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면인줄? 똑닮은 北국수봉지…쓰레기가 알려준 북녁 실상
입력 2022.02.23 00:30


강동완 동아대 교수가 지난 1년동안 서해5도 해안에서 수집한 북한 상품 포장지 등 생활쓰레기를 펼쳐 놓고 설명하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북한이 국경을 꽁꽁 걸어 잠근 지 만 2년이 지나고 있다. 단 하루도 외부 세계와의 교류나 교역 없이 살아가는 삶을 상상하기 힘든 글로벌화의 시대에 2600만 인구의 국가가 2년 동안 완벽한 ‘셀프격리’를 하고 있다는 현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방역은 성공했을지 모르나 북한 경제는 심대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북한 주민들이 1990년대 ‘고난의 행군’에 버금가는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합리적 추론일 뿐, 정확한 실상은 알 길이 없다. 국경 폐쇄와 함께 북한의 내부 정보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도 뚝 끊겼기 때문이다.
우선 탈북 행렬이 사라졌다. 코로나 이전 한 해 1000명 수준이던 탈북민 입국자는 지난해 60명으로 격감했다. 압록강·두만강 일대의 북중 접경지역에 가서 국경을 넘나드는 인원과 물자를 통해 북한 내부 정보를 파악하거나 국경 너머를 관찰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북중 접경지역 답사 등의 방법론으로 북한 사회상을 연구하는 강동완 동아대 교수가 대신 찾아낸 현장은 백령도ㆍ연평도 등 서해 5도다. 북한 땅에서 4㎞가량 떨어진 해안에 떠내려온 북한 주민들의 생활쓰레기들을 찾아 분석하는 것이다. 그는 지난 1년간 정기적으로 서해 5도를 찾아 해안선을 누빈 끝에 1400여점의 북한 상품 포장지나 페트병 라벨지 등을 수거했다. 쓰레기에 무슨 대단한 정보가 들어있을까 싶지만 막상 연구를 시작해보니 북한 경제와 주민 생활상에 관해 의외로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고 이를 책으로 엮었다. 필자도 처음에는 독특한 수집벽(癖)의 소유자이겠거니 했는데 만나 대화를 해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노동신문의 행간을 아무리 읽어도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쓰레기로부터 찾아내는 그의 작업은 진지했다.
쓰레기를 모아 알게 된 새로운 사실들
강 교수가 채집한 수집품을 보면 우선 북한 제품의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북한은 단물이라 부르는 과일향 음료, 혹은 탄산단물이라 부르는 탄산음료를 만들어 내는데 강 교수가 수집한 것만 78종이고 브랜드도 제각각이다. 여기에 첨가되는 과일향의 종류도 국내 마트에서 보는 것보다 다양하다. 이는 김정은 집권 이후 10년간 ‘인민생활 향상’을 내걸고 지속적으로 경공업·소비재 제품 개발을 강조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강 교수의 분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쓰레기에서 무엇을 알아낼 수 있나.
“포장지에 인쇄되어 있는 기업소 이름, 공장 주소, 제품명, 디자인, 성분표시 하나하나가 모두 다 정보다. 단물 라벨지의 성분 표시에서 ‘팔월풀당’이란 생소한 이름의 재료가 모든 제품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알고보니 국화과에 속하는 팔월초란 풀에서 당 성분을 추출해 낸 것이었다. 북한은 설탕을 자체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나라다. 기술이야 배워온다고 쳐도 원료인 사탕수수를 수입해야 하는데 북한의 경제구조가 그럴 형편이 안된다. 그래서 대용품으로 개발해 낸 것이 자생하는 풀에서 추출한 팔월풀당이다. 평양에 가공공장이 있다. 품질은 당연히 낮을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북한이 요즘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원료 국산화’의 딱한 현실이고 북한이 내세우는 자립경제의 단면이다. ”
그는 다른 제품들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견된다고 덧붙였다. “북한 의약품 포장지도 수거해서 성분을 조사해보니 국내의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제품은 정성제약공장이 만든 식염수나 포도당 링거액 정도였다. 실은 이 제품은 한국의 대북지원단체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복용하는 위장약, 구충약, 간염알약,기침약 등은 예외없이 야생 식물을 말리고 빻아 환으로 만든 수준이었다. 북한은 이를 고려의약이라 부르지만 현대 의학의 견지에서는 효능이 검증되지 않는 것들이다. ”
-품질은 미흡하다 해도 제품이 다양해지고 상표 디자인이 세련된 듯한데 긍정적 현상 아닌가.
“상품이 다양해진 것은 북한 주민에게 ‘취향’이란 것이 생겨났다는 의미다. 원래 사회주의는 국가가 주는대로 받아 소비하는 것이니 취향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이 이제는 더 맛있고 이왕이면 더 예쁜 것을 찾고 있다는 의미다. 사적 욕망의 출현이다. 북한의 기업들도 주민의 취향에 맞춰 제품을 만들고 장마당을 통해 유통시켜야지 먹고 살 수 있다. 완벽한 건 아니지만 자본주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즉 집단주의 체제에 뭔가 균열의 틈새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북한이 제품 디자인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강 교수의 수집품을 훑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제품 이름만 덜렁 쓰지 않고 특화된 캐릭터와 로고를 새겨넣은 도안들은 이미 보편화됐다. 얼핏봐도 한국 제품을 모방한 것이라 짐작되는 것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즉석라면이나 새우튀기 등의 포장 도안은 한국의 유명 상품 도안과 흡사했다.

북한산 즉석 라면의 포장지. 디자인과 색상 배합, 포장지 하단의 검은 색 무늬까지 한국산 라면의 것과 비슷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류 확산을 엄단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런 상품들은 예외인가.
“코로나로 인한 국경 통제 이전에 중국을 통해 한국 상품이 흘러 들어가 장마당에서 많이 유통됐고, 이에 익숙해진 북한 주민들의 수요에 맞춰 북한 기업들이 제품들을 만들고 있다는 의미다. 한때 개성공단 입주 기업이 종업원들에게 나눠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초코파이도 이제는 모방 상품을 여러 기업소에서 경쟁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초코레트 단설기라 부른다. ”
진정한 인민생활 향상의 지름길은?
이 밖에도 쓰레기를 통해 알게 된 사실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산 대추우유 페트병에 인쇄된 QR코드를 휴대폰 앱으로 촬영하자 제품 정보가 화면에 나타났다. 제품 웹사이트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송봉근 기자
◇실제 작동하는 QR코드=제품 포장지 가운데 상당수에는 QR코드나 바코드가 인쇄돼 있다. 그중 와플 포장지의 큐알코드를 휴대폰 앱으로 촬영해보니 ‘련계할 전화번호 02-973-1XXX’란 안내문이 떴다. 련계는 연락의 북한식 표현이다. 일부 제품의 QR코드에선 성분과 용량 등의 상품 정보가 나오기도 했다. 국제적 추세에 맞게 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한 상품 관리나 유통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으며, 휴대폰 보급이 상당히 이뤄진 결과로도 풀이된다. 다만 해당 제품이나 기업의 홈페이지로 직접 연결되는 QR코드는 발견하지 못했다. 또 제품 생산일자 표기에서 '주체' 연호가 사라졌는데 이 역시 국제적 추세를 따르려는 변화의 일환으로 보인다.
◇병과 캔은 레어템=액체류 제품은 음료수든 술이든 모두 페트병에 담긴다. 강 교수의 수집품 가운데 병이나 알루미늄 캔은 전무했다. “북한 연안에 가라앉고 안 떠내려온 것 아니냐”는 질문에 “중국산 병과 캔도 백령도에 대량 떠내려오는데 북한산은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특히 알루미늄 캔은 평양의 고급 상점 화보에서도 보기 힘들다. 강 교수는 오랜 제재로 인한 원자재 품귀현상으로 설명했다. 북한이 확보한 소량의 알루미늄은 군수품 등 제한된 용도에만 사용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광산에서 만드는 아이스크림= 에스키모라 불리는 빙과류의 생산업체 가운데엔 탄광업체가 들어있다. 원래는 석탄을 캐야 하는데 제재로 인해 판로가 막히니까 유휴 인력을 활용해 부업에 나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고려항공이 생산한 고춧가루 포장지, 심지어는 기업이 아닌 함경남도 위생방역소 명의로 생산된 초콜릿 봉지도 발견됐다.
겉으로는 북한 소비재 상품이 다양해지고 포장이 세련되어졌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구조적인 한계가 보인다는 것이 강 교수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사적 욕구나 취향이 생겨난 것은 북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인가.
“변화의 작은 동인이라 할 수 있다. 그 핵심은 장마당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한때 중국으로 수출된 북한산 화장품의 질이 아주 높은 것을 보고 북한 경제가 좋아지고 있구나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그런 고급 제품은 소수 특권층을 제외한 북한 주민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다. 쓰레기로 떠내려온 것을 봐도 그렇고 탈북민에게 물어봐도 그렇다. 인민생활 향상을 그토록 강조하면서 자립경제를 추구하는 것은 모순이다. 인민생활 향상의 손쉽고 빠른 길은 개혁개방으로 국제 무역체제에 편입하는 길이다. 북한 지도자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다. ”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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