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쌓인 모순 뒤엎은 그들 “두번 다시 나라를 그르치지 말자”
[박종인의 땅의 歷史] 296.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 6. 500년 모순을 뒤집은 갑오개혁
갑오개혁의 시작
1894년 7월 13일 조선 정부는 동학 농민군 요구에 항복해 정부 내에 개혁 담당 기관인 ‘교정청’을 설치했다. 고종은 농민 전쟁 원인을 ‘이제껏 미봉책으로 얼버무린 탓에 폐단이 고질로 되어도 고치지 않은 소치’라고 규정했다.(1894년 음6월 11일 ‘고종실록’) 그런데 교정청이 내놓은 개혁안은 ‘탐관오리는 최고형으로 처벌하고’ ‘과다 세금 징수는 금지하고’ ‘불법 징세 또한 금지하는’ 따위(김윤식, ‘속음청사’ 고종31년 음6월16일), 말 그대로 동학 농민군이 요구한 수준의 미봉책에 불과했다. 개혁안 발표 닷새 뒤인 7월 23일 새벽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에 난입했다. 맹렬하게 교전하던 궁궐 수비대 시위대는 일본군에 위협당한 고종 명에 의해 무장해제됐다. 교정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7월 27일 교정청이 폐지되고 일본 지원을 받은 신정부 개혁기구, 군국기무처가 출범했다. 어떤 이는 이 정부를 ‘갑오왜란(甲午倭亂)에 의한 친일정권’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이를 ‘갑오개혁 정부’라고 부른다. 군국기무처가 내놓은 정책들은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개혁들이었다. 조선 왕조 500년을 떠받쳤던 봉건적 질서가 몇 달 사이 공식적으로 파괴됐다. 흥선대원군이 시도했던 개혁이기도 했고, 갑신정변 때 김옥균과 박영효와 서재필이 그렸던 이상이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이 천하를 다투며 전쟁을 벌이는데, 조선에서는 근대와 전근대 사이에서 목숨을 건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 6. 500년 모순을 뒤집은 갑오개혁
조병세의 대경장(大更張)과 김옥균의 부관참시
1894년 5월 8일 동학 처리를 묻는 고종에게 원로대신 조병세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백성들은 입에 풀칠도 할 수 없으니 극히 불쌍합니다. 대경장(大更張)과 대시조(大施措)가 없으면 실효가 없으리이다.”(1894년 음4월 4일 ‘고종실록’)
‘대경장’과 ‘대시조’. ‘크게 고치고 크게 조치하라’는 뜻이다. 농민이 죽창을 깎은 이유는 단순히 돈 몇 푼 쌀 몇 톨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조선이라는 공동체 구성원을 오래도록 억압해온 거대한 모순이며, 그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면 동학 또한 해결되지 않는다는 분석과 경고였다.
이미 10년 전 갑신정변(1884) 때 김옥균 세력이 청산을 선언한 모순들이었다. 갑신정변보다 20년 전 아들 고종 등극(1864)과 함께 대원군 이하응이 10년 동안 실제로 청산 조치를 시행하던 모순들이기도 했다. 대원군은 아들에 의해 10년 만에 추락했다. 김옥균 무리는 48시간 만에 와해됐다. 고종 말대로 그 폐단은 ‘고질로 변해’ 개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질화된 폐단 가운데 하나가 김옥균 암살과 부관참시였다. 1894년 4월 14일, 상해에서 암살당한 김옥균 시신이 서울 양화진에 도착했다. 고종은 신하들 의견을 좇아 그 관을 도끼로 부수고 시신은 토막 내고 칼집을 낸 뒤 전국에 뿌렸다. 조선왕조 마지막 부관참시였다. 5월 31일 고종은 “귀신과 사람의 분이 풀렸다”며 대사면령을 발표했다.(1894년 음 4월 27일 ‘고종실록’) 그해 3월 왕세자 척(坧) 성년식 때 차출됐던 평양 기생들은 다시 서울로 상경해 파티 수발을 들어야 했다.(‘사료 고종시대사’ 18, 1894년 12월)
군국기무처의 혁명적 개혁
그런데 두 달이 채 안 지나 일본을 ‘빽’으로 삼은 개혁파가 정권을 잡은 것이다. 조선을 대륙으로 진출할 섬돌로 삼으려는 일본 야심과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조선 개화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궁정 쿠데타였다.
7월 27일 군국기무처가 정부 내에 설치됐다. 수장은 판중추부사 김홍집이 임명됐다. 김홍집은 영의정을 겸직했다. 이틀 뒤 고종과 전⋅현직 대신들이 합동회의를 열었다. 영의정 김홍집에게 고종이 말했다. “함께 와신상담하여 치욕을 씻자.” 김홍집이 말했다. “성상께서 뜻을 굳게 정하고 분발해야만 편안한 세상으로 바꾸는 성과를 이룩하게 되리이다.”(1894년 음6월 27일 ‘고종실록’)
다음 날 군국기무처가 첫 번째 개혁안(議案·의안)을 제출했다. 주요 의안은 이러했다.
1.중국과 사대 관계를 개정한다 1.신분제를 폐지한다 1. 문무 차별을 폐지한다 1.연좌제를 폐지한다. 1.과부 재혼을 허가한다 1.노비를 철폐한다.
엿새 뒤인 8월 3일 군국기무처 개혁안이 또 나왔다.
1.예산 제도를 도입한다 1.과거를 폐지한다.(1894년 음6월 28일, 7월 3일 ‘고종실록’)
그해 3월 14일 왕세자 성년 기념 과거 시험에는 조선 500년 사상 최다 인원인 23만7299명이 응시했다. 그때 서울 인구는 30만명(추산)이었다.(1894년 음2월 8일 ‘일성록’) 그해 5월 24일 조선 왕조 마지막 과거가 치러졌는데, 그때 합격생 가운데 김옥균 암살자 홍종우가 들어 있었다.(1894년 음4월 20일 ‘고종실록’)
개혁안은 200가지가 넘었다. 하나하나가 충격적이었다. 청일전쟁 직전 급조된 교정청 개혁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500년 동안 봉건 조선이 의심할 여지없이 당연시했던 제도와 관습, 이하응과 김옥균을 좌절시켰던 모순이 일소되고 ‘근대(近代)’라는 새 시간대가 형성될 새 틀이었다.
그리고 개혁안에는 이런 조항이 들어 있었다. ‘국왕은 집무실에 나와서 친히 정사를 결재한다’(1894년 음8월 4일 ‘고종실록’) 나랏돈 함부로 쓰지 말라는 경고와 ‘밤에 등불을 대낮처럼 훤히 밝히고 새벽이 되도록 놀다가 어좌에 누워 잠을 자고 오후 3시나 4시에 일어나던’(황현, ‘매천야록’ 1권 上(1894년 이전)⑥ 20.고종의 연희, 국사편찬위) 고종에게 정상적으로 근무하라는 경고도 포함돼 있었다.
개혁정부의 결기
매천 황현(1855~1910)이 갑오개혁을 본 눈은 객관적이었다.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서) 백성들은 울부짖으며 죽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해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신법이 반포되자 모두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여 서양법을 따르든 일본법을 따르든 다시 태어난 듯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조정에서는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배부르고 따뜻해진 시골 사람들은 태평시대를 즐기고 있었다.’(황현, 앞 책 2권 1894년 ⑦ 22.세법개정)
일본 측 강압이 촉발한 개혁이었다. 개혁이 진행되면 일본 측 이익이 커질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고종-민씨 연합정권이 상실했던 개혁 기회를 또 상실할 수는 없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황현이 이리 덧붙인다. ‘우리를 진정으로 위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병이 나으라고 약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도 어렵다.’(황현, 앞 책 2권 1894년 ② 7.일본군의 남산 포진과 오토리 게이스케의 알현)
총리대신 김홍집은 각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이 이미 구시대 제도를 바꿔버린 소인(小人)이 됐으니 청직한 여론에는 죄를 지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나라를 그르친 소인으로 후세에 죄를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니, 일시의 부귀만 생각하지 말고 각자가 노력하기 바란다.”(황현, 앞 책 2권 1894년 ④ 10. 과거제도 폐지)
박영효의 귀국
개혁정부는 그 자체가 새 시대를 상징했다. 외무협판 김가진, 공무협판 안경수, 한성부윤 권재형 등 군국기무처 핵심 멤버 중 반 정도가 서자였다. 그때까지 30년 고종시대 당상관 이상 고관 375명 중 서얼과 중인 관료는 각각 2명과 1명에 불과했다.(‘신편한국사’ 40,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박훈, ‘한일 역사의 갈림길’, 2022년 2월 4일 ‘동아일보’ 칼럼)
천지가 개벽한 것이다. 그 개벽 중인 천지의 틈새에 마침내 일본에 망명 중이던 갑신정변 주역 박영효가 귀국했다. 11년 만이었다. 8월 31일 비밀리에 귀국해 있던 박영효가 고종에게 복권 요청 상소문을 올렸다. 9월 3일 고종은 박영효를 사면했다. 12월 9일 갑신정변 관련자들이 모두 복권됐다. 12월 17일 박영효는 개혁정부 내부대신에 임명됐다. 철종의 사위, 개화파의 원조격인 박영효가 갑오정부에 동참한 것이다. 일본 망명 시절 박영효는 입헌군주제를 포함한 개혁 방안을 고종에게 공개적으로 상소한 적이 있었다.( ‘박영효 건백서’, ‘일본외교문서’ 21권, p293)
고종의 거친 반동과 허무한 좌절
군국기무처 개혁안을 보고받은 고종은 경악했다. 돈 씀씀이도 제한을 받았고 인사권도 제한을 받았다. 낮에는 사무실에 나와서 근무를 해야 했다! 그해 12월 고종은 개혁 정부가 의안을 낸 지 석 달 만에 “정전에 나가서 정사를 보겠다”고 공식 선언했다.(1894년 음 11월 21일 ‘고종실록’) 하지만 군주권 자체에 대한 제한은 묵과할 수 없었다. 그해 11월 일본 특명전권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고종은 민비와 함께 “군주권은 마음대로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여탈(與奪)하는 권리”라고 주장하던 지도자였다.(이노우에 가오루, ‘내정개혁을 위한 대한정략에 관한 보고’, ‘주한일본공사관기록’ 5권)
이듬해 1월 11일 고종은 의정부 회의를 직접 주재하겠다고 선언하고 하급 관리의 상소를 일절 금지시켰다.(1894년 음 12월 16일 ‘고종실록’) 일체의 여론에 귀를 닫고, 군국기무처 대신 옛 의사결정기관인 의정부를 통해 예전처럼 직접 정치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해 5월 군부대신 조희연 인사 문제를 두고 개혁 정부 내 분열이 생기자 고종이 이리 말했다. “군주가 대신 하나 해임 못하면 그게 군주냐? 그냥 공화국을 만들어라.”(‘주한일본공사관기록’ 7권 1.기밀본성왕래 1~4 (16)조 군부대신 진퇴 문제로 내각이 붕괴될 지경에 이른 건 1895년 5월 22일) 어새를 집어던지며 고함지르는 군주 앞에서 내각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난 6월 25일 고종이 내각에 통보했다.
“작년 6월 이후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일본외교문서’ 28권 1책, p444~445, 7.조선 국내정 개혁에 관한 건 301.왕궁 호위병 교대에 관한 국왕과 내각 충돌보고 1895년 6월 26일)
권력은 이미 동력을 잃은 개혁 정부로부터 고종에게 역류하기 시작했다. 1년 뒤 고종은 개혁 정부에 의해 유배형을 당했던 여흥 민씨 일당을 모두 사면하고 석방했다. 갑오개혁 정부, 역사적으로는 대원군과 김옥균이 뿌렸던 씨앗은 그렇게 싹이 트자마자 죽어갔다.
500년 모순을 붕괴시키기에는 저항이 너무도 거셌다. 그 사이 김옥균은 죽어서 귀국했고 동지 박영효는 제 발로 돌아왔다. 시대를 이끌었던 대원군 이하응은 갑오개혁 이후 완전히 정계를 은퇴했다. 조각난 김옥균은 일본과 한국 아산에 그 유택이 나뉘어 있다. 복잡한 경로를 거쳐 식민시대에 죽은 박영효는 부산에 묻혔다가 개발 물결에 밀려 지금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대원군 또한 별장이 있던 서울 만리동에 묻혔다가 파주로 이장된 뒤 남양주로 재이장됐다. 조선은 한참을 더 격랑 속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고, 혁명가들은 그렇게 쓸쓸하게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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