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의 땅의 歷史] 갑오년 7월, 天下가 뒤집어졌다

bindol 2022. 1. 5. 05:37

286.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① 전조(前兆)들

일본 화가가 그린 청일전쟁 풍도해전도. 일본군에 의해 격침되는 청나라 함대를 그렸다. /영국박물관
입력 2022.01.05 03:00
 
 
 
 
 

<격주 연재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시작합니다. 청일전쟁은 128년 전인 1894년 청과 일본이 조선 땅에서 겨뤘던 전쟁입니다. 목적은 아시아 패권 쟁탈이었고 구시대 세계관을 고집했던 청은 근대 시대정신을 수용한 일본에 굴욕적인 참패를 당했습니다. 20세기를 6년 앞두고 벌어진 청일전쟁은 이후 아시아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버렸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天下)’ 질서는 붕괴되고 아시아는 일본이 주도한 근대 ‘세계(世界)’ 속으로 내동댕이쳐집니다. 안타깝게도, 그 전쟁터는 조선이었습니다.

1894년 갑오년은 조선에서 동학농민전쟁이 터진 해이기도 합니다. 500년 동안 누적된 봉건 조선왕조 모순이 폭발한 사건이 동학전쟁이었습니다. 이 민란을 진압해달라고 조선 정부가 부른 청나라 군사가 일본군과 맞붙은 전쟁이 청일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조선을 자기네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屬國)으로 묶어두려고 했던 청은 무참히 패합니다. 아시아 주도권을 잡은 일본이 조선에 대해 본격적인 식민지화 작업에 착수한 계기가 이 청일전쟁입니다.

조선 농민은 왜 죽창을 들었고, 조선 정부는 왜 외국군을 불러 자기 백성을 탄압했으며, 청일 양국은 왜 조선에서 전쟁을 벌였을까요. 왜 남의 나라들이 국토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모습을 조선 정부는 무기력하게 바라봐야 했을까요. 일본은 왜 다름 아닌 조선을 타깃으로 삼아 전쟁을 일으켰을까요.

21세기 한·중·일 외교-경제 전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덕담과 도덕은 통하지 않는, 힘과 국익만 존재하는 이 시대를 징비하기 위해서 청일전쟁을 돌아보겠습니다.>

청나라 화가가 그린 풍도해전 판화 '조선수전 득승첩도'. 사실과 달리 청나라 함대가 일본 함대를 격파했다고 묘사돼 있다. /영국박물관

[박종인의 땅의 歷史]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① 전조(前兆)들

전조(前兆) 1 – 유미유동(留美幼童) 심수창

1872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 정부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청소년들을 유미유동(留美幼童)이라고 한다. 근대 문물을 배워 나라에 충성하라고 보냈던 이 120여 어린이들은 1881년 “배우라는 기술은 팽개치고 정신이 서화(西化)됐다”는 이유로 소환됐다. 학업은 마치지 못했다.

청나라 북양함대 제원(濟遠)호 부함장 심수창(沈壽昌)은 그 유미유동이다. 제원호는 1886년 북양함대가 독일에서 구입한 철갑선이다. 8년 뒤 조선에 동학농민전쟁이 터졌다. 조선 정부의 요청에 따라 북양함대 소속 군함 세 척이 조선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상해(上海)에서 태어난 심수창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자기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리라고는 꿈꾸지 않았을 터이고, 배수량 2355톤짜리 거대한 근대 철갑군함 부함장이 되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1894년 7월 25일 새벽, 안개 속에서 일본 군함 요시노(吉野), 아키츠시마(秋津洲)와 나니와(浪速)가 제원호를 향해 포격을 했다. 함장 방백겸(方伯謙)의 대응 사격 명령이 늦어지자 부함장 심수창은 직권으로 교전을 명했다. 한 시간 20분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요시노함 포탄 하나가 퇴각하던 제원호 망루를 때렸다. 심수창은 머리에 포탄을 맞고 전사했다. 서른두 살이었다. 천하의 북양함대라고 자부했던 청나라 함대였지만 요시노호는 제원호보다 7노트가 빨랐다. 유미유동 심수창을 죽게 만든 요시노함 함장 가와하라 요이치(河原要一)는 독일에서 2년 동안 해군 교육을 완수한 유학파였다. 제원호는 훗날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압수했다. 개전 직후 일본군은 이렇게 주장했다. ‘청나라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일청전쟁실기(日淸戰爭實記) 2편’, 박문관, 1894년, p96) 심수창은 몰랐을 것이다.

전조(前兆) 2 – 민영준의 부패와 고종

1894년 동학 농민들이 봉기했다. 타깃은 부패한 민씨 정권이었고 목적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이었다. ‘일청전쟁실기’에 따르면, 그때 민씨 가운데 가장 부자는 전 선혜청 당상인 민영준(민영휘)이었는데, ‘그 돈이 바로 민씨 정부를 유지하는 자금이었다.’(‘일청전쟁실기 1편’, p99)

굳이 일본 자료를 들추지 않아도 민영준은 당시 부패와 탐오(貪汚)의 상징이었다. 동학 농민들은 민영준 처단을 민란 해산의 제1조건으로 내걸었다.

처단 대상이 된 민영준과 고종 정권은 그해 6월 3일(음력 4월 30일) 조선에 와 있던 원세개(袁世凱)를 통해 청 황실에 민란 진압 군사를 요청했다. 다음은 그 요청문 전문이다.

‘폐국(弊國) 전라도 관할의 태인과 고부 등은 민풍이 사납고 성정이 음험하고 간사하여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몇 개월 사이 동학 교비 만여 명이 현읍 10여 곳을 함락시켰고, 전주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 흉악하고 완고한 자들이 다시 북으로 잠입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경기 지역이 시끄럽게 요동을 칠 것이니 손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 훈련한 폐국 부대는 현재 인원이 겨우 도성을 지킬 만할 뿐이고 아직 전투를 치른 경험도 없으니 흉악한 구적(寇賊)을 섬멸시키는 데 쓰기 어렵습니다. 만약 오랫동안 만연하면 청에 많은 근심거리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임오년(1882년 임오군란)과 갑신년(1884년 갑신정변)에 폐국에서 두 차례 내란이 일어났을 때 모두 중국 병사들이 대신 평정해 주었습니다. 이 같은 사례에 의거해, 청컨대 번거롭더라도 몇 개 부대가 속히 대신 토벌케 하고 폐국 각 병사들로 하여금 군무(軍務)를 따라 익히게 하여 앞으로 수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급박한 형세를 구원하기를 절실하게 기다립니다.’(‘이홍장전집’(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9) G20-05-001,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7, p110)

 

조선 정부가 청군을 요청한 명분은 ‘성정이 음험하고 간사한 흉악한 구적 섬멸에 군사 태부족’이었고 청나라가 출병한 명분은 ‘속방(屬邦) 조선 보호’였다. 원세개는 요청 문서를 받은 즉시 청국 총리아문에 전보를 쳤고, 총리아문 수장 이홍장은 제원호와 양위(揚威)호 군함 두 척을 조선으로 출항시켰다.

청나라 화가가 그린 평양성전투 판화. 붉은 테두리 속 확대된 부분에는 '고려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청군을 지원하는 조선군이 그려져 있다. /영국박물관
평양성 전투 후 청나라 병사들을 체포한 조선 병사들. 청일전쟁 당시 조선군은 청-일 양쪽편으로 참전했다. /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

전조(前兆) 3 – 김옥균의 암살

그랬다. 부패한 조선과 그 조선을 속국으로 눌러 앉히려는 중국이 손에 손을 맞잡고 조선 민란 진압을 위해 청국 군사를 들여왔다.

이보다 두 달 전인 3월 27일 일본에 망명 중이던 조선 정치범이 중국에서 조선인 손에 죽었다. 갑신년 1884년 겨울 정변을 일으켰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정객, 김옥균이 죽었다. 조선 정부가 반복해서 보낸 자객을 피해 활동하던 김옥균은 일본에서 조선인 홍종우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홍종우는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온 지식인이었고, 김옥균은 “조선을 동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겠다”는 신념을 갑신정변 명분으로 삼았다.

3월 23일 상해행 배에 오른 김옥균은 3월 28일 동행했던 벗 홍종우가 쏜 총에 맞고 죽었다.

김옥균이 상해에 가리라는 사실, 조선의 운명을 두고 이홍장과 만나 담판을 하겠다는 사실, 그리고 홍종우가 그를 죽이리라는 사실을 중국과 일본과 한국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10년 전 조선을 뒤흔든 정치범이 다시 세상을 어지럽히게 놔둘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상은 그 죽음으로 삼국 갈등 요소가 사라졌다고 안도했다. 그런데 그게 시작이었다.

중국은 중국 군함에 그 시신을 실어 조선으로 보냈고, 조선 정부는 그 시신을 관에서 꺼내 토막을 내버렸다. 이 조선 왕조 최후의 부관참시 한 달 뒤 암살자 홍종우는 조선 왕조 최후의 과거시험에 급제해 관료로 임용됐다.(1894년 음력 5월 27일 ‘고종실록’)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삼국 가운데 가장 급속한 근대화 작업을 진행 중이던 일본은 김옥균 사후 처리 방식이 야만적이라며 극렬히 비난했다. 시신을 조선으로 보낸 중국을 비난하고 원시적인 복수극을 벌인 조선을 비난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 화가가 그린 판화. 제목은 '일청한 담판지도'다. 아시아 패권과 조선의 운명을 놓고 청과 일본이 담판을 벌이는 상상도다. 가운데 침울하게 앉아 있는 조선 관료들이 그려져 있다. /영국박물관

전조(前兆) 4 – 한 통의 전문(電文)

일본에서는 근대화 과정에서 숱한 구시대 사무라이들이 신분을 박탈당하고 떠돌고 있었다. 그 불만을 분출하고 근대화 자산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 지도부는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쟁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동학란이 터진 것이다. 김옥균을 사상적으로 가르쳤던 일본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렇게 주장했다. “지나 정부가 원병을 파견할 경우 일본 정부도 같은 세력의 군사를 보내 대등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조선 동학당의 소동에 대해서’, 1894년 5월 30일: 윤상현, ‘근대 지식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김옥균’, 동아시아고대학 57집, 동아시아고대학회, 2020, 재인용)

유키치가 저리 주장하고 며칠 뒤 청나라 황실에서 보낸 전문(電文) 한 장이 일본 정부에 접수됐다. 발신은 이홍장이다. 내용은 이러했다.

‘청일 양국이 협의한 조약 중에 장차 조선에 변란이 나서 청국에서 파병하여야 할 경우가 생기면 당연히 공문으로 조회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조선 정부에서 온 문서를 받아 본 바에 의하면 전라도 관할 하 백성은 습성이 흉하고 사나워서 동학교도와 무리를 지어 현읍을 공략하고 또 북쪽에 있는 전주를 함락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얼마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속히 와서 정토(征討)를 대신해 달라고 간청해 왔습니다. 우리 조정이 속방을 보호하는 예로부터의 관례이므로(하략).’(‘주한일본공사관기록’3, 2.동학란과 청일관계1 (17)조선에 속방 보호를 위해 출병한다는 이홍장의 통고, 1894년 6월 7일)

일본은 기다리지 않았다. 학수고대하던 일본은 즉각 대기 중이던 군사를 조선으로 보냈다. 전쟁은 시작됐다. 천하(天下)가 요동치기 시작했다.<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