잔액금 3만9000원은 반납 조치하였사오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문서에는 지출된 금액을 계산한 메모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한마디로, 조약 체결 1주일 전에 황제 고종이 일본 공사로부터 2만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명분은 이토 히로부미 접대비이고, 이유는 ‘내탕금 궁핍 상태’였다. 조약 상대방의 궁박함을 이용한 증뢰(贈賂)요, 태조고황제가 비바람 맞으며 힘들게 마련한 나라를 판, 명백한 수뢰(受賂)다.
통계에 따르면 5년 뒤인 1910년 서울 숙련 목수 일당이 1엔이었다. 목수 연봉을 200엔으로 가정했을 때(김낙년 등 4명, ‘한국의 장기통계’ 1, 해남, 2018, p191) 2만원은 이 인부의 100년치 연봉에 해당한다. 2010년 현재 대한민국 직장인 평균 연봉은 2500만원이니, 그 100배는 25억 원이다.
하야시 보고서에는 황실 재산 담당관인 경리원경 심상훈을 통해 무기명 예금증서로 2만원을 궁중에 보내고 러일전쟁 참전 일본군 응접관을 지낸 구완희와 법부대신 이하영에게 3000원을 줬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조약 체결 후인 11월 22일 내부대신 이지용과 군부대신 이근택에게 5000원,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1만원을 줄 예정이며 외부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다른 세 대신에게 1만5000원을 지급할 예정이라고 적혀 있다. 이지용과 이근택, 이완용은 조약 완료 조건부로 뇌물을 준 것이다. 액수로는 고종-이완용-이지용과 이근택 순이다. 조약에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 조항이 삽입됐다.
을사조약 체결 과정에 많은 뇌물이 오갔다는 사실은 소문으로 알려져 왔다. 당대 지식인 황현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등박문은 300만원을 정부에 고루 뇌물로 주어 조약이 성립되기를 꾀하였다. 탐욕한 사람들은 많은 전답을 마련한 후 편안한 생활을 하였다. 권중현(權重顯) 같은 사람이 이에 해당하며 이근택, 박제순 등도 졸부가 되었다.’(황현, ‘매천야록’ 4권 1905년⑤ 8. ‘이등박문의 뇌물 공세’) 꼼꼼한 관찰자이자 기록자였던 황현이지만 황제가 직접 뇌물을 받은 사실은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뇌물 30만엔과 경부선 지분
을사조약 전해인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키며 조선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조선 전역을 군사용지로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협정이다. 4개월 전인 1903년 10월 14일 일본공사 하야시는 본국에 이렇게 보고했다. ‘한국 황제의 우유부단한 성격은 매사에 우리가 경험한 바 있음. 따라서 오로지 한국 정부로 하여금 눈앞의 이익을 얻게 하고 또 상당한 위력을 가하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음.’(‘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권 11. 일한밀약 부 한국중립 (2)'일·한 간 비밀조약 체결에 관한 건', 1903년 10월 14일) 하야시는 고종이 받을 이익으로 1. 망명자에 관해 황제가 만족할 견제 2. 거액의 차관 3. 상당한 운동비를 한국 조정 실력자에게 제공을 꼽았다.
고종은 이미 협정 체결 전인 2월 17일 일본 요청에 의해 창덕궁 후원을 일본군 12사단 병영으로 내줬다. 그리고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3월 20일 일본국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알현했다. 실록에는 ‘황제가 이등박문을 접견했다’고 딱 한 줄 적혀 있다.
접견식에 배석했던 영접위원장 민영환은 3월 31일 영국공사관을 방문해 공사 조던에게 이토 방문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은 조던이 영국 외무부에 보낸 당일 면담 기록이다.
‘이토는 메이지 천황 국서를 조선 외교부에 사본을 남기지 않고 직접 황제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런데 민영환이 그날 면담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대사는 황제에게 천황 선물이라며 30만엔을 줬다. 그리고 경부선 철도에 고종이 가진 지분을 보장하고, 향후 경의선 지분 또한 보장한다고 확약했다. 이토 후작은 같은 방식으로 50만엔을 궁중 참석자에게 나눠주고, 이번 방문 관계자들에게도 귀중품을 선물했다.’(영국 외무부 자료, 1904년 3월 31일 조던 공사가 랜스다운 외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30만엔과 경부선 지분. 경부선은 건설 당시 일본 로비스트 다케우치가 경부철도회사 주식 1000주와 5만원을 황실에 헌납하고 진행한 공사였다.(김윤희, 이욱, 홍준화, ‘조선의 최후’, 다른세상, 2004, p233) 그 지분을 이토로부터 보장받은 것이다.
의정서 조인 전인 2월 8일 고종은 이지용을 통해 ‘궁성과 정부는 범접 금지 보증’을 요구했고(‘주한일본공사관기록’ 23권 2.電本省往 1~3 (104) ‘심상훈을 통해 황제 위안 노력에 관한 건’, (105) ‘한국황실과 국토보전을 보장하겠다는 하야시 공사의 상주문' 등), 의정서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안전과 안녕을 성실 보장’ 조항이 삽입됐다.
3월 20일 고종은 하야시 공사부터 통역관 마에마 교사쿠까지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 ‘전원(全員)’에게 훈1등부터 5등까지 훈장을 내렸다. 나흘 뒤 고종은 특파대사 이토에게 최고 훈장인 금척대수장을 주고 일행 전원에게 훈장을 내렸다. 그 다음 날 이토가 탑승했던 일본 함장 해군 대위 두 명에게 또 훈장을 내렸다. 사흘 뒤 고종은 의주군수 구완희를 러일전쟁 참전 일본군을 접대하는 관리로 임명했다.(3월 20일, 24일, 25일, 28일 ‘고종실록’)
“나가 죽으시라”
2007년 소장 역사학자 3명은 을사조약에 임한 고종을 두고 이렇게 의문을 던졌다. ‘갑신정변 주역인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적이 없었다. 을사조약과 합방으로 을사오적이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더 황실은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김윤희, 이욱, 홍준화, ‘조선의 최후’, 다른세상, 2004, p331)
이미 100년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또한 노골적으로 황제에게 분노의 붓을 던졌다. “이 조약은 맺어도 망하고 거부해도 망한다. 망하는 것은 똑같은데 어찌 황제는 사직을 위하여 죽으려 들지 않는가(准亦亡不准亦亡也 如等亡焉則 無寧決志殉社·준역망부준역망야 여등망언즉 무녕결지순사).”(1905년 11월 23일 ‘대한매일신보’) 1907년 헤이그밀사로 파견된 그 이상설이다.
<다음 주 ‘헤이그 밀사 이위종의 연설’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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