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聞column

[권근영의 숨은그림찾기] 가을 정류장

bindol 2018. 9. 11. 05:00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


높아진 하늘에서 햇살이 쏟아집니다. 빨간 지붕 위로 찬란하게 부서지는 햇살, 뒤뜰 단풍 든 잎사귀는  어느새 버석버석 말랐습니다. 인적 없는 시골 풍경을 담은 이 그림은 오치균(63)의 1999년 작 ‘가을 정류장’입니다.
 
오치균은 미국 뉴욕과 산타페, 한국 사북에서 붓 대신 손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붓으로는 원하는 표현이 안 나온다며, 손가락으로 아크릴 물감을 짓이겨 색을 냈습니다. 그의 풍경화 중 가장 사랑받는 건  ‘감’ 시리즈입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주렁주렁 열린 주황색 감, 추석을 기다리는 고향집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시리즈 뒤로 갈수록 매달린 감이 더 많아집니다.
 
오치균, 가을 정류장, 1999, 캔버스에 아크릴 .

오치균, 가을 정류장, 1999, 캔버스에 아크릴 .


보고만 있어도 배부를 것 같은 이 감 그림에 화가는 가난하고 서러웠던 어린 시절 기억을 담았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에 빼앗길새라 아침 일찍 일어나 감을 한 소쿠리씩 주워왔던 기억, 키 큰 나무를 내내 올려다보며 감을 따느라 고개가 떨어질 것 같던 기억, 어머니 따라 감 팔러 시장에 나갔지만 부끄러워 “감 사세요”란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들었던 기억. 하지만 타지에서 아등바등 살면서, 지긋지긋했던 고향 땅의 기억은 그리운 추억이 됩니다. 화가는 “그렇게 지겨웠던 감나무와의 투쟁이 아직도 계속됐다면 난 감을 먹지도 않을 테고 감히 사치스럽게 화폭에 담을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돌아봤습니다.(『오치균』, 생각의나무).  
     
‘감’ 시리즈 중에서도 초창기 작품인 ‘가을 정류장’에는 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감과 함께 범상치 않은 사연도 숨어 있습니다. 그림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2013년 전두환 일가의 추징금 환수를 위한 경매 때였습니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던 전 대통령 일가의 집에서 쏟아져 나온 그림 643점, 비자금의 흑역사조차 시장에서는 프리미엄이었습니다. 경매장은 구경꾼과 투자자로 연일 북새통을 이뤘고, 그림은 모조리 팔렸습니다. 총 73억원 어치였습니다. ‘가을 정류장’ 역시 추정가를 훌쩍 넘긴 2억 2000만원에 새 주인을 만났습니다.
 
옛 주인이 ‘알츠하이머’를 주장하며 기억에서 탈출하려는 요즘, 죄 없는 그림이 새삼 떠오릅니다. 지워지지 않을 소장 이력이 ‘출처 확실, 진품 인증’으로 읽히는 것은 아이러니랄까요.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


[출처: 중앙일보] [권근영의 숨은그림찾기] 가을 정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