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취임초 노련미로 여당 존재감 드러내
문 대통령과 총선까지 변수 많은 동거 시작
1995년 가을이었다. 이해찬(민주당 대표)이 43세일 때다. 그는 조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의 본부장을 맡아 선거에서 이겼다. 당초 본부장엔 당 부총재급이 거론됐지만 소장파였던 그가 전격 발탁됐다. 그러곤 정무부시장이 됐다. 그때 그를 봤다. 나는 서울시청 출입기자였다. 그는 가끔 시정을 설명하러 기자실을 찾았다. 어쩌다 기자들과 바둑도 뒀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참 젊었다. 정책 설명을 쉽게 잘했다. 참신했다. 깐깐한 면모가 없지 않았으나 기자들에게 친절하려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 그가 가끔 ‘버럭’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당시 생각이 나곤 했다.
그를 다시 본 건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기획단장이었을 때다. 그 무렵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신주류 인사들이 신당을 차렸다. 김근태·정동영·임종석 등 47명 남짓이었다. 김부겸이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에서 이때 합류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당해 이른바 ‘탄핵 바람’으로 2004년 총선에서 152석을 얻는다. 창당부터 이해찬의 역할이 컸다. 전략적이고 노련했다. 그때 나이 51세, 4선 의원이었다.
그랬던 그가 ‘버럭·호통 총리’란 별명을 얻는 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총선 승리(2004년 4월) 후 두 달만에 국무총리가 되면서였다. 총리직을 맡으며 피아 구분이 강한 듯한 모습을 보였고 보수 야당과 싸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2004년 10월 대정부 질문에서 ‘한나라당 차떼기당’, ‘보수 언론은 반역자’라고 직격탄을 날린 일이 대표적이다. 당시 노사모 사이트에는 “역사상 최고의 총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글이 올랐다.
그런 변화의 인상이 강인했던 이해찬이 다시 돌아왔다. 여당 대표로서의 귀환이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당 대표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명예로운 퇴진을 원했다. 국회의장을 맡는 것으로 그리하고 싶었으나 그 자리는 문희상에게 갔다. 전당대회에선 김부겸을 밀려했지만 못 나온다니 거기서 새 길을 찾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