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기미년 만세운동 특집 ③왕족들은 무엇을 했는가
①고종은 무엇을 했는가 ②안중근은 무엇을 했는가 ③왕족들은 무엇을 했는가 ④그날 조선은 무엇을 했는가
1909년 1월 순종 전국일주, 조선의 자발적 복종 유도… 이토 히로부미의 로드맵
1910년 8월 이완용 비서 이인직이 병합 제의
”고기가 먼저 뛰어들었다” 일주일 만에 병합 절차 완료
조약에는 황실 권리 보장 명시… 신분은 王과 公으로 유지
해마다 歲費 150만엔 지급… 동산, 부동산 재산 800만엔
종묘와 사직 그대로 재산·신분 그대로 ‘왕실의 안위가 앞선 그들’
1910년 7월 23일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3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며칠 뒤 밤 10시,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비서가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를 방문했다. 비서는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淚)’를 쓴 이인직이다. 그는 일본 체류 시절 고마쓰의 제자였다. 굳은 표정을 한 이인직이 옛 스승에게 은밀하게 말했다. “이천만 한인이 쓰러지거나 육천만 일본인과 함께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 고마쓰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물을 치기도 전에 물고기가 먼저 뛰어들었다.” 대화는 즉각 신임 통감에게 보고됐다.
8월 16일 이완용이 일본어에 능한 농상무대신 조중응을 데리고 쌍두마차를 타고 통감 관저를 방문했다. 출입기자들에게는 "도쿄의 수재민 위로 방문"이라고 했다.(고마쓰 미도리, '明治外交祕話(명치외교비화)', 原書房, 1976, p274 이하) 그리고 8월 22일 나라가, 사라졌다. 대한제국 융희제가 합병조약을 어전회의에서 통과시키고 일본제국 천황 메이지에게 나라를 바친 것이다. 발표는 일주일 뒤인 29일에 있었다. 고마쓰는 이렇게 기록했다.
'8월 22일은 한·일 관계에서 가장 기념할 만한 하루였다. 오전 10시 도쿄 추밀원 임시회의에서 메이지 천황이 병합조약을 재가하고, 오후 2시에는 한국 정부 어전회의에서 융희제 스스로 병합조약을 가납했다. 이어 데라우치 통감과 이완용 총리가 조약에 조인하고 모든 절차를 완료했다. 데라우치는 병사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고 피 한 방울 흘리지도 않았다. 담판 개시일부터 조약 조인까지 딱 일주일 걸렸다.'(고마쓰 미도리, 앞 책 p295)
국가 판매 가격 150만엔
병합을 두고 담판을 벌일 때, 데라우치는 황제 순종을 '대공(大公: 왕보다 아래인 유럽식 제후)'으로 격하시키려 했다. 이완용은 "중국에 조공할 때도 왕(王) 호칭은 유지했다"고 반대했다. 데라우치는 본국 문의를 거쳐 이를 승인했다.
그리하여, 전문 7조로 구성된 '한일병합조약'이 탄생했다. 1조와 2조는 한국 황제와 일본 황제 사이 통치권 인수인계, 3조는 한국 황실 지위 유지 및 상응하는 세비 지급, 4조는 황실에 기타 자금 제공, 5조는 병합 기여 한국인 표창, 6조와 7조는 한국인을 보호하고 공무원으로 등용. 7개 조 가운데 2개 조가 황실의 신분, 경제적 보장 조항이었다.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는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급되고 은사금 10만엔을 받았다. 이완용은 15만엔을 받았다. 조중응을 위시한 대한제국 각부 대신들은 10만엔을 받고 모두 조선 귀족 작위를 받았다.
조약 체결 열흘 뒤인 9월 1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조선 국왕 책봉식이 열렸다. 천황 칙사가 책봉 조서를 전달했다. 침묵만 흐르는 무언극 같은 책봉식이 끝났다. 국왕은 곧바로 남산 총독관저를 방문했다. 궁내부 일본인 특진관 곤도 시로스케가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기자들을 몰래 인정전에 들여보냈다. 샴페인 잔에 거품이 남아 있었다.(곤도 시로스케, '대한제국황실비사', 이마고, 2007, p104) 황제는 왕으로 격하됐다. 호칭은 쇼토쿠노미야 이왕(昌德宮李王)이었다.
하지만 이왕의 조상을 모신 종묘(宗廟)와 사직은 사라지지 않았다. 쇼토쿠노미야 이왕은 이후에도 정상적으로 종묘에 제사를 올렸다. 조약에 따라 나라는 사라졌지만 구 황실은 이듬해부터 세비(歲費)도 지급받았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세비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150만엔, 이듬해부터는 180만엔이었다.(이윤상, '일제하 조선왕실의 지위와 이왕직의 기능', 한국문화 40호, 2007) 1911~1913 회계연도 조선총독부 세출이 5046만9000엔이었으니(박기주, '식민지기의 세제', 한국조세연구원, '한국세제사' 1편, 2012), 식민지 세출의 2%가 2000만 조선인의 10만분의 1도 되지 않는 옛 지배자 가족 손에 떨어진 돈이었다.
황제 순종의 전국 일주
1909년 1월 7일 황제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의 강권으로 전국 일주에 나섰다. 1월 7일부터 13일까지 대구~부산~마산~대전, 27일부터 2월 4일까지 평양~신의주~정주~평양~황주~개성을 방문하는 강행군이었다. 이를 각각 남순행(南巡幸), 서순행(西巡幸)이라고 한다. 일장기를 누군가가 찢어버리는 사건도 있었지만, 열차와 신식 자동차를 이용한 황제의 순행은 도착하는 곳마다 대환영을 받았다.
황제를 호종한 이토 히로부미는 가는 곳마다 "폐하의 뜻은 한국의 부강에 있다"고 연설했다. 황제의 권위를 빌려 병합의 본심을 감춘 것이다. 부산에서 일본 군함을 사열하며 충격을 받은 순종은 대전에서 상투를 틀고 나타난 옛 관리들에게 "새롭게 일신할 생각이 없으니 앞으로 어찌할 것인가"라고 꾸짖었다.(이왕무, '대한제국기 순종의 남순행 연구', 정신문화연구 30권, 2007)
권력 없는 조선 황제와 권위만 없는 일본 야심가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정치 이벤트였다. 이듬해 대한제국 통치 세력이 "그물 치기 전에 뛰어든" 어처구니없는 일도 '자발적인 병합 유도'라는 로드맵에 예정돼 있는 일이었으니, 안중근의 거사가 조금만 일렀다면 어찌 됐을까. 2017년 대구 중구청은 그 황제의 남순행을 기념하는 순종 동상을 달성공원 입구에 세웠다.
황족의 종언, 왕공족의 탄생
병합과 함께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李王家)라는 명칭으로 순종의 직계는 천황가의 일원인 왕족, 그 형제들은 공족으로 대우받았다. 옛 궁내부를 대신한 이왕직(李王職)이 왕공족 재산과 신분을 관리했다. 지위는 일본 황족에 준하는 것이었다.(이왕무, ‘대한제국 황실의 분해와 왕공족의 탄생’, 한국사학보 64호, 2016)
신분은 일본의 왕족보다 높았고 재산 또한 막대했다. 1930년 9월 2일 자 총독부 자료 '이왕가추가예산설명'에 따르면 그해 이왕가는 유가증권으로 60만7778엔, 부동산은 논, 밭, 대지, 임야 모두 합쳐서 772만6091엔어치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매년 들어오는 세비가 150만엔이었고, 불시적인 행사에는 추가 예산이 투입됐다. 1921년 예산은 100만엔이 늘어난 257만3425엔에 달했다.(김명수, '1915~1921년도 구황실 재정의 구성과 그 성격에 관한 고찰', 규장각35집, 2016)
황실은 그렇게 길들여졌다. 폭력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했을 황제에 대한 관성적인 복종심을 위해 총독부가 황실을 살려둔 것이다.
황실이 이용한 것이기도 했다. 국가는 처분됐고 종묘와 사직은 보전됐다. 통감부 고위 관리가 경악할 정도로 그들은 적극적이었다.
왕공족의 식민 일상
순종, 쇼토쿠노미야 이왕은 병합 두 달 뒤인 1910년 10월 27일 고종이 사는 덕수궁으로 가서 왕비 민씨 육순탄신일을 축하했다. 고종 사후에는 홍릉도 수시로 찾았다. 가끔 총독 관저에서 만찬을 하고 영화를 구경했다. 1910년부터 1926년 사망 때까지 종묘를 찾은 횟수는 17회였다. 1917년에는 조선 건국의 성지인 함흥 본궁을 찾았다. 조선 500년사에 유례 없던 행차였다.(이왕무, '1910년대 순종의 창덕궁 생활과 행행 연구', 조선시대사학보 69집, 2014) 조선 종묘사직의 향불은 일본 황실이 해체되는 1945년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병합 3주년을 맞은 1913년 8월 29일 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고종의 일상을 이렇게 전했다. '옥돌장(玉突場: 당구장)에 나가서 공을 치시는데 극히 재미를 붙여 여관(女官)들을 함께 하신다. 여름에는 서늘한 때에 석조전에서 청량한 바람을 몸에 받으시며 내인들을 데리고 이야기도 시키고 유성기 소리도 즐거워하신다더라.' 1913년에는 고종 회갑연이 성대하게 열렸다. 원래는 1912년이었으나 그해에 일본 천황 메이지가 죽어 잔치를 연기했다. 광교와 다동기생조합 소속 예기(藝妓)들이 잔치에서 춤을 췄다.(김영운, '1913년 고종 탄신일 축하연 악무 연구', 규장각18집, 2007) 고종의 7남 영친왕 이은은 1907년 고종 퇴위 직후 일본으로 갔다. 왕족으로 살며, 왕족 의무 규정인 군에 입대해 중장까지 진급했다. 1927년에는 일본 백작 신분으로 유럽을 순방했다.
마치 나라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왕공족들은 살았다. 순종을 위시한 조선 왕공족은 일본 황실의 책봉을 받은 후 그 일원이 되어 왕실 일가의 안위만을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이왕무, 앞 논문, 2014)
한 사람은 달랐다. 고종의 5남이자 순종의 배다른 동생 의친왕 이강이다. 미국 유학파인 이강은 끝까지 배일 독립을 주장했다. 1919년 11월 상해임시정부가 이강을 망명시키려다 발각됐을 때, 이강은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독립된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김병조, '한국독립운동사략' 상편 10장 '내외인사의 독립정신거익투발', 1920) 이강은 아들 이우를 일본 황실 반대를 무시하고 조선 여자와 결혼시켰다. 아버지를 닮았던 아들 이우는 1945년 히로시마에서 폭사했다. 이왕가 재산은 해방 후 국유화됐다.
그리고 1919년 고종이 죽었다. 조선인 심장에 아직 남아 있던 의무적인 복종심이 두근거렸다. 그 위로 무단정치 10년 동안 숨죽였던 안중근의 결기가 고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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