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떼고 ‘인민’을 붙이면 어떻게 될까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22회>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이 투표 통해 정권을 만들고 교체하는 선거 민주주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대한민국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삭제되고 대신 “민주주의”가 삽입됐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알레르기적 반감이 작용한 듯한데, 이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개념 자체를 정확히 알지 못해 생겨난 무익하고 부조리한 논란일 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화자(話者)의 의도, 정치적 목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여러 의미로 혼용되어온 다의적 개념이다. 상식적으로 중·고생 교과서에 정확하고 구체적인 개념 대신 불명료하고 애매한 개념을 사용할 수는 없다. 한국사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삭제하자는 주장은 북한의 역사 교과서에서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삭제하고 “민주주의공화국”만 쓰자는 주장만큼이나 어불성설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개인의 기본권, 정부의 권력분립, 대의제 민주주의의 절차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정교한 이론 체계이다. 자유주의 헌법에 따라 운영되는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입헌 민주주의(constitutional democracy)”라고도 불리는데,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등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은 물론 국가 간섭을 최소화한 자유방임주의 국가까지도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에 들어간다.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는 참정권을 부여받은 국민 개개인이 투표를 통해 정권을 창출하고, 또 그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선거 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를 채택한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성립될 때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사실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체제라는 사실만큼이나 명확한 팩트(fact)다. 중국현대사를 기술할 때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삭제할 수 없듯,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술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절대로 삭제될 수 없는 용어다. 중·고교 교과서라면 더더욱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적 질서가 확립되는 과정을 정확하게 드러내야 한다. 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교과서는 위헌적 불량품이기 때문이다.
인민민주주의는 ‘인민’이 ‘인민의 적’에게 독재하는 체제...자유민주주의와 양립 불가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상극(相克)의 체제다. 1940년 1월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이라는 글에서 세 가지 민주주의를 논했다. 그는 구미 자본주의 국가의 민주주의는 자산계급의 독재를 합리화하는 “구(舊)민주주의”라고 혹평했다. 반면 구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미 발달한 사회주의 공화국의 민주주의라고 극찬했지만, 당시 중국이 일본과 국민당이 분할 점령하고 있는 “반(半)식민지, 반(半)봉건”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에 소련식 사회주의 공화국이 바로 성립될 순 없다고 보았다. 마오쩌둥은 제3의 길로서 노동자, 농민, 좌파 지식인, 및 소자산자의 계급적 연대에 기초한 “신(新)민주주의”를 제창했다. 1940년대 10년 동안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은 중국식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적 청사진이 되었다.
1940년 당시 마오쩌둥은 앞으로 건립할 사회주의 공화국의 이름을 “중화민주공화국”이라 했다. 9년 후 중화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후, 중국공산당은 새 나라의 국명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개칭했다. 공화국 속에 이미 민주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는 학자들의 지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 당시 마오쩌둥이 이미 “인민민주독재”의 이론을 정립했다.
마오쩌둥에 따르면, “인민민주주의”는 중국공산당 영도 아래서 “인민” 계급이 “인민의 적”에 대해 독재를 행사하는 전제적 시스템이다. “인민민주독재” 아래선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지난 70여년 간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요지부동의 기본 전제로 삼아왔다. 시진핑 역시 집권 초기부터 중국의 인민을 향해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유혹을 물리치라고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가령 2019년 3월 시진핑은 중공중앙의 기관지 <구시(求是)>지에 실린 글에서 “서구식 헌정(憲政), 삼권분립, 사법독립”의 길을 갈 수는 없음을 강조했다. 중국식 “인민민주주의”가 구미식 “자유민주주의”와 절대로 양립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29세 전기공 웨이징성, 선거 민주주의 담은 대자보 내걸고 15년형 받아
1978년 12월 5일 베이징 동물원의 전기공 웨이징성(魏京生, 1950-)은 베이징 시단(西單) 민주장(民主墻, 민주의 벽)에 “제5의 현대화: 민주와 그 외”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써서 붙였다. 웨이징성이 말한 “제5의 현대화”란 다름 아닌 “민주화”를 의미했다. 1960년대부터 중국공산당은 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 네 분야에서 이른바 “4대 현대화”를 내걸어왔다. 이에 맞서 웨이징성은 “민주화”야 말로 현대화의 급선무라 주장했다.
지난 주 살펴 봤듯, 웨이징성은 18년의 세월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은 친청(秦城) 감옥에서 정치범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베이징시 제1중급 인민법원”은 왜 왜 일개 전기공에 불과한 스물아홉 살 청년이 기껏 대자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반혁명죄”를 걸어 15년 형을 언도해야 했을까? 바로 웨이징성이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를 부르짖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명료하고 강력한 문장으로 인민이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를 통해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구미식 선거 민주주의의 도입을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이 그러한 “과격한” 주장을 그대로 방치할 리 만무했다.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의 각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중국 통일의 주체였다. 중국공산당이 막강한 군사력을 견지하고 있는 한, 그 어떤 조직도 정권교체를 꿈꿀 수 없다. 1949년 중화대륙을 통일한 중국공산당은 “인민민주독재”의 이념을 통해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의 길을 완벽하게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시진핑이 말하는 민주란? 독재권력의 대민 지배를 전제...민주의 주체는 중국공산당
놀랍게도 35년 지난 2013년 이래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은 “제5의 현대화”라는 과거 웨이징성이 외쳤던 구호를 그대로 차용해서 쓰고 있다. 웨이징성에게 “제5의 현대화”는 “민주화”였지만, 시진핑이 부르짖는 “제5의 현대화”는 “국가 치리(治理) 체계와 치리 능력의 현대화”를 의미한다. 영어로는 흔히 거버넌스(governance)라 번역되는 치리의 본뜻은 “다스리다,” “질서를 바로 잡다” 정도의 의미다. 최고권력자가 “정치범”의 표현을 표절하면서 “제5의 현대화”의 원의를 “민주”에서 “압제”로 바꿔치기 했다! 오늘날 중국의 현실을 보면, 그 함의가 어렵잖게 파악된다. 바로 QR코드, 바이오 메트릭스, 홍채인식,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최첨단의 디지털 감시체제를 이용한 대민(對民) 통제의 강화라 할 수 있다.
물론 시진핑도 틈만 나면 “민주(民主)”를 강조한다. 시진핑 정권에서 강조해온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12가지 중에서 “민주”는 “부강(富强)”에 이어 제2의 가치이다. 과연 어떻게 공산당 일당독재의 나라 중국의 최고권력자가 “민주”를 외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독재자치고 “민주” 팔이를 안 한 사례가 별로 없다. 레닌,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등, 20세기 전체주의 정권의 좌우파 독재자는 모두 “민주”를 강력한 장기집권의 명분으로 삼았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자 페리(Elizabeth J. Perry)의 분석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에서 “민주”는 흔히 “인민주의적(populist)” 개념으로 사용된다. 시진핑 집권 초기 중국의 사회의식 조사를 보면, 85%의 중국인들은 “민주”가 “정부의 지도자들에 의한 인민을 위한 통치”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때의 “민주”란 유권자가 직접, 비밀, 보통 선거를 통해 권력을 창출하고 교체하는 근대 구미 사회의 선거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계몽주의 이후 입헌 민주주의는 경쟁적 선거, 다수결주의, 국가권력 제한을 명시한 자유주의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민주주의(populist democracy)”는 21세기 현대 민주주주의 국가의 “선거 민주주의”와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독재 권력의 하향적 대민(對民) 지배를 전제하지만, 후자는 국민 참여에 따른 상향적 민주 권력의 창출과 교체를 핵심으로 삼는다. 결국 중국공산당이 부르짖는 “민주”란 “백성을 어엿비 여기고 백성을 위하는” 전통시대 군주의 위민(爲民) 통치의 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의 주체는 중국 인민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다.
그렇다고 모든 중국인들이 “인민주의적 민주” 개념에 포박당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위의 조사에 따르면 적어도 15%의 중국인들은 “정기적인 선거를 통한 국가 지도자의 선출”을 “민주”의 본뜻이라 생각하고 있다. 2013년 조사에 따르면, “중국이 선거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61%는 부정적 답변을 했다. 적어도 39%는 미국식 “선거 민주주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언제든 제2의 웨이징성이 다시 나와서 민주적 직선제를 통한 정권 교체를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톈안먼 민주 운동과 구소련 붕괴로 이어진 웨이징성의 민주장 운동
1979년 3월 덩샤오핑을 정조준해서 “민주”의 직격탄을 쏜 웨이징성과 <<탐색>>지 동인들의 결정은 기름통을 들고 불길로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40년이 지나 웨이징성은 그날 자신이 써붙였던 “민주냐, 새로운 독재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평했다.
“예상대로 우리들이 모두 체포되자 커다란 풍파가 일어났다. 덩샤오핑은 부득불 잠시 민주화 체포를 잠시 정지할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민주장은 1년 간 더 지속됐다. 우리들의 체포가 변곡점이 되어 민주장에선 큰 변화가 일어났다. 민간 간행물 편집위원 류칭(劉靑, 1946?- )과 저명한 시인 베이다오(北島, 1949- )를 위시한 운동가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다. 당내 각급의 개혁적 간부들이 덩샤오핑의 정치적 탄압을 비판했다. 그 결과 당내에는 덩샤오핑 독재를 비판하는 반대파가 결집되었다.
웨이징성은 베이징 민주장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1979년 민주장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중국 밖 여러 나라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새롭게 일어났다. 타이완, 파리, 프라하, 바르샤바, 모스크바 등지로 민주의 열풍이 번져갔다.”
1979년 12월 10일 타이완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메이리다오(美麗島)사건’이 발생했다. 웨이징성의 지적대로 “베이징의 봄”은 타이완 민주화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타이완 민주진보당 전 주석 스밍더(施明德, 1941- )는 스스로 베이징 민주장운동에 자극을 받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덩샤오핑의 강경 진압으로 민주장운동은 중단되었지만, 민주를 향한 중국 인민의 열망을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1986년 봄 다시 민주의 싹이 돋아나 그해 말 대학가에선 대규모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3년 후엔 1989년 4-6월 톈안먼 민주운동으로 만개했다. 톈안먼 민주운동은 비록 탱크 부대에 짓밟혀 무지몽매한 대학살극이 벌어졌지만, 베이징의 봄은 결국 구소련과 동구 공산당 체제를 붕괴를 예고했다. 웨이징성은 말하듯, “베이징 민주운동은 전 지구적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킨 위대한 공헌을 했다.” <계속>
'송재윤의 슬픈 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력 교체기 신·구 정권의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의 결과는? (0) | 2022.05.02 |
---|---|
국민 통합, 누구나 똑같이 ‘법의 지배’ 받을 때 가능하다 (0) | 2022.05.02 |
‘1948년 정부’가 대한민국 첫 민주정부다 [朝鮮칼럼 The Column] (0) | 2022.05.02 |
“서로 못 믿는 중국과 러시아...두 나라는 결코 동맹국이 될 수 없다” (0) | 2022.05.02 |
최고 권력자가 사라진 후...숨막히는 권력투쟁의 시작 (0) | 2022.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