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에만 살아나는 감흥이 있다. 빗줄기에 가려진 시야, 부스스하게 고부라진 머리칼, 빗방울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 습기 찬 표면을 만지는 촉감 등등이 낭만과 현실 모드 중 어느 쪽으로 풀릴지 모른다. 부슬부슬 봄비가 오는 창 밖 풍경은 유난히 한적하고 여유로워서 집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도 잔잔한 음악처럼 들린다.
촉촉한 공기 때문인지 손에 닿는 것마다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런데 오늘따라 전화벨 소리가 날카롭게 울린다. 급하게 뛰어 나선 길은 교통체증으로 꽉 막혔고 웅웅거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계단이 젖어서 미끄러지다 겨우 중심을 잡는다. 날씨는 달라진 게 없는데 마음이 널을 뛴다. 높은 습도와 낮은 기압이 수시로 달라지는 감각의 변주를 만들어낸다.
김대수 작가는 오랫동안 세밀하고 풍부한 디테일을 지닌 흑백 풍경사진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나무, 숲, 하늘, 구름과 같은 자연 풍경을 주로 담고 있다. 자연은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예술가가 다루었고 셀 수 없이 많은 애호가에게 평가받아온 예술의 소재이다. 이쯤 되면 보통 야심 찬 예술가가 아니고는 이 판에 도전장을 내밀기 쉽지 않다. 자연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데, 아름다운 풍경보다 더 특별한 사진을 만들어야 하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아름다운 석양을 만나면 누구라도 카메라를 들 수 있는 시절이다. 결국 자연 풍경을 찍은 사진으로 남다른 완성도를 추구하려면 누구보다도 더 많이, 더 오래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희특한’(희한하고 특별한) 것만이 살아남는 시대라고 하지만, 풍경의 예술은 때론 평범한 어느 날의 비처럼 우리의 감각을 자극한다. 김대수 작가의 사진이 귀한 것은 지금껏 보지 못한 것을 보여 주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익숙하게 보아온 것들을 더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힘이 거기에 있다. 빗방울이 떨어져 동심원을 만들며 퍼져 나가는 표면, 흔들리며 번지는 물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일렁인다. 나는 분명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데, 머리 위 나무와 하늘이 물 위에 비쳐 내린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하늘이 거기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참 좋다.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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