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392년 음력 7월 17일 원나라 다루가치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가 새 나라 조선 왕위에 올랐다. 한 달 뒤 이성계는 한양(漢陽)으로 천도를 선언했다. 이듬해 2월 15일 명나라로 떠났던 사신 한상질이 돌아와 명나라 예부(禮部) 자문을 이성계에게 바쳤다. 예문에는 "동이(東夷) 국호는 조선(朝鮮)으로 하라"고 적혀 있었다. 황제국에서 국명을 받은 이성계는 한상질에게 토지 50결을 하사했다.(1393년 2월 15일 '태조실록') 부동산은 최고의 재산이었다.
2년이 지난 1395년 6월 6일 새 나라 조선 정부는 새 서울 이름을 한양에서 '한성(漢城)'으로 개칭했다. 개경에 살던 문무백관과 백성이 무리지어 신도시로 몰려들었다. 새 정부는 한성을 왕도(王都)이자 관료 집단의 거주지로 구상했다.(이신우, '18세기 서울의 주거문제와 도시확장책', 연세대 석사논문, 2006)
그런데 한성은 이들이 살기에도 좁았다. 그리하여 새 나라 새 정부는 아전들과 백성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이름을 양주군(楊州郡)으로 고쳤다(移其吏民于見州 改爲楊州郡·이기리민우견주 개위양주군).(1395년 6월 6일 '태조실록') 그러니까, 신도시 한성에 살고 있던 백성은 영문도 모른 채 양주로 강제 이주당한 것이다. 그래도 한성은 좁아터진 도시인지라, 집을 둘러싸고 해괴한 일들이 마구 벌어졌다. 조선 사회에 만연했던 부동산 폭력, '여가탈입(閭家奪入·여염집 강제로 빼앗기)' 이야기다.
개국 초부터 터진 땅 싸움
신도시로 천도한 뒤 조선 정부는 전·현직 관리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집터를 나누어 주었다. 기준은 현직 정1품에게 주는 60부(負)다. 그러자 실무진에게서 이의가 들어왔다. "신도읍 면적은 5백여 결(結)에 불과한데, 60부를 기준으로 하면 현직 문무관도 골고루 줄 수 없거늘, 서민에게 땅이 돌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정1품 35부로 시작해 6품은 10부, 나머지 서민은 2부씩 집터를 분배받았다.(1395년 1월 14일 '태조실록') 1부(負)는 '곡식 한 짐을 추수할 수 있는 면적'이다. 훗날 세종 26년에 만든 등전척(等田尺)에 따르면 1등급 땅은 1결이 가로·세로 각각 100척이었다. 100부가 1결이니, 1부는 가로·세로 10척이었다.(1444년 11월 13일 '세종실록')
그런데 이미 땅 싸움은 시작되고 있었다. 신도시 건설을 맡은 종2품 판개성부사 이거인이 정4품인 이조의랑 최사위가 받은 땅을 빼앗으려다 미수에 그친 것이다. 그러자 이거인은 명예직인 검교중추원부사 최융의 집을 빼앗아버렸다. 백주대낮에 남의 집을 가로챘으니 처벌이 뻔했다. 기록을 본다. 간관(諫官) 장지화가 '그의 처자로 하여금 추위를 무릅쓰고 통곡하게 한 죄'를 물어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자 임금은 "이거인은 공신(功臣)이니 파면만 허락한다"고 답했다.(1395년 1월 8일 '태조실록') 처벌은 없었다.
그 뒤로도 남의 집을 빼앗는 사례가 속출했다. 그러자 세종은 아예 "사대부 집처럼 넓은 서민 집과 궁궐처럼 넓은 사대부 집은 온당치 않다"며 왕족은 50칸, 대군은 60칸, 2품 이상은 40칸, 아래는 30칸, 서민은 10칸으로 집 면적을 제한해버렸다.(1431년 1월 12일 '세종실록')
미치광이 부동산 마니아, 연산군
그리하여 한성은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만든 도시로 완벽하게 건설됐다. 그래서 한성은 '수선(首善)'이라고도 했다. '으뜸가는 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도시 속에서 벌어지는 탐욕은 이름과 거리가 멀었다. 수선 한가운데 살던 패악한 임금 연산군은 부동산 탐욕도 으뜸이었다.
그가 저지른 부동산 강탈 사례는 실록을 뒤덮는다. 경기도 고양, 김포 일대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자기 사냥터로 만든 권력자였다. 특히 자기가 사는 경복궁 주변 민가는 '궁궐을 엿본다'는 이유로 극도로 증오했다.
재위 9년째인 어느 날 왕이 물었다. "대궐이 내려다보이는 인가를 전에 철거하려다가 중지했는데, 한번 철거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승지들이 답했다. "안집을 내려다본다면 누가 좋다고 여기겠습니까?"(1503년 11월 2일 '연산군일기') 사흘 뒤 간신들에게서 힘을 얻은 왕이 이렇게 명했다. "집 헐리는 사람에게 무명을 조금씩 나눠줘서 나라 뜻을 알게 하라." 정부는 집 크기에 맞춰 50필부터 10필까지 보상액을 정했다.
뜻밖에도 다음 날 연산군은 철거 작업을 연기시켰다. "한창 춥고 얼어서 집 헐기가 어려우니 사람만 내보내고 봄에 작업하라." 11월 9일 연산군은 성균관 유생들 화장실이 창덕궁 후원과 가깝다며 이전을 명했다. 11월 11일 "헐긴 헐지만, 보상으로 내린 무명이 너무 적으니 쌀을 더 주시라"고 아래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연산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상소와 반대 의견이 연산군 귀를 때렸다. 11월 17일 반대에 질린 연산군이 최후통첩을 내렸다. "불쌍해서 봄으로 미뤘더니 너희가 시끄럽게 구는구나. 얼른 철거해버리면 너희가 무슨 반대를 하겠는가. 급속히 철거하라."(1503년 11월 17일 '연산군일기') 그해 겨울, 서울 한복판에서 강제 철거 대작전이 진행됐다.
이듬해 7월 또 성균관 주변과 동소문 어귀 민가 143채 철거 명을 내린 뒤 연산군이 말했다. "불쌍하고 가엾다. 저들에게 쌀을 내리고, 심한 자는 베를 더 주어라." 말만 있었을 뿐, 실제 배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게 연산군 재위 기간에 궁궐 주변에서 철거된 집이 990집이었다.(1504년 7월 13일, 28일 '연산군일기')
멋대로 집 뺏기, 여가탈입
개국 때 한성은 동서남북 사대문 안쪽이 전부였다. 그 좁아터진 도시로 사람들이 모여들자 1424년 세종 때 동대문 바깥에 새로 택지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이근호, '17, 18세기 여가탈입을 통해 본 한성부의 주택문제', 도시역사문화2호, 2004)
연산군이 벌인 짓은 미친 권력자가 벌인 돌연변이 같은 패악으로 치부해도 좋겠다. 문제는 그 비좁은 서울 땅을 확보하기 위해 백성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패악질을 벌인 고관대작 양반들이었다. 권력을 배경으로 힘없는 여염집을 강탈하는 이 버릇을 '여가탈입(閭家奪入)'이라고 한다. 1535년 2품 벼슬아치 송숙근이 남의 집을 빼앗았다가 적발됐다(중종은 처벌을 불허했다).(1535년 10월 4일 '중종실록') 광해군 때는 '사대부가 여염집을 빼앗고 매질까지 하는 일이 많아 백성이 원통해한다'는 보고가 올라오기도 했다.(1615년 8월 2일 '광해군일기') 2년 뒤에는 종9품짜리 무관직인 초관(哨官) 김충일이 나인(內人·궁중 시중)들이 사는 집을 빼앗고 그 가족과 노비들을 몽땅 가둬버렸다. 광해군은 "폐습이 고질화됐으니 몹시 한심스럽다"며 엄단을 지시했다.(1617년 2월 3일 '광해군일기')
왜란과 호란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17세기 이후 서울 인구가 급증했다. 여가탈입 또한 급증했다. '조정 관리 하나가 가마를 타고 여장을 한 뒤 상인 집에 돌입해서는 그대로 빼앗아 살고 있는' 일이 보고되고(1663년 5월 22일 '현종실록'), '전염병이 돌자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간 사대부' 보고도 올라왔다. 병조좌랑 이자는 상인과 역관 집을 차례차례 빼앗아 골라서 들어 살다가 파직됐다.(1719년 8월 29일 '숙종실록') 상인과 역관은 재산이 있는 집이니, 동산과 부동산을 몽땅 차지하겠다는 심보였다. 심지어 관리들의 비리를 감시해야 할 사헌부, 그러니까 대검찰청 전직 지평 윤경주도 여가탈입죄로 노역형에 처해졌다.(1746년 7월 4일 '영조실록')
여가탈입 엄금령과 "우리 편이니까"
1754년 영조 정부는 남의 집을 강탈한 사대부 20여 명을 적발해 처벌하고 한성 판윤 어유룡을 책임을 물어 파면했다.(1754년 6월 27일 '영조실록') 여가탈입이 끝없이 사회문제가 되자, 1754년 영조는 여가탈입을 저지른 관리는 2년 금고형을, 일반 사대부는 과거 응시 자격 박탈 6년형을 내리라고 명했다.(1754년 7월 16일 '영조실록')
하지만 모두에게 엄격하지는 않았다. 1731년 영조 7년 여가탈입 금지령을 어긴 정승 1명이 적발됐다. 영조는 "의법조치하라"고 명했다. 다음 날 정승 정체가 밝혀졌다. 영조가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영의정 홍치중이었다. 영조는 '온화한 비답을 내려 위로하고 관련자들을 사면했다'(1731년 7월 15일, 16일 '영조실록') 그리고 영조는 아예 여가(閭家) 매매를 금지한다고 선포해버렸다.
20만 도시에 과거 응시생 11만명
'시골 사람은 물론 선비나 서민도 기필코 서울에 살려고 하다가 가산을 탕진해 버린다. 이 모두가 양반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鄕人勿論士庶 則必來居京城 蕩盡家産 此不過欲爲兩班之計也·향인물론사서 즉필래거경성 탕진가산 차불과욕위량반지계야)'(유수원, '우서' 8권 '論商販事理額稅規制·론상판사리액세규제')
세기를 넘기는 서기 1800년 음력 3월 21일 서울에서 과거시험이 열렸다. 과거시험장은 광화문 육조거리 예조(현 정부서울청사 부근)를 비롯해 세 군데에 설치됐다. 예조에 설치된 시험장은 북으로는 광화문, 남으로는 경조부(현 주한미국 대사관)까지 닿았다. 참가자는 3만2598명이었다. 별도로 실시된 무과에도 3만5891명이 응시했다. 세 시험장에 모인 전체 문과 응시자는 자그마치 11만1838명이었다.(1800년 3월 21일 '정조실록')
다음 날 과거가 이어졌다. 이튿날 모인 문과 응시생은 10만3579명이었다. 그러니까 인구 20만명짜리(혹은 30만 추정) 도시에 연인원 20만명이 넘는 응시생이 쏟아진 것이다. 이들은 여관이 부족하면 민가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시험장에는 글을 대신 써주는 이, 자리를 미리 잡아주는 이까지 대동해 들어가곤 했다.
정부는 민가를 철거해 과거시험장을 만들어야 했다. 1697년 숙종 23년에는 기와집 79칸, 초가 45칸을 작은 보상비를 주고 철거해 시험장을 확보했다. 땅은 국유지라 보상하지 않았다. 철거민 가운데 집을 구하지 못한 주민은 개천변에 움집을 짓고 사는 천상거민(川上居民)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원창애, '문과 운영이 서울지역에 미친 영향', 향토서울 67호, 2006) 이 모두가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선비와 정부의 여가탈입 행태였다.
왜 서울인가, 왜 빼앗나.
'벼슬길에 나갔을 때에는 빨리 높직한 산언덕에 셋집을 내어 살고, 벼슬에서 떨어지면 빨리 서울에 의탁해 살 자리를 정하여라. 내 뒷날 계획은 오직 서울 십 리 안에서 거처하는 것이다. 가세가 쇠락하여 도성으로 깊이 들어가 살 수 없다면 모름지기 잠시 근교에 머무르며 과수를 심고 채소를 가꾸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재산이 넉넉해지기를 기다려 도심의 중앙으로 들어가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출세하려면 무조건 서울에 살라는 말이다. 이 말을 자기 아이들에게 가훈처럼 던져준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다. '여유당전서' 문집 18권에 있는 '두 아이에게 주는 가계(示二兒家誡·시이아가계)'다. '도성에서 몇 십 리만 벗어나도 태고의 원시 사회가 되어 있다'는 게 정약용이 분석한 서울 부동산과 문명과 입신양명의 법칙이었다. 예나제나 서울은, 꿈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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