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권력 교체기 신·구 정권의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의 결과는?

bindol 2022. 5. 2. 04:49

권력 교체기 신·구 정권의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의 결과는?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2.03.26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24회>

<199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50주년을 맞아 사후 2년 된 덩샤오핑의 초상화를 실은 트럭이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린 톈안먼 앞을 지나고 있다. 사진/Robyn Beck >

신권력과 구권력의 대립...법의 칼날은 어디로?

권력 교체기 신·구정권의 정치투쟁은 세계정치사에 흔한 현상이다. 내전 끝에 군사적으로 집권한 경우는 물론,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될 때도 신·구정권이 격렬하게 대립하고 충돌한다. 정치인들은 거대 명분을 들먹이지만, 투쟁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적나라한 권력욕일 경우가 허다하다.

구정권 실세들은 권력의 맛에 취해 있다가 물러나는 자들이다. 신정권의 실세들은 잃었던 권력을 되찾았거나 권력 맛을 처음 본 자들이다. 모두 강렬한 권력욕을 갖고 있기에 양자의 싸움은 “죽느냐, 죽이느냐”의 서바이벌 게임이 된다. 평범한 사람들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위험한 싸움에 날아드는 부나방이 왜 그리도 많을까? 키신저(Henry Kissinger, 1923- )는 “권력이 궁극의 최음제”라 말한 바 있다. 진정 인간에게 권력은 섹스 이상의 쾌감을 주고, 그 중독성은 마약보다 강한가? 바이킹의 속담처럼 “권력은 최악의 인간을 유혹하고, 최고의 인격체도 타락시킨다.”

권력에 취해 있던 자들은 권력을 잃게 되면 썩은 칼자루 붙들 듯 권병(權柄)을 쥐고 허망하게 휘둘러댄다. 그 모습이 자못 위협적이지만, 패배한 권력 집단의 병적인 집착은 추레하고 덧없다. 바로 그들이 전 정권을 파괴할 때 사용했던 법의 칼날이 이제 그들의 심장으로 향하고 있다. 권력의 생리상 신권력은 구권력의 잘못을 파헤치고 처벌할 수밖에 없다. 구정권의 부패상이 드러날수록 신정권의 정당성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한비자(韓非子)는 군왕에게 “초법엄형(峭法嚴刑)”을 간했다. “현명한 군주는 법을 준엄하게 하고 형벌을 엄하게 할 뿐,” 정치적 계산으로 비리를 덮거나 얄팍한 거래로 범죄를 묵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정권교체기 신·구권력의 정치투쟁은 불가피할뿐더러 바람직하다. 신정권은 구정권의 부정과 비리를 철저하게 수사하고 엄중하게 단죄해야만 스스로 부패의 늪지대를 비껴갈 수 있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가 간파했듯, 오로지 권력만이 권력을 억제한다.

<1980년 재판 중인 마오쩌둥의 부인, 4인방의 영수 장칭(江靑, 1914-1991). 사진/공공부문>

이탈리아 공산주의 이론가 그람시의 문화 패권과 진지전

19세기 중반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 계급 갈등이 첨예화되어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고 예언했다. 20세기 초반 구미의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르크스의 호언장담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1926년 이탈리아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 정권에 체포된 36세의 공산주의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감옥의 철창 안에서 당시 서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마르크스가 예언했던 계급혁명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했다.

고민 끝에 그람시는 부르주아지가 교육제도, 종교기관, 문화예술, 언론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무산계급의 상식(常識, common sense)까지 강력하게 지배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간파했다. 그람시의 관찰에 따르면, 당시 구미 자본주의 사회는 이미 군·경의 폭력 대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대중매체를 활용해 무산계급의 동의를 얻는 고도화된 지배 단계에 들어섰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그 당시 부르주아 계급은 문화 패권(覇權, 헤게모니)을 장악하고 있었다. 덕분에 노동자·농민들이 부르주아지에 이념적으로 동화된 상태였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 노트” 사진/wikiwand>

그람시에 따르면, 구미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미 군사적 기동전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한 상태였고, 유일한 혁명의 전략은 지배계급의 문화 패권을 잠식하는 장기적인 진지전(war of position)의 지속적 확산이었다. 권력은 이미 교육, 문화·예술, 사회 각계 각 분야의 수많은 진지(陣地)들에 폭넓게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거시적 맥락에서 계급혁명의 필연성을 강조했지만, 그람시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식, 문화, 사상, 가치관, 세계관, 종교 관념까지 파고드는 이념 투쟁이야말로 사회주의 혁명의 전초전이라 여겼다.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의 동력을 “물적 토대”에서 찾았지만, 그람시는 계급혁명의 도화선이 “상부구조”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좌·우파 어느 쪽이든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려면 그람시의 혁명 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론대로 현대국가의 정치권력은 군·경이 독점한 폭력보다 다수 군중을 동원하고 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문화 패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해도 문화 패권을 장악하지 못하면, 결국 절대로 권력을 유지할 수가 없다. 문화 패권의 장악을 위해선 전 사회 각계각층에 퍼져 있는 수많은 진지를 하나씩 접수해야만 한다. 물러나는 구정권이 마지막 순간까지 같은 편의 이념적 동지들을 정부 기관의 요직에 심어놓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잃었다 해도 문화 패권의 진지를 견지하는 한 사회 권력의 전면적 이동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오쩌둥, 문화의 정치적 파괴력 인식...사상 개조 문화혁명 추진

그람시보다 2년 늦게 태어난 마오쩌둥이 직접적으로 그람시의 이론에 탐닉했던 증거는 없다. 마오쩌둥이 중공의 영도자로 부상하던 1930년대 내내 그람시는 감방에서 30여 권의 노트에 깨알 같은 글씨로 자신의 혁명 이론을 집필하고 있었다. 상호교류가 없었음에도 두 사람은 동시에 교조적인 마르크시즘을 탈피해서 인간 의식의 자립성과 사상·문화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람시는 중국의 현실을 깊이 탐구하지 않았지만, 그람시의 진지전은 중국의 현실에도 기막히게 들어맞는다. 국민당과의 투쟁에서 군사적 열세에 몰려 있었던 중국공산당은 다수 대중, 특히 젊은 지식분자들의 마음을 훔치는 선전·선동전에서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했다. 그람시와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은 분명히 문화의 정치적 파괴력을 잘 알고 있었다. 1940년대 옌안 시절부터 마오쩌둥은 30년의 세월 동안 대중의 사상을 개조하는 문화혁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1981년 6월 27일 중공 중앙위원회는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화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의 정치적 동기를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 테제로 정리해서 설명했다.

“마오쩌둥 동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1) 일군의 자산계급의 대표적 인물들과 반혁명적 수정주의 분자들이 이미 당과 정부와 군과 문화 영역의 각 분야에 섞여들었다. 2) 그 결과 상당히 큰 규모의 다수 단위의 주도권이 이미 마르크스주의자 및 인민 군중의 손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다. 3) 이미 당 내부에는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권파가 중앙에 자산계급의 사령부를 형성해 놓았다. 4) 이들은 수정주의 정부 노선과 조직노선을 결성하고, 각 성, 시, 자치구와 중앙의 각 부문에 그들의 대리인을 심어놓았다. 5) 과거의 각종 투쟁은 모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6) 오직 문화대혁명을 실행하여서 공개적으로, 전면적으로, 아래로부터 광대한 군중이 이 어두운 면을 폭로해야만 비로소 주자파가 찬탈한 권력을 되찾아올 수 있다. 7) 이는 실질적으로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뒤엎는 정치 대혁명이다. 8) 이후에도 이러한 정치 대혁명은 여러 차례 계속되어야만 한다.” (번호는 필자가 추가)

<“마오 주석의 혁명 문예 노선을 따라서 승리하고 전진하자!” 문화혁명 당시의 포스터. 공공부문>

중공 중앙위원회의 이러한 분석은 문혁 초기 반포됐던 강령성 문건에 분명하게 명시돼 있던 내용이었다. 1960년대 중반 중국의 상황을 돌아보면, 외견상 중국공산당은 전국에 촘촘한 네트워크의 정부 시스템을 구축하고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마오쩌둥은 히스테릭하게도 중앙과 지방의 정부 조직이 이미 “자산계급과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정부 내 핵심 진지들을 빼앗겼다 해도 그람시가 말한 문화 패권은 온전히 마오쩌둥이 장악하고 있었다. 1949년 건국 후 17년의 세월 동안 그는 놀라운 이념적 마력을 발휘하여 젊은 세대의 마음을 완벽하게 훔쳤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한 마디로 전국에서 일사불란하게 수백만 명의 홍위병들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실로 광폭한 대중 동원력을 발휘했다. 요컨대 마오쩌둥은 그람시가 말했던 “문화 패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기에 “문화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반면 일시적으로 국가의 행정력을 장악했던 중공 중앙의 당권파들은 “문화 패권”을 갖지 못했기에 추풍낙엽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문화 패권을 갖지 못한 덩샤오핑, 상충되는 목표를 절충하고 봉합

1978년에서 1980년 사이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과오(過誤)를 지적하고, 정부 내의 과도한 권력 집중을 비판했다. 덩샤오핑은 그러나 마오쩌둥의 권위를 넘어서는 문화 패권을 갖고 있진 못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으로 무장한 당내의 보수파들은 틈만 나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문화혁명이 종언을 고한지 불과 3~4년 지난 시점에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권위를 파괴하는 정치적 스턴트를 할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도 문화 패권은 여전히 죽은 마오쩌둥의 쥐고 있었다.

1979년 3월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장(民主墻) 운동”을 짓밟은 덩샤오핑은 “4항 기본원칙”을 발표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의 길,” “무산계급 독재,” “중국공산당의 영도,” “마르스크-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등 네 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한다는 중공중앙의 공식 노선으로 정립되었다. 상식적으로 “개혁개방”과 “4항 기본원칙”은 이율배반(二律背反)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민간의 기업활동을 허용하는 제도의 개혁이 “사회주의의 길”일 수는 없다. “무산계급독재”가 부르주아 기업가의 등장을 용인할 수도 없다. 개혁개방은 실질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무력화하는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혁이었다. 그럼에도 덩샤오핑은 상이한 원칙을 두리뭉실 “절충”하고 상충되는 목표를 적당히 “봉합”하는 특유의 모순어법으로 개혁개방의 물꼬를 텄다.

<1984년 덩샤오핑 (중앙), 후야오방 (오른쪽), 자오쯔양 (왼쪽). 사진/공공부문>

2년 동안 당내 보수파와의 권력투쟁을 거쳐 1978년 12월 최고영도자로 선출된 덩샤오핑은 당내의 개혁파를 규합하여 개혁개방의 시대를 열었다. 1980년 2월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에 선임되었고, 중앙서기처의 총서기를 겸직했다. 중앙서기처는 국가 기밀과 주요 정보가 집결되는 중공중앙의 핵심기관이다. 본래 1966년까지 덩샤오핑이 중앙서기처의 총서기로 활약했는데, 마오쩌둥은 중앙권력의 독점을 위해 덩샤오핑을 축출한 후 중앙서기처를 해체했다.

1980년 덩샤오핑은 14년 만에 중앙서기처를 복원시킨 후, 후야오방을 수장으로 앉히는 한편, “정치 스타”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을 정치국 상임위원으로 발탁해서 곧 국무원 총리로 임명했다. 1982년부터 후야오방은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되어 당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1980년대 개혁개방의 구심점이 된 덩-후-자오 체제가 갖춰지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