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선비 1000명 학살범은 정철이 아니라 국왕 선조였다

bindol 2021. 12. 16. 16:06

[219] 1589년 기축옥사와 선조가 압수한 적가문서(賊家文書)

입력 2020.07.07 03:14 | 수정 2020.07.07 03:31
 
 
 
 
 

1589년 기축년 겨울에 벌어진 기축옥사(己丑獄事)는 그 전과 후 조선 정치 풍토를 갈라버린 참혹한 사건이었다. 논리로 싸우던 당쟁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으로 변해버린 사건이다.

기축옥사는 서인이었던 정여립이 하룻밤 새에 여당인 동인으로 당적을 옮기고, 그가 반역을 꿈꾸다 발각돼 벌어진 사건이다. 역적 토벌을 빌미로 이후 3년 동안 1000명에 달하는 동인 선비가 학살당하고 유배당한(東人株連以千計·동인주련이천계: 이건창, '당의통략') 참극이다. 수사반장은 서인 당수, 송강 정철이었다. 그에 대한 한(恨)이 사무쳐 동인 후손은 도마질을 할 때도 '정철정철정철'하며 고기를 썬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과연 정철이 주범(主犯)인가. 수사를 빌미로 정적을 떼로 제거하기는 했지만 주범은 아니다. 그럼 누구인가. 선조다. 사건 마무리 후 "악독한 정철이 내 선한 선비들을 다 죽였다(毒澈殺我良臣·독철살아량신)"('연려실기술' 별집3 사전전고)'고 분노한 그 국왕 선조다. 권력을 위해서 논리와 이성과 사람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왕 이야기.

사건의 시작

1589년 음력 10월 2일 황해감사로부터 임금에게 비밀 서장이 접수됐다. 이를 친람한 선조는 그날 밤 정승과 승지를 모두 소집시켜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황해도와 전라도에 금부도사와 선전관(왕명을 받은 무관)을 파견했다. 회의 기록을 담당한 예문관 검열 이진길은 회의에서 빠졌다가 구속된 후 죽었다. 이진길은 전라도 진안에 은거하던 정여립의 조카다.(1589년 10월 2일 '선조실록')

1589년 '기축옥사'의 진앙이었던 전북 진안 죽도의 겨울. 동인 정여립의 반역 첩보로 시작된 기축옥사는 이후 3년 동안 1000명에 이르는 동인이 죽거나 유배당한 대참극이었다. 정여립은 이 죽도에서 대동계라는 조직을 꾸리고 역적모의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옥사를 지휘한 서인 당수 송강 정철은 21세기까지 학살극 총책으로 비난받는 중이다. 그런데 여러 기록은 자기 권력을 위해 정철을 조종한 당시 최고 권력자 선조를 주범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그 정여립의 역모가 드러난 것이다. 전라도 진안현감 민인백이 토역 대장으로 죽도에 웅거하던 정여립 세력을 토벌했다. 관군에 포위된 정여립은 땅에 칼을 세워 목을 스스로 찔러 죽었다.(민인백, '태천집' 토역일기 1589년 10월 14일) 소울음 소리를 내며 죽은 정여립 시신은 서울로 압송돼 몸이 찢기는 거열형을 받았다. 함께 체포된 다른 역당도 마찬가지였다. 시작, 시작이었다.

선조의 의지와 정철의 복귀

정여립이 자살하고 동인으로 구성된 역적들이 대거 처형된 다음에도 선조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역모 적발 한 달 만에 선조는 전국에 구언교지(求言敎旨)를 내렸다.

'초야에 사는 선비에 이르기까지 각각 마음속에 품고 있는 뜻을 펴서 숨기지 말고 극언하여 나로 하여금 위아래에 죄를 얻는 일이 없게 하라.'(1589년 11월 1일 '선조수정실록')

구언교지는 상소 내용이 그 무엇이든 벌하지 않겠다는 면책 선언이다. 대개 구언교지는 국정(國政)에 대한 충언을 구해야 마땅했지만, 이번 교지는 섬뜩했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경고와 '지나가는 저 나그네 간첩인가 다시 보자'는 일망타진 의지가 충만했다.

봇물 터지듯 상소가 몰려왔다. 그 가운데 우의정 정언신과 이조참판 정언지가 정여립과 친하다는 상소가 있었다. 정언신은 정여립 사건을 조사하는 재판장, 위관(委官)이었다. 11월 7일 정언신은 위관에서 즉각 사퇴했다.

다음 날 선조는 고향인 경기도 고양에 있던 정철을 불러들여 우의정에 임명했다. 사양하는 정철에게 선조는 세 번 내시를 보내 입궐을 명했다. 정철이 병을 이유로 거듭 사양하자 선조가 일렀다. "가마에 실려서라도 적을 토벌하라(當輿疾討賊·당여질토적)."(송강별집3 송강연보) 서인 당수 정철이 특검단장이 된 것이다.

조대중과 김빙의 죽음

사건 초기 위관을 맡은 정철은 선조의 혀와도 같이 역모꾼을 잡아들였다. 동인 당수인 이발 또한 추국받던 중 곤장을 맞고 죽었다. 그의 여든 살 노모와 열 살도 되지 않은 아들 또한 죽었다.

선조가 구언한 교지에 온갖 상소가 몰려들었다. 권력의 낌새를 눈치챈 서인 집단은 마치 광기(狂氣)에 사로잡힌 듯했다. 남명 조식 문하로 세간의 존경을 받는 수우당 최영경은 정여립 패거리인 '길삼봉'으로 낙인찍혀 고문받았다. 두 차례 추국받은 최영경은 옥에서 죽었다. 광기는 그치지 않았다.

김빙(金憑)이라는 관리는 눈병이 심했다. 김빙은 정여립 시신을 찢을 때 참관하다가 찬바람에 눈물을 흘렸다. 날이 너무 추워서 눈물을 아무리 닦아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김빙 또한 역적을 슬퍼한다고 고문받다가 물고(物故)됐다. 자백하지 않고 죽었다는 뜻이다.

수사 초기에 전라도사(全羅都事·부지사급) 조대중이 보성에서 기생과 작별하며 울었다. 이 풍경이 와전돼 "정여립이 죽었다고 울었다"고 소문이 났다. 조대중은 서울로 압송돼 고문받았다. "역적 죽었다고 함께 파티를 한 김여물이 대기 중이니 증인으로 신청한다"고 청했다. 신청은 거부됐고, 조대중 또한 물고됐다. 1년이 지난 뒤 수사관이 몇 차례 바뀌었지만 한결같이 (강압 수사를) 답습했다. 이들 죽음은 1590년 3월 1일 자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돼 있다. 이 실록은 기축옥사로 권력을 잡은 서인 세력이 만든 기록이니, 기축옥사 수사가 무리였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다. 그리하여 3년 동안 학살당한 동인은 처형과 유배를 포함해 1000명에 달했다.(이건창, '당의통략')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와 '몸통'

그런 어마어마한 사건이 3년 동안 조선 정계를 휩쓸었는데도 그 실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꾸몄는지부터, 이 모든 수사 과정을 과연 정철이 지휘했는지까지. 동인이 저술한 책들은 정철을 천하의 모사꾼으로 표현했고, 서인이 저술한 책들은 정철이 최영경을 비롯한 많은 이를 변호했다고 기록했다. 서인은 오히려 정철을 이어 위관에 임명된 류성룡이 이발 가족을 포함한 거물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록 또한 북인이 쓴 '선조실록'과 서인이 쓴 '선조수정실록' 기록이 다 다르다. 이긍익이 쓴 사서 '연려실기술'은 아예 '동인 기축록은 파란 점[靑點]을, 서인 기축록은 붉은 점[紅點]을 달았다'고 구분해놓을 정도다. 도대체 왜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사건의 전말이, 4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인가. 몸통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충북 진천 환희산에 있는 정철 묘(사진 뒤쪽). 앞은 둘째 아들 종명의 묘다. 강화도에서 정철이 죽을 때 종명이 새끼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연명시켰다는 일화가 전한다. 송시열이 봐준 묏자리다.

선조의 비밀병기, 적가문서(賊家文書)

토역관으로 파견된 진안현감 민인백은 토역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임금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내려보낼 때 적가문서를 압수해오라고 명했다(收取賊家文書以來·수취적가문서이래).'(민인백, '태천집' 토역일기 1590년 정월 1일)

'적-가-문-서(賊家文書)'. 역적 집에서 나온 문서 일체다. 정여립이 쓴 글은 물론 정여립이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도 포함돼 있었다. 선조는 금부도사에게 친히 명을 내려 그 문서들을 수거해오라고 지시했다. 수사 독려를 위해? 아니었다. 선조는 그 문서를 추국청에 넘기지 않고 본인이 독점하고서 친국(親鞫), 직접 수사를 한 것이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우의정 정언신은 이들을 따로 만나 자기 이름이 있는 문서는 없애달라고 청했다. 정언신은 정여립의 먼 친척이었다. 선전관 이용준(실록에는 '이응표'라고 돼 있다)은 정언신 이름이 있는 문서는 다 파기해버렸다. 하지만 글자를 몰라 형 정언지(이조참판)의 호인 '동곡(東谷)'과 '집안 연장자'를 뜻하는 '종로(宗老)'가 적힌 편지는 없애지 못했다.('연려실기술'14권 '선조조 고사본말-기축년 정여립의 옥사')

선조가 수사 회의에서 '종로' '동곡'이 있는 편지를 흔들며 물었다. "이게 누구냐!" 정언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선조가 대로했다. "내가 일찌감치 이 편지를 꺼내지 않은 것은 몰랐기 때문이 아니고 염려되는 것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다. 이런 미욱한 놈이 정승을 한다는 말인가!"('태천집', '연려실기술' 등)

선조는 정언신에게 중도부처형(일정 장소에 안치하는 형)을 내렸다. 그리고 며칠 뒤 선조는 적가문서에서 정언신이 쓴 편지 19장을 꺼내 흔들며 말했다. "나를 눈이 없다고 여기는 것인가?" 수사관들은 파직되고 정언신은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돼 그곳에서 죽었다.

전 병조참판 백유양이 혐의를 부인하자 선조는 그를 친국하며 '(역모가) 가장 심한 편지를 골라' 내려보냈다. 곡성현감 정개청 또한 '임금이 내려보낸 편지'로 혐의가 드러났다. 두 사람 모두 죽었다. 최영경은 선조 친국 때 "역적과 서로 통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가, "이 편지는 뭐냐"라고 선조가 내민 편지 두 장에 고개를 떨궈야 했다.(이상 '연려실기술' 14권 '선조조 고사본말-기축년 정여립의 옥사')

매사가 그러했다.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국왕 앞에서 그 어떤 위관(재판장)도 그 어떤 추관(심문관)도 입을 함부로 열지 못했다. 동인 당수 이발을 친국할 때 이발의 편지 9장을 흔들던 선조는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칠어 모든 신하가 오들오들 떨었다.('태천집')

비판 세력을 철저히 도태시켜 왕권을 절대화하려 한 왕이었다.(이상혁, '조선조 기축옥사와 선조의 대응', 경북대 석사논문, 2009) 선조는 정철을 앞세워 목적을 달성했다.

유배를 보낼 사람을 사약을 내려도 감히 대들지 못했고, 사약으로 마땅할 자를 찢어죽이라고 해도 위관과 추관은 우물쭈물댔다. 선조가 그들에게 선언했다. "편지가 남아 있거늘, 아무리 중형을 받아도 무슨 유감이 있으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1589년 12월 7일 '선조실록')

악독한 정철이…

서인 총책임자 정철은 이러저러한 사연 끝에 선조 눈 밖에 나서 임진왜란 도중 벼슬을 내놓고 강화도에서 죽었다. 훗날 둘째아들 종명은 자기 아버지가 악인이 아니라고 신원 상소를 올렸다. 종명은 강화도에서 아비에게 새끼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연명시킨 아들이다.

지금 정철은 충북 진천 환희산 자락에 종명과 잠들어 있다. 고향인 고양 선산에 있다가 정신적 후배인 우암 송시열의 점지로 옮긴 묏자리다. 권력을 완성한 선조는 이렇게 말했다. “악독한 정철이 내 선한 신하들을 다 죽였다(毒澈殺我良臣·독철살아량신).” 정치판이 완전히 망가지고 3년 뒤 전쟁까지 터진 판에, 몸통이 던진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