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기계로 갈아낸 듯 매끈… 1300여 년 흘러도 우아함 뽐내요
입력 : 2022.05.05 03:30
좋은 돌을 찾아 운반하기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석재(石材)가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하는데요. 그중 화강암이 가장 많아요. 쓰임새에 맞는 적당한 돌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암반에서 원석을 떼는 '채석'(採石) 작업이 필요해요. 채석 기술은 청동기시대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돌을 떼어내던 방법에서부터 발전해 왔어요. 고인돌 덮개돌은 무게가 수십톤에 달하는데, 이처럼 커다란 석재를 채석하기 위해 망치로 바위에 쐐기 구멍을 뚫은 다음 그 안에 나무쐐기 같은 것을 박아 두드리거나, 나무가 부풀어오를 때까지 물을 붓는 방법을 썼지요.
백제 때도 채석은 어려운 작업이었어요. 그래서 암석의 강도나 석질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장인이 채석을 담당했어요. 채취한 암석을 다듬는 공정 역시 '치석'(治石·돌을 다듬음) 기술을 가진 장인이 맡았는데, 망치나 끝이 뾰족한 연장인 정을 이용해 모든 일을 수작업으로 진행했죠. 처음에는 울퉁불퉁한 석재 표면을 대강 다듬었지만, 비석처럼 특수한 조형물을 만들 때는 숫돌 등을 사용해서 표면을 갈고, 헝겊으로 문질러 광을 내기도 했어요.
이런 백제인들의 문화유산은 재료 산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채석한 석재의 운반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지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고대부터 육로를 통한 물자 수송보다 강이나 바다를 이용한 수운(水運) 교통이 더 많이 이용됐답니다.
백제 채석장을 찾아내다
부여와 익산·강경 지역에서는 채석장으로 생각되는 커다란 바위들이 지금도 남아 있어요. 익산 미륵사지 뒤편의 미륵산에는 입구부터 정상부까지 채석 흔적이 남아 있는데요. 미륵산과 절터에서 나온 석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했더니, 두 석재의 성분이 같다는 것이 밝혀졌어요. 미륵사지 석탑을 만드는 데 미륵산 화강암이 사용된 거예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의 경우에는 부여 읍내에서 석탑 부재(部材·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재료)와 유사한 암석을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석탑을 중심으로 반경 15㎞ 지역을 추가 조사했는데, 논산 강경 서북쪽에 있는 옥녀봉과 그 주변 지역에서 마침내 석탑 부재와 거의 동일한 화강섬록암을 찾아낼 수 있었어요. 강경 옥녀봉 일대에는 지금도 돌을 떼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서 이 지역이 석재의 중요한 공급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이런 석재들은 금강 수로를 통해 20㎞ 이상 옮겨져 부여에 공급됐죠.
백제 사비기 왕릉으로 추정되는 동하총(東下塚·능산리 1호분)의 돌방(고분 안의 돌로 된 방)은 복운모화강암, 화강섬록암, 안구상편마암 등 여러 석재로 만들어졌어요. 그중 안구상편마암은 산직리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유인원 기공비의 비석, 세탑리 오층석탑의 기단석 등 청동기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사용된 암석이에요.
이 암석은 부여 석성면 증산리 일대에서 공주 탄천면 덕지리로 이어지는 지역에 대규모 암반층이 분포하며, 현재도 조경석과 골재용 채석장이 운영되고 있어요. 백제 지역에는 질 좋은 돌 산지가 많고, 돌의 특성을 알아보는 뛰어난 안목과 섬세한 기술을 가진 장인이 많아서 다양하고 아름다운 석조 문화유산을 남길 수 있었답니다.
돌을 가공하고 조립하다
백제인들은 돌을 이용해서 성곽을 쌓거나 무덤을 만들고, 탑과 불상을 만들었어요. 부여나성은 사비도성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돌과 흙을 이용해 축조했어요. 부여나성의 성벽 안쪽은 흙을 다져 쌓고, 바깥쪽은 정으로 간단하게 다듬은 네모난 돌을 이용해 쌓았어요.
다만 성문(城門)처럼 중요한 시설이 있는 곳은 좀 더 섬세하게 다듬은 돌을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시설물의 중요도에 따라 돌의 가공도가 조금씩 달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돌을 이용해 만든 무덤은 시기에 따라 형식과 가공 방법이 달랐어요. 서울 석촌동 일원에서는 강돌(오랜 시간 강가에서 다듬어진 돌)이나 깬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積石塚)이 분포하지만, 공주와 부여에서는 돌을 방처럼 꾸민 '돌방무덤'(石室墳)이 만들어져 있어요. 처음에는 돌방무덤을 만드는 데 깬돌을 사용했지만, 538년 사비 천도 이후에는 가로·세로 1m가 넘는 대형 판석(板石)을 이용해서 만들었어요.
사비기 왕릉군으로 알려진 부여 능산리 왕릉원의 무덤들은 모두 정교하게 다듬은 판석으로 방을 만들고, 출입하는 문틀이나 문짝도 잘 가공한 돌로 꾸몄어요. 이에 반해 귀족들의 공동 무덤인 능안골·염창리 고분군은 전체 고분의 10~50% 정도만 잘 다듬은 돌을 이용했어요. 동일 고분군 안에서도 무덤 주인의 계층에 따라 돌을 다듬은 정도가 달랐는데, 신분이 높을수록 더 정성 들여 무덤을 만든 거죠.
대형 판석을 잘 다듬어서 무덤을 쌓는 기술은 사비기 왕궁터나 절터의 소위 '가구식기단'(架構式基壇)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가구식기단은 나뭇조각을 맞춰서 목가구를 만드는 것처럼 단단한 돌을 짜 맞춘 건물의 기단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땅 위에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건물 기둥을 세우듯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돌을 세우며, 기둥과 기둥 사이를 얇은 판석으로 막고, 다시 그 위에 수평으로 길게 돌을 얹어 완성하는 형식이죠.
이런 기단은 정림사지나 미륵사지 석탑의 기단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요. 백제의 두 석탑은 기단뿐 아니라 기둥돌·지붕돌 표면을 정이나 망치로 곱게 다듬었기 때문에 기계를 이용해 간 것처럼 매끈해요. 이처럼 백제의 석공들은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돌을 가공해 조립한 석탑을 창안해냈고, 그렇게 만들어진 석탑은 13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우아한 모습을 전해주고 있답니다.
[백제 유일 사면석불]
예산 화전리에는 백제에서 유일하게 동서남북 4방에 불상을 새긴 '사면석불'(四面石佛)이 남아 있어요. 이 사면석불은 서산이나 태안의 마애삼존불상보다 더 먼저 만들어진 선구적인 석조 불상이에요. 그중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는 남면에는 높이 198.8㎝의 좌상이 새겨져 있고, 불꽃무늬와 연꽃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광배(光背·몸 뒤에 빛이 발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가 함께 남아 있어요. 불상의 목과 손 부분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불상 머리와 신체를 따로 제작해서 결합한 흔적이에요. 예산 사면석불은 활석질의 편마암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곳으로부터 20㎞ 떨어진 대흥면 일대에서만 편마암 암반층이 확인돼 불상 제작을 위해 별도로 돌을 운반해 온 것으로 추정돼요.
백제의 治石 기술
▲ ①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모습. 기둥돌·지붕돌 표면을 정이나 망치로 곱게 다듬어 기계를 이용해 간것처럼 매끈해요. ②부여 능산리 동하총 돌방의 모습이에요. ③부여 석성면에는 안구상편마암을 채석한 흔적이 남아 있어요. ④예산 화전리 사면석불의 남면에 새겨진 불상과 광배 모습이에요. /국립부여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은 오는 8일까지 백제의 기술 문화를 조명하는 '백제인, 돌을 다스리다' 특별전을 열고 있어요. 돌은 인류가 가장 일찍부터 사용한 재료 중 하나로 다양한 쓰임새를 가지고 있어요. 생존을 위한 도구나 무기를 만들기도 하고 토목이나 건축·예술품을 만드는 데 사용하기도 했어요. 백제는 성곽이나 무덤, 궁궐이나 사원을 축조하면서 돌을 다루는 기술을 발전시켰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문화유산을 남겼는지 알아볼까요?좋은 돌을 찾아 운반하기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석재(石材)가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하는데요. 그중 화강암이 가장 많아요. 쓰임새에 맞는 적당한 돌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암반에서 원석을 떼는 '채석'(採石) 작업이 필요해요. 채석 기술은 청동기시대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돌을 떼어내던 방법에서부터 발전해 왔어요. 고인돌 덮개돌은 무게가 수십톤에 달하는데, 이처럼 커다란 석재를 채석하기 위해 망치로 바위에 쐐기 구멍을 뚫은 다음 그 안에 나무쐐기 같은 것을 박아 두드리거나, 나무가 부풀어오를 때까지 물을 붓는 방법을 썼지요.
백제 때도 채석은 어려운 작업이었어요. 그래서 암석의 강도나 석질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장인이 채석을 담당했어요. 채취한 암석을 다듬는 공정 역시 '치석'(治石·돌을 다듬음) 기술을 가진 장인이 맡았는데, 망치나 끝이 뾰족한 연장인 정을 이용해 모든 일을 수작업으로 진행했죠. 처음에는 울퉁불퉁한 석재 표면을 대강 다듬었지만, 비석처럼 특수한 조형물을 만들 때는 숫돌 등을 사용해서 표면을 갈고, 헝겊으로 문질러 광을 내기도 했어요.
이런 백제인들의 문화유산은 재료 산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채석한 석재의 운반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지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고대부터 육로를 통한 물자 수송보다 강이나 바다를 이용한 수운(水運) 교통이 더 많이 이용됐답니다.
백제 채석장을 찾아내다
부여와 익산·강경 지역에서는 채석장으로 생각되는 커다란 바위들이 지금도 남아 있어요. 익산 미륵사지 뒤편의 미륵산에는 입구부터 정상부까지 채석 흔적이 남아 있는데요. 미륵산과 절터에서 나온 석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했더니, 두 석재의 성분이 같다는 것이 밝혀졌어요. 미륵사지 석탑을 만드는 데 미륵산 화강암이 사용된 거예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의 경우에는 부여 읍내에서 석탑 부재(部材·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재료)와 유사한 암석을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석탑을 중심으로 반경 15㎞ 지역을 추가 조사했는데, 논산 강경 서북쪽에 있는 옥녀봉과 그 주변 지역에서 마침내 석탑 부재와 거의 동일한 화강섬록암을 찾아낼 수 있었어요. 강경 옥녀봉 일대에는 지금도 돌을 떼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서 이 지역이 석재의 중요한 공급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이런 석재들은 금강 수로를 통해 20㎞ 이상 옮겨져 부여에 공급됐죠.
백제 사비기 왕릉으로 추정되는 동하총(東下塚·능산리 1호분)의 돌방(고분 안의 돌로 된 방)은 복운모화강암, 화강섬록암, 안구상편마암 등 여러 석재로 만들어졌어요. 그중 안구상편마암은 산직리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유인원 기공비의 비석, 세탑리 오층석탑의 기단석 등 청동기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사용된 암석이에요.
이 암석은 부여 석성면 증산리 일대에서 공주 탄천면 덕지리로 이어지는 지역에 대규모 암반층이 분포하며, 현재도 조경석과 골재용 채석장이 운영되고 있어요. 백제 지역에는 질 좋은 돌 산지가 많고, 돌의 특성을 알아보는 뛰어난 안목과 섬세한 기술을 가진 장인이 많아서 다양하고 아름다운 석조 문화유산을 남길 수 있었답니다.
돌을 가공하고 조립하다
백제인들은 돌을 이용해서 성곽을 쌓거나 무덤을 만들고, 탑과 불상을 만들었어요. 부여나성은 사비도성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돌과 흙을 이용해 축조했어요. 부여나성의 성벽 안쪽은 흙을 다져 쌓고, 바깥쪽은 정으로 간단하게 다듬은 네모난 돌을 이용해 쌓았어요.
다만 성문(城門)처럼 중요한 시설이 있는 곳은 좀 더 섬세하게 다듬은 돌을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시설물의 중요도에 따라 돌의 가공도가 조금씩 달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돌을 이용해 만든 무덤은 시기에 따라 형식과 가공 방법이 달랐어요. 서울 석촌동 일원에서는 강돌(오랜 시간 강가에서 다듬어진 돌)이나 깬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積石塚)이 분포하지만, 공주와 부여에서는 돌을 방처럼 꾸민 '돌방무덤'(石室墳)이 만들어져 있어요. 처음에는 돌방무덤을 만드는 데 깬돌을 사용했지만, 538년 사비 천도 이후에는 가로·세로 1m가 넘는 대형 판석(板石)을 이용해서 만들었어요.
사비기 왕릉군으로 알려진 부여 능산리 왕릉원의 무덤들은 모두 정교하게 다듬은 판석으로 방을 만들고, 출입하는 문틀이나 문짝도 잘 가공한 돌로 꾸몄어요. 이에 반해 귀족들의 공동 무덤인 능안골·염창리 고분군은 전체 고분의 10~50% 정도만 잘 다듬은 돌을 이용했어요. 동일 고분군 안에서도 무덤 주인의 계층에 따라 돌을 다듬은 정도가 달랐는데, 신분이 높을수록 더 정성 들여 무덤을 만든 거죠.
대형 판석을 잘 다듬어서 무덤을 쌓는 기술은 사비기 왕궁터나 절터의 소위 '가구식기단'(架構式基壇)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가구식기단은 나뭇조각을 맞춰서 목가구를 만드는 것처럼 단단한 돌을 짜 맞춘 건물의 기단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땅 위에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건물 기둥을 세우듯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돌을 세우며, 기둥과 기둥 사이를 얇은 판석으로 막고, 다시 그 위에 수평으로 길게 돌을 얹어 완성하는 형식이죠.
이런 기단은 정림사지나 미륵사지 석탑의 기단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요. 백제의 두 석탑은 기단뿐 아니라 기둥돌·지붕돌 표면을 정이나 망치로 곱게 다듬었기 때문에 기계를 이용해 간 것처럼 매끈해요. 이처럼 백제의 석공들은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돌을 가공해 조립한 석탑을 창안해냈고, 그렇게 만들어진 석탑은 13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우아한 모습을 전해주고 있답니다.
[백제 유일 사면석불]
예산 화전리에는 백제에서 유일하게 동서남북 4방에 불상을 새긴 '사면석불'(四面石佛)이 남아 있어요. 이 사면석불은 서산이나 태안의 마애삼존불상보다 더 먼저 만들어진 선구적인 석조 불상이에요. 그중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는 남면에는 높이 198.8㎝의 좌상이 새겨져 있고, 불꽃무늬와 연꽃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광배(光背·몸 뒤에 빛이 발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가 함께 남아 있어요. 불상의 목과 손 부분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불상 머리와 신체를 따로 제작해서 결합한 흔적이에요. 예산 사면석불은 활석질의 편마암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곳으로부터 20㎞ 떨어진 대흥면 일대에서만 편마암 암반층이 확인돼 불상 제작을 위해 별도로 돌을 운반해 온 것으로 추정돼요.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