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聞column

[분수대] 그린벨트 수난사

bindol 2018. 9. 19. 06:27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책상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그린 수도권 도로망 스케치가 놓여 있었다. 박 대통은 스케치 위에 둥근 띠를 그리며 건설부 국토계획종합담당관에게 말했다. “그린벨트 있지, 그린벨트. 이렇게 한번 빙 둘러쳐 봐.” 영국의 그린벨트에 대해 보고받고서 우리도 만들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1971년 6월의 일이었다.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는 그렇게 탄생했다. 처음 그린벨트가 설정됐을 때, 주무 부처였던 건설부 태완선 장관도 물려받은 서울 남태령 인근 임야 5000평이 개발제한에 묶였으나 한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그린벨트는 77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전국에 총 5397㎢가 지정됐다. 현재 서울 면적의 약 9배다. 그 뒤 20여 년 동안 한 치도 줄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혀 손을 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주택 증개축을 허용하고 학교·도서관·동사무소를 지을 수 있게 하는 등 규제가 야금야금 풀렸다. 선거를 앞뒀을 때마다 나타난 현상이었다.
 
규제 완화가 아니라 지정 해제를 처음 한 것은 김대중 정부 들어서였다. 2000년 경기도 시화공단과 경남 창원공단 조성을 위해 11㎢를 해제한 게 시초였다. 이어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보존가치가 없는 곳은 해제한다’는 명목 아래 2001년부터 3년 동안 그린벨트 1256㎢가 사라졌다. 이명박 정부는 서울 집값을 잡겠다며 강남·서초 등지에서 그린벨트를 풀어 아파트를 지었다.  
     
한국의 사례를 봤기 때문일까. 한국 그린벨트의 모델이 된 영국에서도 한때 개발 논란이 벌어졌다. “땅이 모자라 집값이 뛴다”며 런던의 그린벨트 일부에 집을 짓자는 주장이 나왔다. 10년 새 부동산 가격이 거의 두 배가 되자 제기된 집값 안정 방안이었다. 그러나 런던은 보전을 택했다. 지난해 말 발표한 중장기 도시계획 초안에서 “그린벨트와 공용 녹지 보전 정책을 더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에서 그린벨트는 지금까지 약 30%가 없어지고 3854㎢만 남았다. 서울은 전체 면적의 4분의 1이 그린벨트다. 이걸 놓고 정부와 서울시가 옥신각신하고 있다. 정부는 집을 지어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겠다며 서울시에 그린벨트 해제를 요청했으나, 서울시는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이라며 고개를 젓고 있다.
 
정부와 서울시의 그린벨트 대립은 이명박 정부 때도 있었다. 강남·서초 그린벨트 개발이 확정되기 직전인 2008년 국정감사에서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그린벨트를 해제해 주택을 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과연 박원순 시장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권혁주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분수대] 그린벨트 수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