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요망한 이단 서적은 일절 수입을 금하고 모두 불태우라” - 정조
297. 조선 학문의 종말 선언① 1786년 병오소회(丙午所懷)
* 유튜브 https://youtu.be/iNnpIT9q55A 에서 동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관광객 홍대용의 북경 여행
1766년 서울 북촌에 사는 노론 부잣집 사내 홍대용이 작은아버지 홍억을 따라 북경 유람을 떠났다. 유리창(琉璃廠) 서점가에서 눈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많은 책도 구경했다. 북경 사방에 산이 없어서 좌청룡 우백호 따위 분간이 필요 없음도 보았다. 신문물이 가득한 북경이었지만 홍대용을 섬뜩하게 만든 사건은 숙소 부엌에 벌어진 화재(火災)였다.
화재 진압 후 역관들이 말했다. “중국 사람들은 한 집에 불이 나면 옆집을 헐어내어 불이 더 번지지 못하도록 할 뿐이니 어리석다.” 홍대용이 농담을 던졌다. “북벌을 할 때 불로 공격을 한다면 힘들이지 않고 평정할 수 있겠다.” 그러자 한 역관이 이의를 제기했다. “언젠가 정양문 문루에 불이 났는데, 물차 10여 대로 비 쏟아지듯 물을 뿌려 댔다. 잠깐 사이 불이 꺼졌다. 이런 교묘한 기계가 있는데 화공(火攻)을 겁낼까?”(이상 홍대용, ‘담헌서’ 외집 8, ‘연기(燕記)’ 경성기략(京城記略)) 물차? 듣지도 보지도 못했고 생각도 못한 기계였다. 홍대용이 말했다. “오랑캐 땅은 군자가 밟을 바 아니라고? 편협하다.”(홍대용, ‘을병연행록’ 1765년 음11월 2일) 북벌 대의론을 붙들고 청을 오랑캐로 여겼던 노론 명문가 청년 홍대용은 귀국 후 ‘청나라를 배우자’는 북학파 거두가 됐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조선 지식인 사회도 변하고 있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97. 조선 학문의 종말 선언① 1786년 병오소회(丙午所懷)
국왕 정조가 배운 청나라 ‘질서’
조선 22대 국왕 정조가 즉위하고 1년 뒤 창덕궁 인정전 앞뜰에 품계석이 설치됐다. 그때까지 조선 궁궐에는 품계석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조는 “인정전 앞뜰에 서열이 문란하니 돌을 세우고 이에 맞춰 줄을 서라.”(1777년 음9월 6일 ‘일성록’) 품계석 설치 아이디어는 중국에서 나왔다. 정조가 이리 덧붙였다. “내가 중국의 예에 따라(予欲依中原例·여욕의중원예) 돌을 세워 표시하려고 한다.” 세자 시절부터 연행사들로부터 보고받은 내용 가운데 ‘질서를 잡는’ 표석이 청으로부터 그가 배우려 한 첫 번째 문화였다.
9년이 지났다. 1786년 정월 어느 날 정조가 창덕궁 인정문에서 문무 관리들로부터 신년 국정개혁안을 보고받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보고서를 제출한 사람은 324명이었고 제출된 안건은 500건이 넘었다. 목축과 세금에서 무역과 학문에 이르기까지 숱한 개혁안이 쏟아졌다. ‘병오소회(丙午所懷)’라 이름 붙은 개혁안은 훗날 병오소회등록(丙午所懷謄錄)이라는 책으로 편찬됐다. 그날 학문에 관해서 정조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중국으로부터 요망한 서양 서적 수입을 금하고 중국인과 학문 교류 또한 금한다.” 병오년 음력 1월 22일, 조선 땅에서 학문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개혁안을 제출하라”
18세기 후반은 세계적인 변혁기였다. 중국은 건륭제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청나라 전성기를 이끌고 있었다. 극동 일본은 네덜란드, 포르투갈과 교류하며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륙을 통해 조선에도 유럽 지식과 정보가 유입됐다. 그 가운데 근대 과학이 있었고 조선인이 서학(西學)이라고 부르는 유럽 종교 기독교가 있었다.
지구상 모든 변화는 새로운 정보와 사상에서 나온다. 정조시대는 그 변화가 가장 필요했던 시대였고, 변화를 위한 외부 학문이 진입 준비를 완료한 시대였다. 1786년 음력 1월 17일 재위 10년째를 맞은 국왕 정조가 문무백관으로부터 변화를 위한 보고서 제출을 명했다. 그리고 닷새 뒤 보고회가 열렸다. 보고는 구두(口頭)와 서면 두 방식으로 진행됐다. 추운 겨울날 아침, 그 지도자가 새 시대를 위한 개혁안을 보고받고 하나하나 일일이 품평을 하며 채택 여부를 결정했다.
회의는 신중하고 격렬했다. ‘이 큰 아침 조회에 승지들 일 처리가 엉망’(사간원 정언 이우진)이라는 사소한 고자질부터 ‘호적을 재정비하자’(형조판서 조시준)는 제안까지 다양했다. 정조는 “토지 측량을 똑바로 해야 한다”는 호조좌랑 이의일의 서면보고에는 “진부한 몇 마디 말로 때우려 하지 말라”고 타박을 하는가 하면 “군정을 잘 닦자”는 부호군 이명운 보고서에는 “어쩌면 이렇게도 진부한가”하고 놀라기도 했다. 하도 타박이 잦자 부사직 윤승렬이 “진부한 말 중에 묘한 이치가 있는 법”이라며 잘 들어보시라고 권유할 정도였다.(1786년 음 1월 22일 ‘일성록’)
하지만 마음에 맞는 개혁안이 나오면 정조는 그 즉시 채택해 정책화를 약속했다. 정조는 스스로 군주이자 스승(君師·군사)이요 훗날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만 갈래 강을 비추는 달의 주인 되는 늙은이)’이라 자부한 지도자였다.
불발된 박제가 보고서 - 교류와 개방
북학파 관료 박제가 또한 보고서를 올렸다. 박제가는 1778년 북경 여행을 통해 근대 문물에 눈을 뜬 실용주의 학자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지금 나라의 큰 폐단은 가난이다. 다른 나라는 사치로 인하여 망한다지만 우리나라는 반드시 검소함으로 인하여 쇠퇴할 것이다. 비단옷을 입지 않아 비단 짜는 기계가 없으니 여인들은 일이 끊겼다. 물이 새는 배를 타고 목욕시키지 않은 말을 타고 찌그러진 그릇에 담긴 밥을 먹고 진흙더미 집에서 지내니 온갖 제조업이 끊겼다. ‘세상이 나빠져서 백성이 가난하다’고 하는데, 이는 나라가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박제가는 그 대책으로 ‘중국과 통상을 하고’ ‘서양인을 고용해 기술을 익히고’ ‘사대부에게 장사를 허용하자’고 주장했다. “일본과 티베트, 자바섬과 몽골까지 전쟁이 사라진 지 200년이 됐으니 나라를 잘 정비하면 10년 뒤 조선왕국 거적때기 초가집은 화려한 누각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측했다.
통상을 허용하고 상공업을 진흥하라는 제안에 ‘만천명월주인옹’ 정조는 시큰둥했다. “그대의 식견과 뜻을 또한 볼 수 있다”고 했을 뿐이다. 분을 참지 못한 박제가는 그 제안을 그해 자기 책 ‘북학의(北學議)’에 실었다.
채택된 보고서 – 금지와 규제
그 명민한 지도자 눈과 귀를 틔워 준 보고가 몇 개 있었는데, 바로 학문에 관한 보고들이었다.
사헌부 수장 대사헌 김이소가 보고했다. “북경에서 사오는 책들은 우리 유가의 글이 아니고 대부분 부정한 서적이다. 이를 금하지 않으면 심술을 어그러뜨리고 세도에 끼치는 해가 끝이 있겠는가. 의주 국경에서 책 수입을 수색하고 적발되면 의주 부윤까지 처벌하시라.” 정조는 “매우 좋으니 아뢴 대로 하겠다”며 즉각 의정부에 입법을 지시하고 평안도에 대책회의를 명했다.
사간원 수장 대사간 심풍지가 보고했다. “정월 초하루에 일식(日蝕)이 발생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기강이 없고 귀천이 없어서이다. 중국에 간 사신들이 그 나라 사람들과 만나고 편지와 선물을 주고받는다.” 서학(西學)이 사회문제가 되던 때였다. 심풍지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문물이 기강 문란의 원인이니 이를 금하라는 것이다. 정조가 바로 답을 내렸다. “금지할 뿐만 아니라 새로 처벌 방안을 마련하라.”
짙어지는 암흑, 죽어가는 학문
서적 수입 및 인적 교류 금지 조치는 그 자리에서 비변사에 의해 법령으로 공식화됐다. ‘중국 사람들과 개인적 왕래 금지’ ‘필담 금지’ ‘선물 및 편지 금지’ ‘적발 시 압록강 도강 후 처벌’ ‘요망한 이단 서적 수입 금지 및 적발 시 분서(焚書)’ 그리고 ‘적발 실패한 의주 부윤은 처벌’.
박제가가 제안한 통상과 교류는 전면 부정됐다. ‘성리학적 기강을 문란케 하는’ 모든 학문 서적은 금지됐다.
이듬해 가을 이 금지령이 구체화됐다. 범법자는 즉시 조선으로 압송해 장을 치고 상관도 연좌시키고 책은 불태우며 이를 감독하지 못한 서장관은 의주에 유배를 보낸다는 처벌 조항이 삽입됐다.(1787년 음10월 10일 ‘정조실록’)
5년이 지난 1792년, 이번에는 중국 서적 일체에 대해 수입 금지령이 떨어졌다. 정조가 이리 말했다. “질기고 글자도 큰 조선 책을 두고 왜 얇고 글씨 작은 중국책을 보는가. ‘누워서 보기 편하기 때문’ 아닌가. 이게 어찌 성인 말씀에 대한 도리인가.” 아예 이단의 유입 통로를 끊겠다는 뜻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요즘 선비들 글은 내용이 빈약하고 기교만 부려 옛사람 체취는 없이 조급하고 경박하여 평온한 세상 문장 같지 않다. 낡은 문체를 완전히 고치고(頓革舊體·돈혁구체) 금하라.”(1792년 음10월 19일 ‘정조실록’)
‘돈혁구체(頓革舊體)’. 당시 유행하던 천박한 청나라 문체를 완전히 뜯어고치겠다는 선언이었다. 중종반정, 인조반정에 이어 조선 정신세계를 뒤집어엎겠다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서막이었다.
그가 즉위 이듬해 품계석을 설치하며 질서를 강조했던 왕, 정조다. 그 지도자가 10년 만인 1786년 ‘병오소회’로 학문 통제를 본격 가동시키더니 이제 지식사회를 자기 달빛 아래 가두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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