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열대 조개·유리그릇… 바닷길로 온갖 외래 문물 모였죠
입력 : 2022.04.21 03:30
조개무지가 알려주는 가야인의 바다 먹거리
가야의 여러 소국들은 독자성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주변과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분지'(盆地·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평평한 지역)에서 나라를 발전시켜 나갔어요. 이런 소국들을 서로 이어주는 곳이 바로 강과 바다였어요. 강과 바다를 이용해 외부 세계와 소통하며 활발한 경제 활동을 벌였죠. 이 때문에 가야는 '해양 왕국'이라고 할 수 있어요.
회현동이나 부원동 등 과거 갯벌이었던 김해 시내 곳곳에서는 일찍부터 많은 조개무지(貝塚)가 발견됐어요. 이곳은 오늘날의 쓰레기 처리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밀물 때 바닷물에 잠기고 썰물 때 드러나는 갯벌은 다양한 해양 생물이 살고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가장 손쉽게 먹거리를 구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굴이나 고둥·백합 등의 조개껍데기와 방어·참돔·다랑어·농어 등의 물고기 뼈, 강치·수달 등 해양 포유류 뼈가 발견됐어요. 이를 통해 가야인들의 먹거리에서 해양 자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어요.
김해 대성동이나 양동리 고분에서는 쇠로 만든 갑옷·무기뿐 아니라 수산물을 채취하는 데 사용한 여러 도구들이 함께 발견되는데요. 돌이나 동물의 뼈, 쇠로 만든 낚싯바늘이나 작살, 어망추들은 오늘날 어촌에서 사용하는 고기잡이 도구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답니다. 가야의 대표적인 어구로는 '세갈래작살'이 있는데요. 세 개의 가지를 기다란 나무 자루에 끼워 하나의 작살로 만들어 사용한 거예요. 작살 끝에는 쇠로 만든 갈고리가 있어 잡은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던 거죠.
강과 바다를 오고 간 가야의 배
삼국시대 김해는 낙동강을 따라 경상북도 내륙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관문이었어요. 중국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따라 일본으로 가려면 꼭 들르게 되는 중요한 항구이기도 했죠. 그래서인지 김해에는 다른 나라 물건들을 사고파는 큰 시장이 있었는데요. 이런 물건과 사람을 실어 날랐던 가야의 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아직 삼국시대의 배가 실물로 출토된 적은 없어요. 하지만 배모양 토기를 통해 그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죠. 가야 유적에서는 지금까지 7점의 배모양 토기가 출토됐어요. 그중 함안 말이산과 창원 현동의 가야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유명해요. 함안 말이산 45호 출토품은 배의 앞뒤가 대칭 모양이고, 배 밑이 U자형으로 둥글게 만들어졌어요. 배 중간에는 좌우 5개씩 노걸이가 달려 있고요. 이 토기는 주로 강에서 노를 저어 다니던 배를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돼요.
창원 현동 387호 출토품은 삼각형 구멍이 뚫린 굽다리(굽이 달린 그릇) 위에 배 한 척이 올려져 있어요. 뱃머리(船首)는 날렵한 유선형을 이루며 뒷부분(船尾)은 꼬리처럼 튀어나왔어요. 배 바닥이 뾰족하고 배 여기저기에 가는 선들로 모양을 냈어요. 배 중간에는 돛으로 추정되는 네모난 판이 낮게 올려져 있는데 노걸이는 없어요. 이렇게 바닥이 뾰족한 배인 첨저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에 비해 파도를 잘 견디고 속도를 내는 데 유리하다고 해요. 이것을 보면 창원 현동 출토품은 먼바다를 항해하는 데 사용된 돛단배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돼요.
물길 이용한 가야 사람들의 교역품
가야의 해상 교역망을 통해 유통되던 물건들을 살펴볼게요. 금관가야(金官伽倻)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김해 대성동과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다양한 계통의 외래계 문물이 발견돼요. 중국 진(晉)나라의 청동 그릇이나 허리띠, 북방 선비족의 말갖춤(馬具·말을 부릴 때 쓰는 연장), 서역에서 생산된 유리그릇과 구슬, 일본계 청동제품과 비취 곱은옥, 열대 조개 같은 것들이 바닷길을 통해 가야로 모여들었죠.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취사용 토기도 있어요. 이동식 부뚜막과 흙으로 만든 솥, 삼발이 같은 취사도구는 이동이 잦은 바닷가 사람들이 사용한 것으로, 가야와 교역하던 일본인들이 남긴 흔적으로 생각돼요. 일본 오키나와 같은 열대 지방에서 서식하는 조개류의 흔적도 있어요. 이 조개들은 껍데기가 크고 두꺼우며 영롱한 빛깔을 내는데, 가야에는 이런 조개껍데기로 만든 국자나 말갖춤 장식 같은 것이 남아 있어요.
가야의 수출품으로는 비단이나 삼베 같은 직물, 해산물 같은 지역 특산품도 있지만 특히 '철'이 유명했어요. 중국 역사책에는 "그 나라에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 거래는 철로 이뤄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기록이 있어요. 고대사회에서 철은 첨단 소재였는데, 철을 만들고 다루는 기술이 뛰어날수록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죠.
김해와 창원·양산 등 가야의 여러 유적에서는 금속을 만드는 가마인 제련로나 덩이쇠(쇠판), 망치·집게 등 철기 제작을 할 때 썼던 흔적들이 발견돼요. 철은 가야의 가장 중요한 전략 상품이었던 거예요. 교역에서 얻은 막대한 이익은 가야가 성장하는 중요한 바탕이 됐어요.
[10여개 소국 연맹이 합쳐진 국가]
역사 기록에 따르면 가야는 기원후 42년부터 562년까지 오늘날 경상남북도,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와 그 주변에 자리한 고대국가예요. 가야사에 대한 시·공간적 범위를 명확하게 특정할 수 없는 이유는 가야 연맹체를 고구려·백제·신라와 같은 '중앙집권적 영역 국가'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가야 문화가 가장 발달한 6세기 무렵에도 가야는 10~13개 정도의 여러 소국으로 구성된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어요. 가야 연맹체는 금관가야나 대가야·아라가야처럼 여러 소국들이 자율성을 띠는 수평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런 특징은 가야가 끝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원인이 되기도 했답니다.
가야의 해양문화
▲ ①함안 말이산(왼쪽)과 창원 현동 고분에서 출토된 배모양 토기예요. 배 밑바닥 모양이나 노, 돛의 사용 방법이 서로 달랐어요. ②가야 무덤에서 나온 낚싯바늘과 작살의 모습. ③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취사용 토기. ④금속을 만들 때 사용하는 쇠판인 덩이쇠의 모습. ⑤일본 오키나와 같은 열대 지방에서 서식하는 조개류의 흔적. /국립김해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이 오는 24일까지 가야의 배와 항해 이야기를 담은 '가야인 바다에 살다' 특별전을 열어요. 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온 가야 사람들은 일찍부터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어요. 가야인들은 바다를 터전 삼아 풍요로운 먹거리를 얻고 주변 지역과도 교류할 수 있었죠. 가야의 해양문화에 대해 알아볼까요?조개무지가 알려주는 가야인의 바다 먹거리
가야의 여러 소국들은 독자성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주변과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분지'(盆地·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평평한 지역)에서 나라를 발전시켜 나갔어요. 이런 소국들을 서로 이어주는 곳이 바로 강과 바다였어요. 강과 바다를 이용해 외부 세계와 소통하며 활발한 경제 활동을 벌였죠. 이 때문에 가야는 '해양 왕국'이라고 할 수 있어요.
회현동이나 부원동 등 과거 갯벌이었던 김해 시내 곳곳에서는 일찍부터 많은 조개무지(貝塚)가 발견됐어요. 이곳은 오늘날의 쓰레기 처리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밀물 때 바닷물에 잠기고 썰물 때 드러나는 갯벌은 다양한 해양 생물이 살고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가장 손쉽게 먹거리를 구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굴이나 고둥·백합 등의 조개껍데기와 방어·참돔·다랑어·농어 등의 물고기 뼈, 강치·수달 등 해양 포유류 뼈가 발견됐어요. 이를 통해 가야인들의 먹거리에서 해양 자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어요.
김해 대성동이나 양동리 고분에서는 쇠로 만든 갑옷·무기뿐 아니라 수산물을 채취하는 데 사용한 여러 도구들이 함께 발견되는데요. 돌이나 동물의 뼈, 쇠로 만든 낚싯바늘이나 작살, 어망추들은 오늘날 어촌에서 사용하는 고기잡이 도구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답니다. 가야의 대표적인 어구로는 '세갈래작살'이 있는데요. 세 개의 가지를 기다란 나무 자루에 끼워 하나의 작살로 만들어 사용한 거예요. 작살 끝에는 쇠로 만든 갈고리가 있어 잡은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던 거죠.
강과 바다를 오고 간 가야의 배
삼국시대 김해는 낙동강을 따라 경상북도 내륙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관문이었어요. 중국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따라 일본으로 가려면 꼭 들르게 되는 중요한 항구이기도 했죠. 그래서인지 김해에는 다른 나라 물건들을 사고파는 큰 시장이 있었는데요. 이런 물건과 사람을 실어 날랐던 가야의 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아직 삼국시대의 배가 실물로 출토된 적은 없어요. 하지만 배모양 토기를 통해 그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죠. 가야 유적에서는 지금까지 7점의 배모양 토기가 출토됐어요. 그중 함안 말이산과 창원 현동의 가야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유명해요. 함안 말이산 45호 출토품은 배의 앞뒤가 대칭 모양이고, 배 밑이 U자형으로 둥글게 만들어졌어요. 배 중간에는 좌우 5개씩 노걸이가 달려 있고요. 이 토기는 주로 강에서 노를 저어 다니던 배를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돼요.
창원 현동 387호 출토품은 삼각형 구멍이 뚫린 굽다리(굽이 달린 그릇) 위에 배 한 척이 올려져 있어요. 뱃머리(船首)는 날렵한 유선형을 이루며 뒷부분(船尾)은 꼬리처럼 튀어나왔어요. 배 바닥이 뾰족하고 배 여기저기에 가는 선들로 모양을 냈어요. 배 중간에는 돛으로 추정되는 네모난 판이 낮게 올려져 있는데 노걸이는 없어요. 이렇게 바닥이 뾰족한 배인 첨저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에 비해 파도를 잘 견디고 속도를 내는 데 유리하다고 해요. 이것을 보면 창원 현동 출토품은 먼바다를 항해하는 데 사용된 돛단배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돼요.
물길 이용한 가야 사람들의 교역품
가야의 해상 교역망을 통해 유통되던 물건들을 살펴볼게요. 금관가야(金官伽倻)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김해 대성동과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다양한 계통의 외래계 문물이 발견돼요. 중국 진(晉)나라의 청동 그릇이나 허리띠, 북방 선비족의 말갖춤(馬具·말을 부릴 때 쓰는 연장), 서역에서 생산된 유리그릇과 구슬, 일본계 청동제품과 비취 곱은옥, 열대 조개 같은 것들이 바닷길을 통해 가야로 모여들었죠.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취사용 토기도 있어요. 이동식 부뚜막과 흙으로 만든 솥, 삼발이 같은 취사도구는 이동이 잦은 바닷가 사람들이 사용한 것으로, 가야와 교역하던 일본인들이 남긴 흔적으로 생각돼요. 일본 오키나와 같은 열대 지방에서 서식하는 조개류의 흔적도 있어요. 이 조개들은 껍데기가 크고 두꺼우며 영롱한 빛깔을 내는데, 가야에는 이런 조개껍데기로 만든 국자나 말갖춤 장식 같은 것이 남아 있어요.
가야의 수출품으로는 비단이나 삼베 같은 직물, 해산물 같은 지역 특산품도 있지만 특히 '철'이 유명했어요. 중국 역사책에는 "그 나라에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 거래는 철로 이뤄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기록이 있어요. 고대사회에서 철은 첨단 소재였는데, 철을 만들고 다루는 기술이 뛰어날수록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죠.
김해와 창원·양산 등 가야의 여러 유적에서는 금속을 만드는 가마인 제련로나 덩이쇠(쇠판), 망치·집게 등 철기 제작을 할 때 썼던 흔적들이 발견돼요. 철은 가야의 가장 중요한 전략 상품이었던 거예요. 교역에서 얻은 막대한 이익은 가야가 성장하는 중요한 바탕이 됐어요.
[10여개 소국 연맹이 합쳐진 국가]
역사 기록에 따르면 가야는 기원후 42년부터 562년까지 오늘날 경상남북도,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와 그 주변에 자리한 고대국가예요. 가야사에 대한 시·공간적 범위를 명확하게 특정할 수 없는 이유는 가야 연맹체를 고구려·백제·신라와 같은 '중앙집권적 영역 국가'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가야 문화가 가장 발달한 6세기 무렵에도 가야는 10~13개 정도의 여러 소국으로 구성된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어요. 가야 연맹체는 금관가야나 대가야·아라가야처럼 여러 소국들이 자율성을 띠는 수평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런 특징은 가야가 끝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원인이 되기도 했답니다.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