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기미년 만세운동 특집 ④그날 조선은 무엇을 했는가
①고종은 무엇을 했는가 ②안중근은 무엇을 했는가 ③왕족들은 무엇을 했는가 ④그날 조선은 무엇을 했는가
북한산 백운대 암각 69자 독립선언문 낭독한 황해도 사람 정재용이 새겨
1918년 美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은 국내외 조선인 독립선언 준비
천도교가 주도한 기미년 선언, 고종 장례일 맞춰 준비
권유받은 옛 대신들은 거부… 박영효는 “일본 믿는다” 이완용은 “내가 어찌 동참을”
유혈 사태 우려한 민족대표들, 공원 대신 태화관에서 선언식
공원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정재용이 대신 선언문 낭독
덕수궁은 적막할 정도로 조용… 기뻐하는 상궁들에게 순종 “경거망동 말라”
무단통치 종식… 임정 수립… 조선이 근대정신으로 무장한 새날의 시작
해발 836m인 북한산국립공원 최정상 백운대에는 태극기가 꽂혀 있다. 힘든 산행에 성공한 사람들은 그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사람들 발치에는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고 울타리 안에는 한문 69자가 새겨져 있다. 비바람에 깎여 몇 자는 보이지 않으나, 내용은 이렇다.
'기미년 2월 10일 경성부 ○○정에 사는 경인년생 육당 최남선이 조선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경술년생 해주 수양산인 정재용이 기미년 3월 1일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 만세 합창을 이끌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황해도 사람 정재용이 새긴 글이다. 근대 100년 사상 최초, 최대로 조선 민중이 일치된 행동을 보였던 그 기미년 만세운동의 기록이며 그 자체가 역사인 기념물이다. 조선 민중이 스스로 근대인(近代人)임을 선언한 역사적인 날, 조선에서는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민족자결주의와 손병희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 피식민지에 대해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선언했다. 승전국 치하 피식민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지만, 그때 조선 독립지사들은 독립의 기회로 생각했다. 이듬해 2월 1일 만주, 연해주, 미국에서 활동하던 운동가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무오독립선언)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또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조선에서 벌어진 독립선언은 준비가 전광석화 같았다. 천도교 지도자 의암 손병희의 비서 이병헌(당시 25세)에 따르면, 1월 16일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가 오세창과 최린에게 "천재일우의 때를 만났다"며 거사를 준비했다. 25일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손병희와 교장 송진우, 교감 현상윤이 회동하고 다음 날 최남선이 합류해 선언문을 준비했다. 최남선은 또 다른 민족지도자 임규의 집에 틀어박혀 선언문 집필에 들어갔다.
이완용, "내가 어찌 여기에 동참을"
그리고 '구한말 대신급 인물'들도 교섭해 동참을 권유했다. 첫 번째 인물은 박영효였다. 손병희가 직접 찾아간 박영효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헌법을 고치게 되면 우리도 참정권을 갖게 된다." 일본 황실로부터 조선 귀족 후작 작위와 은사금 28만원을 받은 최고위 귀족에게 손을 내밀었으니, 손병희는 간이 큰 사람이었다. 조카 이회구가 찾아간 이완용은 취지서를 들고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함께 간 이병헌이 "괜히 일을 당하는구나" 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이완용이 커피를 들고나와 이렇게 대답했다. "합방 조인에 도장 찍은 내가 여기에 도장 찍는다고 누가 믿겠는가."('삼일운동 당사자 좌담', 1969년 3월 1일 자 '중앙일보') 경남 거창에 있는 유림 곽종석을 찾아갔던 한용운은 동참 의사를 받아내지 못했다. 결국 선언에 동참한 대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인물 33인으로 확정됐다.
"수절할 생각 말고…"
최남선이 최종 원고가 완성됐다고 연락을 했다. 임규의 집으로 찾아간 중앙학교 교감 현상윤에게 일본 여자가 선언서를 건네줬다. 2월 25일 최남선은 직접 활자판을 엿판 아래 숨겨 가위를 두드리며 운반해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현 조계사 경내)에서 인쇄했다. 인쇄된 선언문은 가마니에 싸서 수레로 인사동 천도교 본부로 운반됐고, 곧바로 전국으로 배포됐다. 연락을 받고 상경한 황해도 해주읍 감리교회 전도사 정재용은 선언서 100부를 신문지에 말아 경성역에서 원산 교회 전도사 곽명리에게 전달했다. 정재용은 한 장을 아무 생각 없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또 다른 민족지도자 김지환은 개성 책임자로 임명되자 아내에게 "내가 죽으면 수절할 생각 말고 시집가서 잘살라"고 유언했다.
3월 1일 파고다공원, 그리고 정재용
거리에 운집한 사람들은 분노해 있었다. 옛 황제 고종은 생전에 아들 영친왕 이은을 일본 귀족 딸에게 장가보내기로 결정했다. 1월 25일로 예정됐던 결혼식은 고종의 급서로 연기된 상태였다. 그런데 급서한 옛 황제 장례를 일본식으로 치른다는 발표는 조선 민중의 자존심을 무자비하게 파괴해버렸다. 분노는 옛 군주에 대해 남아 있던 의무적인 복종심과 배신감과 9년을 지속한 압제에 대한 저항심이 혼재한 분노였다.
여기에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갖는다는 소식에,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 파고다공원 공개 선언식을 인사동 태화관 회동으로 급변경했다. 혈기왕성한 학생들의 희생을 막자는 취지였다.(권동진 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정작 파고다공원에는 고종 장례 구경을 온 시골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오후 1시 30분 갑자기 북문(현 낙원상가 쪽 작은 문)으로 학생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순식간에 4000명이 넘는 군중이 원각사지10층석탑 주변에 모여들었다.(고춘섭, '수양산인 정재용 전기', 빛과 글, 2008, p23) 저주파의 정적이 흘렀다.
문득, 팔각정에 서 있던 정재용이 무심결에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원산으로 보낼 선언문 가운데 빼놓았던 한 장이 집혔다. 서른셋 먹은 정재용은 홀린 듯 선언문을 꺼내 큰 소리로 외쳤다. "조선독립선언문!" 훗날 정재용이 회상했다. "'조선'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그냥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올리며 모자를 날리고 발을 구르며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누군가가 모자를 지팡이에 걸어 정문으로 걸어나갔다. 군중이 모두 공원 밖으로 밀려나갔다."('삼일운동 당사자 좌담', 1969년 3월 1일 자 '중앙일보')
바위에 새긴 역사 그리된 것이다. 마치 귀신에 씐 듯 그 무시무시한 서류를 따로 챙긴 해주 청년 정재용이, 역시 무슨 지령이라도 받은 듯, 우왕좌왕하는 참석자 한가운데에서 선언문을 낭독해 각성(覺醒)의 봇물이 터져버린 것이다. 정재용은 이후 고향 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2년 넘도록 옥고를 치렀다. 정재용은 1936년 8월 조선일보가 주최한 백두산 탐방대 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 '민족 영산 백두산'을 방문했다. 해방 후 그는 건국준비위원회 해주 위원장으로 잠시 일하다가 월남했다.
정재용은 날짜를 알 수 없는 훗날 북한산 백운대에 '최남선이 쓰고 정재용이 읽었다'는 내용의 역사 기록을 암각으로 남겨놓았다. 정재용의 손자 정성화는 "백운대 산장 사람들 증언에 따르면 암각 시기는 일제강점기 어느 시점"이라고 했다.
3월 1일 '사면독립만세' 덕수궁
1919년 3월 1일은 누군가에게는 대각성의 날이었다. 그 전날까지 통곡소리로 가득하던 광경은 돌변해 있었다. 치마를 짧게 입은 젊은 여학생과 혈기왕성한 남학생이 비장한 목소리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수천 군중이 (덕수궁을 향해) 바닷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침착하게 질서를 지키고 있었고 작은 폭력조차 일으키지 않았다.'(곤도 시로스케, '대한제국 황실 비사', 이마고, 2007, p280, 281)
파고다공원에 들렀던 유림 김창숙 일행에게 사람들은 "나라 망친 놈들이 왜 여기 왔냐"고 욕설을 퍼부었다. 고종 장례를 위해 상경한 유림 김황에게 누군가가 '조선독립신문'이라는 신문을 던지며 "정신 차려라!"는 고함을 질렀다.(서동일,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18)
옛 황족, 그러니까 식민치하 왕공족(王公族)은 더 무심했다. 당장 이틀 앞으로 다가온 '도쿠주노미야 이태왕(德壽宮 李太王)'의 국장이 우선이었다. '대한독립' '민족자결' '세계평화' 같은 글귀가 적힌 깃발이 궐 밖에 펄럭이고 대한문을 지키는 보초들까지 내심으로 환영하며 이들을 들여보내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궁 안은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상궁들까지 제각각 "이제 조선은 독립이 되었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전하!"라고 전할 정도였다. 하지만 두 분(순종과 영친왕) 전하께서는 침착하게 그들의 경거망동을 나무라셨으나 때때로 시종을 보내 상황을 살펴보게 하셨다. 사면초가가 아닌 사면독립만세 소리였다.'(곤도 시로스케, p280~283)
스스로 선언한 새 시대
4월 28일 영친왕은 예정대로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결혼식을 치렀다. 하지만 조선 민중은 관심이 없었다. 당시 대표적인 혐한파 일본인 호소이 하지메(細井肇)는 이렇게 기록했다. '단언컨대 이왕가는 현재 조선인의 어떤 계급, 어떤 인물의 뇌리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조의 명신이라 해도 유림의 고로기숙(故老耆宿: 인습에 젖은 늙은이와 덕망 있는 노인)이라고 해도 이왕가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호소이 하지메, '선만의 경영', 1921, '3·1운동 100년 2', 휴머니스트, 2020, p59 재인용)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해 9월 11일 조선과 연해주에 각각 활동하던 임시정부가 통합됐다. 조선총독부는 9년간의 폭력적 무단통치를 종식하고 개량적인 문화통치로 선회했다.
일본 천황의 일족으로 연명하던 옛 황실이 완전히 부정당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희구한 완벽한 민족 말살 계획이 무위로 돌아간 날이었다. 조선 민중이 근대정신으로 무장하던 날이었다. 새 세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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