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숨은 對中 굴욕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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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개항장거리는 영역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높은 계단을 경계로 동쪽은 일본 조계지였고 서쪽은 청나라 조계지였다. 복원된 지금 풍경도 비슷하다. 계단 북쪽 끝에는 큰 석상이 서 있다. 공자(孔子) 상이다. 2002년 5월 중국 칭다오(靑島) 남구 인민정부가 세웠다. 계단을 오르면 정면 담벼락에 황금으로 조각한 용들이 붙어 있다. 앞길이 ‘삼국지 벽화 거리’임을 알리는 장식물이다. 용들은 발톱이 네 개인 사조룡(四爪龍)이다. 황제나 왕보다 한 급 아래인 태자와 세자를 상징한다.
사조룡 아래에는 동판에 새긴 기념비가 있다. 화강암 기단에 이렇게 적혀 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1882년 양력 5월 22일 조선이 미국과 조약을 맺고 세상에 문호를 연 역사적인 장소다.
왜 역사적인가. 일본(1876년 강화도조약)에 이어 서구 열강과 최초로 맺은 개국 조약이 이 조약이다. 그해 미국을 필두로 조선은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와 연달아 조약을 맺었다. 500년 닫아놨던 나라 문을 세계(世界)로 연 계기가 이 조약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조약과 무관해야 마땅한 청나라 관리 마건충(馬建忠)이 그 체결 현장에 있었으며, 그가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이다. ‘조선 대관 신헌과 김굉집이 먼저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先行三跪九叩頭禮·선행삼궤구고두례).’(마건충, ‘동행초록’, 소방호재여지총초 조선편, 인하대한국학연구소, 2010, p203) 병자호란 직후 조선국왕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행했던 그 삼궤구고두례를 200년 뒤 바로 이 땅에서, 제3국 조약 체결 현장에서 중국에게 행한 그 이야기.
287.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숨은 對中 굴욕외교
무너지는 천하(天下), 포위된 중국
1792년 9월 26일 영국 백작 조지 매카트니가 영국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청나라였고 매카트니는 특명전권대사 신분이었다. 대포 64문이 장착된 라이언호는 이듬해 5월 마카오에 도착했다. 여행 목적은 영국과 청의 국교 수립이었다. 매카트니는 이를 위해 조지 3세가 쓴 친서를 보석함에 넣어 가져왔다. 9월 14일 새벽 3시 톈진에서 축하연이 벌어졌다.
이에 앞서 청 황실은 매카트니 사절단에게 청나라 전통 황제 알현 의식인 삼궤구고두례를 요구했다. 3회에 걸쳐 세 번씩 머리를 땅에 박고 절을 하라는 것이다. 복잡한 협상 끝에 매카트니는 국서가 든 보석함을 머리 위로 들어 건륭제에게 바치고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영국식 의례를 올렸다. 조선과 태국, 베트남에서 온 축하 사절은 이미 아홉 번 절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0월 3일 조지 3세에게 보내는 건륭제 칙서가 나왔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유럽 야만국에서 우리 차와 비단을 원하므로 이제껏 조공에 응해줬다. 하지만 천조국은 부족한 물건이 없다. 따라서 교역은 불허한다. 그대의 대사가 무지하여 내 신하들로 하여금 훈계를 하라고 했다.’(S. 플랫, ‘Imperial Twilight’, 알프레드 노프 출판, 2018, p43)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칙서를 받은 매카트니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청나라는 난파한 채 바다를 떠다니다가 산산이 부서져 해변으로 밀려올 것이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청나라라는 배는 재건될 수 없다.’(G 매카트니, ‘Some account of the public life, and a selection from the unpublished writings of the earl of Macartney’ 2권, T. Cadell and W. Davies, 1807, p398~399)
그때 제정신을 차렸다면 세상은 달라졌을 터이다. 47년이 지났다. 1840년 영국이 아편전쟁을 도발했다.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청나라는 베이징 초입인 톈진(天津)까지 털렸다. 대륙은 제국주의 놀이터로 전락했다.
1871년 청 정부는 일본과 ‘청일수호조규’를 맺었다. 1000년 넘도록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오랑캐와 대등한 관계를 맺었다. 청나라 요청에 따라 조약 1조는 이러했다. ‘소속방토(所屬邦土) 상호 불가침’. ‘토(土)’는 청국 영토를 의미했고 ‘방(邦)’은 속방을 뜻했다.
매카트니를 조롱했던 그 천자국은 사라지고, 세상은 수직적으로 구성된 천하(天下)에서 정글 같은 세계(世界)로 무너지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천하 질서에 남은 속방은 여전한 조공국 조선과 류큐 왕국(현 오키나와) 그리고 안남(베트남) 셋이었다.
그런 와중에 1872년 일본 메이지 정부는 청 조공국 류큐를 자기네 번으로 삼겠다고 일방선언했다. 또 1874년 일본은 3년 전 대만에 표류했던 류큐 어민들이 살해당하자 ‘일본국 속민에게 해를 가했다’며 대만을 침략했다. 1879년 일본은 류큐 왕국을 멸망시키고 가고시마현으로 편입시켰다. 안남은 이미 1850년대에 절반쯤 프랑스 식민지로 변해 있었다.
그리하여 문득 보니 이제 청 제국(帝國)에 남은 속방은 오직 조선, 자기네가 동방예의지국이라며 아꼈던 조선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나라가 일본과 조약을 맺더니(1876년) 이제 아메리카 제국과 조약을 맺겠다는 것이다.
맹렬한 속도로 제국을 포위하는 일본과 서구 제국에 맞세울 유일한 속국, 조선은 절대 버릴 수 없는 카드였다.
여기까지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까지 전사(前史)다.
중국 땅에서 중국인이 진행한 협상
1871년 개항을 요구하며 미국이 강화도를 침략했던 신미양요는 대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조선 정부는 전국 팔도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쇄국을 강화했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1882년 마침내 조선이 세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조미조약은 전통적 속방 관계 속에 조선을 독점하려 한 청나라와 조선에 대한 대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미국 사이 갈등이 만든 결과물이다. 미국 전권대사인 해군 제독 R. 슈펠트(Shufeldt)는 “잉여 생산품을 처분할 판매 시장 확보가 통상의 목적”이라고 주장해왔다.(김원모, ‘조미조약 체결 연구’, 동양학 22집, 단국대동양학연구소, 1992) 반면 청 정부는 속방인 조선을 조종해 ‘미국과 연합해’ 러시아를 견제할 계획을 품고 있었다. 청나라 실권자인 북양대신 이홍장은 지속적으로 조선에 미국 수교를 권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외세를 배격하는 위정척사파가 극렬하게 활동 중이었다.
일본에 이어 서구 오랑캐와 조약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회에 자세하게 나오겠지만, 그래서 이날이 올 때까지 그 조약 문구 하나하나를 다듬고 협상한 팀은 미국과 청나라 관료들이었다. 협상 장소도 중국 톈진이었고 협상 멤버도 중국 관료들이었고 초안을 작성한 붓도 중국 붓이었다. 그 억장이 무너지는 이야기는 다음 회로 미룬다. 오늘은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풍경만 구경해본다.
아홉 번 머리 조아린 신헌과 김굉집
1882년 5월 8일 위원(威遠), 양위(揚威), 진해(鎭海) 3척 군함에 분승한 청나라 관리 마건충과 제독 정여창이 인천부 호도(虎島)에 도착했다. 나흘 뒤 아메리카합중국 전권위원 해군대장 슈펠트가 군함 스와타라를 이끌고 인천부 호도에 도착했다.(‘고종시대사’ 2집 1882년 3월 21, 25일) 소식을 들은 조선 정부는 서둘러 청나라 사람들이 묵을 객관을 국비로 마련해줬다.(1882년 3월 15일 ‘고종실록’) 마건충은 프랑스 유학파 법학박사였고 정여창은 영국으로부터 양위호를 인수해 끌고 온 장교였다. 두 사람은 두 달 뒤 벌어진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을 납치해간 주역이었다.
조선측 전권대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전권대신인 신헌(申櫶)이 임명됐다. 부관(副官)은 김굉집(金宏集)이었다. 본명은 김홍집(金弘集)이다. 5월 13일 조선 선발대가 위원호로 와서 내일 ‘진알(晉謁: 알현)’에 대해 설명했다. 마건충이 말했다. “아래 나라(下國·하국) 대신은 대신이라 하지 말고 대관(大官)이라고 하라.”(마건충, 앞 책, p202)
다음 날 오전 11시 조금 지나서 정사 신헌과 부사 김굉집이 군함에 올랐다. 이들은 ‘큰 기가 휘날리고 거대한 천막 아래 군용 장막이 설치된 청 선박 네 척에 올라 위원호로 향했다. 대취타가 울려 퍼지며 병사들을 호령하는데, 실로 장엄하였다.’(신헌, ‘미국통상실기(美國通商實記)’)
신헌에게는 석희(奭熙)와 덕균(德均)이라는 동행이 있었는데, 각각 아들과 손자였다. 승선 후 이들은 통역을 통해 “배신(陪臣·황제 아래 제후의 신하) 모모가 등선했다”고 전한 뒤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례를 치르며 국왕을 대신해 공손히 황태후와 황상 안부를 물었다. 마건충과 정여창은 의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제야 이들과 상견례를 치렀다.(마건충, 앞 책, p203) ‘미국통상실기(美國通商實記)’에는 신헌이 아들·손자를 데려간 사실과 고두례를 행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또 신헌은 마건충이 지시한 대로 본인과 김홍집을 ‘대신(大臣)’이 아닌 ‘대관(大官)’으로 기록했다.
중국 초안 그대로
조선 대표들은 이어 옆에서 대기 중이던 미군함 스와타라호에 승선해 슈펠트와 상견례를 가졌다. 스와타라호는 이들을 환영하는 예포 3발을 쐈다. 다음 날 인천부사 정지용이 미국 측에 선물을 줬는데 소 한 마리와 돼지 두 마리, 계란, 닭, 생선과 쌀이었다. 이에 미국 측은 달러화와 빵과 시가로 화답했다. 이날 신헌은 인천 객사에서 연회를 주관했다. 게스트는 미국 사신 슈펠트와 청나라 사신 마건충이었다. 5월 17일 중국 측이 마련한 조약 초안을 조선 부사 김홍집이 최종적으로 검토했다. ‘쌀 수출은 금지한다’라는 조항만 삽입하고 모든 문안이 청나라 안대로 통과됐다.
5월 22일 오전 10시 45분 바다가 보이는 제물포 언덕에 화려한 천막이 설치되고, 그 천막 속에서 대조선국과 대미국의 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열렸다. 체결 직후 마건충은 천막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체결 후 체결장에 들어왔다. 조선 대표 신헌과 김홍집은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다’라는 내용을 담은 국왕 조회문을 슈펠트에게 전달했다.(마건충, 앞 책, p207) 그리고 그해 10월 4일 청은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었다. 조약이 아니라 ‘장정(章程)’이다. 중국 국내용 문서라는 뜻이다.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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