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삼의 한자 키워드로 읽는 동양문화(12)] 사(師): 군사 지도자에서 진정한 스승으로
인간 나아갈 길 전수하고, 해야 할 일 가르치는 존재
하영삼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지위·신분·나이 떠나 도(道) 갖췄다면 스승의 자격 충분…진정한 사표 찾아 의문 해소하고 미래의 예지 배워야
1. 사도(師道): 스승의 길
옛날부터 배우는 사람이라면 모두 스승을 모셨다. 스승이란 도를 전수하고, 전문지식을 가르치며, 의문을 풀어 주는 존재다.
사람이란 태어나면서 다 아는 존재가 아닐진대 어찌 의문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의문이 있는데도 스승을 모시지 않는다면, 그 의문은 영원히 풀 수 없으리니.
古之學者必有師(고지학자필유사) 師者, 所以傳道受業解惑也(사자, 소이전도수업해혹야) 人非生而知之者, 孰能無惑(인비생이지지자 숙능무혹) 惑而不從師, 其爲惑也, 終不解矣(혹이부종사 기위혹야 종불해의)
당나라를 살았던 한유가 당시 배움을 경시하는 세태의 천박함에 작심하고 쓴 [스승의 길(師道)]에 나오는 시작 부분이다. 중국 전통에서 ‘배움’은 대단히 중요했다. 유가 경전의 최고점을 차지하고 있는 [논어]도 그 시작이 다름 아닌 학(學)과 습(習), 즉 학습이 아니던가? “배워서 수시로 그것을 익힌다면 그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닌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그래서 한나라 이후 유가가 전통으로 자리 잡았던 중국은 물론 한국·일본 등 유가 문화권에서 최고의 화두는 배우고 익히는 것, 학습이었다. 모름지기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쉼 없이 배우고 익혀야만 하는 것이 동양적 전통이었고 그것이 생활을 지배했다. 왕실의 최고 지배자나 관료·사대부 등 지식층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백성들도 이를 신봉하고 실천했다. 그리하여 이는 절대적 가치가 됐고, 중요한 전통으로 남았다.
동아시아를 사는 모두 이에게 지상과제가 된 ‘배움’, 그런 배움에 스승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스승을 모시고 살았고, 좋은 스승을 찾고자 천하를 헤맸으며, 스승을 더없이 높이고 존중했다. 공자도 말했듯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알고 나지 않는 존재가 인간일진대 사람이라면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의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그 의문은 스승의 도움을 받아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
한유는 인간이 살아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전수하고,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문을 풀어주는 존재가 스승이라고 정의했다. 그것이 스승의 임무였고, 그런 임무를 수행할 때 진정한 ‘스승’이었다. 지금 봐도 명쾌하고 철리(哲理)적인 정의가 아닐 수 없다.
1000년도 더 지난 오늘날, 더구나 21세기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 시대. 이 글을 다시 호출하는 것은 교육 강국이자 교육 하나에 기대어 현대를 일궈온 위대한 대한민국이 처한 오늘의 모습이 한유가 ‘스승의 길’을 선언했던 당시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우리는 과연 인간 본연의 임무가 무엇인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풀지 못하는 의문을 풀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인류 미래의 길을 인도하고 갖가지 의문을 풀어줄 스승을 찾아 헤매기나 하는가? 이런 정신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진정한 스승은 이 땅에 존재하기나 하는가? 우리 모두가 과연 그런 ‘스승’과 ‘학생’으로 살아가고는 있는가?
2. 사(師)의 어원: 뛰어난 군사 지도자
사람이란 태어나면서 다 아는 존재가 아닐진대 어찌 의문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의문이 있는데도 스승을 모시지 않는다면, 그 의문은 영원히 풀 수 없으리니.
古之學者必有師(고지학자필유사) 師者, 所以傳道受業解惑也(사자, 소이전도수업해혹야) 人非生而知之者, 孰能無惑(인비생이지지자 숙능무혹) 惑而不從師, 其爲惑也, 終不解矣(혹이부종사 기위혹야 종불해의)
당나라를 살았던 한유가 당시 배움을 경시하는 세태의 천박함에 작심하고 쓴 [스승의 길(師道)]에 나오는 시작 부분이다. 중국 전통에서 ‘배움’은 대단히 중요했다. 유가 경전의 최고점을 차지하고 있는 [논어]도 그 시작이 다름 아닌 학(學)과 습(習), 즉 학습이 아니던가? “배워서 수시로 그것을 익힌다면 그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닌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그래서 한나라 이후 유가가 전통으로 자리 잡았던 중국은 물론 한국·일본 등 유가 문화권에서 최고의 화두는 배우고 익히는 것, 학습이었다. 모름지기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쉼 없이 배우고 익혀야만 하는 것이 동양적 전통이었고 그것이 생활을 지배했다. 왕실의 최고 지배자나 관료·사대부 등 지식층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백성들도 이를 신봉하고 실천했다. 그리하여 이는 절대적 가치가 됐고, 중요한 전통으로 남았다.
동아시아를 사는 모두 이에게 지상과제가 된 ‘배움’, 그런 배움에 스승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스승을 모시고 살았고, 좋은 스승을 찾고자 천하를 헤맸으며, 스승을 더없이 높이고 존중했다. 공자도 말했듯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알고 나지 않는 존재가 인간일진대 사람이라면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의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그 의문은 스승의 도움을 받아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
한유는 인간이 살아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전수하고,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문을 풀어주는 존재가 스승이라고 정의했다. 그것이 스승의 임무였고, 그런 임무를 수행할 때 진정한 ‘스승’이었다. 지금 봐도 명쾌하고 철리(哲理)적인 정의가 아닐 수 없다.
1000년도 더 지난 오늘날, 더구나 21세기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 시대. 이 글을 다시 호출하는 것은 교육 강국이자 교육 하나에 기대어 현대를 일궈온 위대한 대한민국이 처한 오늘의 모습이 한유가 ‘스승의 길’을 선언했던 당시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우리는 과연 인간 본연의 임무가 무엇인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풀지 못하는 의문을 풀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인류 미래의 길을 인도하고 갖가지 의문을 풀어줄 스승을 찾아 헤매기나 하는가? 이런 정신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진정한 스승은 이 땅에 존재하기나 하는가? 우리 모두가 과연 그런 ‘스승’과 ‘학생’으로 살아가고는 있는가?
2. 사(師)의 어원: 뛰어난 군사 지도자
사(師)는 갑골문에서부터 등장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글자다. 지금의 사(師)는 帀(두를 잡)이 의미부이고 군사 사(이미지1 참조)가 소리부인 구조로 군사·군대·지도자·스승을 뜻하지만, 갑골문에서는 잡(帀)이 빠진 사(이미지1 참조)로만 썼다. 사(이미지1 참조)는 갑골문 당시에 이미 부대·군대의 편제단위, 직책(관리책임자), 지명 등으로 쓰였다.
그래서 군대나 군사와 관련된 의미가 초기 뜻이다. 갑골문이 사용됐던 상나라 때 삼사(三師: 좌사·중사·우사의 세 편대)라는 말도 등장하고, 사반이나 사저에서처럼 어떤 전문적인 직무를 책임지는 대표자를 지칭하기도 했다.
모범·기술자·가르치다 등 의미로도 사용
사(師)의 원형으로 등장하는 사(이미지1 참조)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를 가로로 눕히면 구(丘=邱)가 돼 구릉(丘陵)을 뜻하기에 ‘작은 언덕’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이미지1 참조)의 의미 파생은 갑골문이 사용됐던 상나라의 지리적 환경과 연계돼 있다.
그래서 군대나 군사와 관련된 의미가 초기 뜻이다. 갑골문이 사용됐던 상나라 때 삼사(三師: 좌사·중사·우사의 세 편대)라는 말도 등장하고, 사반이나 사저에서처럼 어떤 전문적인 직무를 책임지는 대표자를 지칭하기도 했다.
모범·기술자·가르치다 등 의미로도 사용
사(師)의 원형으로 등장하는 사(이미지1 참조)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를 가로로 눕히면 구(丘=邱)가 돼 구릉(丘陵)을 뜻하기에 ‘작은 언덕’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이미지1 참조)의 의미 파생은 갑골문이 사용됐던 상나라의 지리적 환경과 연계돼 있다.
그곳은 산이나 강이 많은 우리와는 달리 황토 평원이 끝없이 펼쳐진 중국의 중원 지역이다. 높은 산이 없기에 ‘언덕’이나 나지막한 ‘구릉’이 여러 특수한 기능을 담당해 왔다. 황하의 잦은 홍수로부터 침수를 막아 주기도 했으며, 주위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조기에 발견해 대비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했다. 심지어는 높은 ‘산’처럼 하늘과도 통할 수 있는 신령스런 곳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인들은 이러한 나지막한 언덕에다 살아서의 근거지인 성(城)을 세웠고, 죽어서도 살아갈 왕릉(王陵)을 만들었다. 나라의 중심 되는 곳이 도성(都城)이었고, 삶의 근거지가 성이었기에 그곳은 군사(軍師)들이 에워싸 지키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사(師)에 ‘군사(軍師)’라는 뜻이 생겼다. 옛날에는 2500명의 군대를 사(師)라고도 했는데, 오늘날의 사단(師團)의 유래가 된 지점이기도 하다. 금문에 들면서 이러한 의미를 더 강조하기 위해 ‘사방으로 둘러치다’는 뜻의 잡(帀)을 더해 지금의 사(師)가 됐다.
이렇게 볼 때, 사(師)의 원래 뜻은 성이 자리한 언덕(이미지1 참조)을 에워싼(帀) ‘군대’가 원래 뜻이다. 이로부터 사단(師團)이나 삼사(三師)에서처럼 군대의 단위를 나타내기도 했고, 경사(京師)에서처럼 ‘수도’를 뜻하기도 했다. 또 고대사회로 갈수록 군대의 존재가 더욱 중요했기에, 사(師)는 군사편제에 기초한 행정단위를 지칭하기도 했다.
[상서대전](尚書大傳)에 의하면 8가구(家)가 1린(隣)이 되고, 3린이 1붕(朋)이 되며, 3붕이 1리(里)가 되고, 5리가 1읍(邑)이 되며, 10읍이 1도(都)가 되며, 10도가 1사(師)가 되는데 1주(州)에 12사(師)가 설치됐다고 한다. 이 계산대로라면 사(師)는 3만6000가구를 지칭했으니 꽤나 큰 행정단위를 지칭했음이 분명하다.
이후 군대의 지도자라는 의미까지 나왔고, 이로부터 노사(老師)나 사범(師範)에서처럼 스승이나 모범 등을 뜻하게 됐고, 다시 의사(醫師)에서처럼 어떤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부르는 말로도 쓰였다. 또 동사로도 쓰여 ‘가르치다’는 뜻으로도 쓰였다. 현대 중국의 간화자에서는 사(이미지1 참조)를 간단히 줄인 사(师)로 쓴다.
3. 번역어로서 사(師): 사자(獅)
그래서 고대 중국인들은 이러한 나지막한 언덕에다 살아서의 근거지인 성(城)을 세웠고, 죽어서도 살아갈 왕릉(王陵)을 만들었다. 나라의 중심 되는 곳이 도성(都城)이었고, 삶의 근거지가 성이었기에 그곳은 군사(軍師)들이 에워싸 지키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사(師)에 ‘군사(軍師)’라는 뜻이 생겼다. 옛날에는 2500명의 군대를 사(師)라고도 했는데, 오늘날의 사단(師團)의 유래가 된 지점이기도 하다. 금문에 들면서 이러한 의미를 더 강조하기 위해 ‘사방으로 둘러치다’는 뜻의 잡(帀)을 더해 지금의 사(師)가 됐다.
이렇게 볼 때, 사(師)의 원래 뜻은 성이 자리한 언덕(이미지1 참조)을 에워싼(帀) ‘군대’가 원래 뜻이다. 이로부터 사단(師團)이나 삼사(三師)에서처럼 군대의 단위를 나타내기도 했고, 경사(京師)에서처럼 ‘수도’를 뜻하기도 했다. 또 고대사회로 갈수록 군대의 존재가 더욱 중요했기에, 사(師)는 군사편제에 기초한 행정단위를 지칭하기도 했다.
[상서대전](尚書大傳)에 의하면 8가구(家)가 1린(隣)이 되고, 3린이 1붕(朋)이 되며, 3붕이 1리(里)가 되고, 5리가 1읍(邑)이 되며, 10읍이 1도(都)가 되며, 10도가 1사(師)가 되는데 1주(州)에 12사(師)가 설치됐다고 한다. 이 계산대로라면 사(師)는 3만6000가구를 지칭했으니 꽤나 큰 행정단위를 지칭했음이 분명하다.
이후 군대의 지도자라는 의미까지 나왔고, 이로부터 노사(老師)나 사범(師範)에서처럼 스승이나 모범 등을 뜻하게 됐고, 다시 의사(醫師)에서처럼 어떤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부르는 말로도 쓰였다. 또 동사로도 쓰여 ‘가르치다’는 뜻으로도 쓰였다. 현대 중국의 간화자에서는 사(이미지1 참조)를 간단히 줄인 사(师)로 쓴다.
3. 번역어로서 사(師): 사자(獅)
‘사자’는 우리가 사는 이 지역에 자생하는 짐승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동물이며,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문화적 상징과 함께 여러 곳에 등장한다. 그러나 사자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여기로 들어왔을까를 묻는다면 그다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역사 문헌을 살피면 [후한서] ‘반표전(班彪傳)’에서 ‘사자’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한나라 화제가 즉위한 해) 월지국(Indo-Scythians)이 한나라를 도와 거사국을 공격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해(88년) 월지국에서 진귀한 보물과 부발(符拔: 꼬리가 긴 사슴 비슷하게 생긴 짐승)과 사자를 공물로 보내왔으며, 이를 계기로 한나라의 공주를 원했다. 그러나 반초는 이를 거절하고서 사신을 되돌려 보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 두 나라는 서로 원한을 갖게 됐다.” 또 [후한서] ‘순제기(順帝紀)’에서는 “양가(陽嘉) 2년(133년) 카슈가르에서 사자와 낙타를 보내 왔다”라고 했다.
또 다른 기록도 있다. 547년에 완성된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제3권’에 의하면 “사자는 페르시아의 왕이 헌상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자료에 근거해 볼 때 ‘사자’는 후한 때인 서기 100년 전후로 해서 중앙아시아의 월지국이나 카슈가르, 혹은 페르시아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처음 중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도덕규범의 임무도 더해져
‘사자’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처음 보는 이 특이한 짐승을 어떤 한자로 표현했을까?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사자를 사(師)로 표기했는데, 지금의 사(獅)에서 ‘짐승’을 뜻하는 견(犬=犭)이 빠진 모습이다.
사(師)는 당시 사자가 들어왔던 지역의 독음을 그대로 반역한 결과로 음역어였다. 물론 이론은 있지만, 당시 이란어에서는 사자를 ‘사러(śarɤ)’, 소그디아 어(Sogdian)에서는 ‘*스러(*šrɤw)’나 ‘*사러(*šarɤə)’ 등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師)는 이의 대역음으로 보고 있다(나상배, [언어와 문화] 참조).
사자가 처음 한나라 조정에 헌상됐을 때의 사자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호랑이와 비슷한데 앞쪽은 누런 색에다 구레나룻 수염이 있었고 꼬리 끝에는 털이 커다랗게 났다.” 처음에는 음역해 단순히 사(師)로 표현했으나, 이후 견(犬)을 더한 사(獅)로 발전했는데 이렇게 해서 외래어적인 모습을 감췄다. 더욱 중국화하고 현지화한 결과이다. 의미와 독음의 결합으로 이뤄진 ‘형성자’가 한자의 대표적인 구조이기 때문에 상형이나 회의나 불완전한 형성자는 더욱 완전한 형성구조로 가는 것이 중국화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사(獅)는 묘하게도 백수(百獸)의 우두머리로 최고가는(師) 동물(犭=犬)이라는 뜻을 담았고, 중국의 정서에 더욱 부합해 원래부터 중국 한자였던 것처럼 위장해 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4. 사(師)의 변천: 공자 시기에 학술 전수자로 변화
역사 문헌을 살피면 [후한서] ‘반표전(班彪傳)’에서 ‘사자’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한나라 화제가 즉위한 해) 월지국(Indo-Scythians)이 한나라를 도와 거사국을 공격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해(88년) 월지국에서 진귀한 보물과 부발(符拔: 꼬리가 긴 사슴 비슷하게 생긴 짐승)과 사자를 공물로 보내왔으며, 이를 계기로 한나라의 공주를 원했다. 그러나 반초는 이를 거절하고서 사신을 되돌려 보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 두 나라는 서로 원한을 갖게 됐다.” 또 [후한서] ‘순제기(順帝紀)’에서는 “양가(陽嘉) 2년(133년) 카슈가르에서 사자와 낙타를 보내 왔다”라고 했다.
또 다른 기록도 있다. 547년에 완성된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제3권’에 의하면 “사자는 페르시아의 왕이 헌상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자료에 근거해 볼 때 ‘사자’는 후한 때인 서기 100년 전후로 해서 중앙아시아의 월지국이나 카슈가르, 혹은 페르시아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처음 중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도덕규범의 임무도 더해져
‘사자’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처음 보는 이 특이한 짐승을 어떤 한자로 표현했을까?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사자를 사(師)로 표기했는데, 지금의 사(獅)에서 ‘짐승’을 뜻하는 견(犬=犭)이 빠진 모습이다.
사(師)는 당시 사자가 들어왔던 지역의 독음을 그대로 반역한 결과로 음역어였다. 물론 이론은 있지만, 당시 이란어에서는 사자를 ‘사러(śarɤ)’, 소그디아 어(Sogdian)에서는 ‘*스러(*šrɤw)’나 ‘*사러(*šarɤə)’ 등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師)는 이의 대역음으로 보고 있다(나상배, [언어와 문화] 참조).
사자가 처음 한나라 조정에 헌상됐을 때의 사자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호랑이와 비슷한데 앞쪽은 누런 색에다 구레나룻 수염이 있었고 꼬리 끝에는 털이 커다랗게 났다.” 처음에는 음역해 단순히 사(師)로 표현했으나, 이후 견(犬)을 더한 사(獅)로 발전했는데 이렇게 해서 외래어적인 모습을 감췄다. 더욱 중국화하고 현지화한 결과이다. 의미와 독음의 결합으로 이뤄진 ‘형성자’가 한자의 대표적인 구조이기 때문에 상형이나 회의나 불완전한 형성자는 더욱 완전한 형성구조로 가는 것이 중국화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사(獅)는 묘하게도 백수(百獸)의 우두머리로 최고가는(師) 동물(犭=犬)이라는 뜻을 담았고, 중국의 정서에 더욱 부합해 원래부터 중국 한자였던 것처럼 위장해 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4. 사(師)의 변천: 공자 시기에 학술 전수자로 변화
고대 중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하는 전쟁과 제사, 그중에서도 전쟁은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고, 백성들의 생존을 결정짓는 중대사였다. 그래서 [손자병법]에서도 그 시작부터 이렇게 선언했다. “전쟁이라는 것은 나라의 큰일이요, 생사의 근거이자, 존망의 길이다. 그러니 잘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다섯 가지 일로써 경영하고, 계책을 갖고 비교해 그 정황을 모색해야만 하는데 첫 번째는 도(道)요, 두 번째는 하늘(天)이요, 세 번째는 땅(地)이요, 네 번째는 장수(將)요, 다섯 번째는 군법(法)”이라고 했다.
손자가 제시했던 병법의 다섯 가지 요체 중 사람이 할 수 있는 첫째가 전쟁을 이끌 지도자 ‘장수’였다. 게다가 훌륭한 장수라면 그보다 앞서는 도(道)와 천(天)과 지(地) 모두를 꿰뚫어보는 존재여야 했을 것이다.
손자가 제시했던 병법의 다섯 가지 요체 중 사람이 할 수 있는 첫째가 전쟁을 이끌 지도자 ‘장수’였다. 게다가 훌륭한 장수라면 그보다 앞서는 도(道)와 천(天)과 지(地) 모두를 꿰뚫어보는 존재여야 했을 것이다.
원시 수렵사회에서는 적이나 야수의 침입을 먼저 알아내고 대처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가 ‘지도자’였을 것인데, 성(聖) 자는 이를 잘 반영한다. 성(聖)은 원래 지금과는 달리 口(입 구)가 빠진 耳(귀 이)와 좋을 정(이미지2 참조)으로만 구성돼 귀를 쫑긋 세우고 발돋움을 하고 선(이미지2 참조) 사람을 그렸는데 귀(耳)는 ‘뛰어난 청각을 가진 사람’, 즉 외부의 침입자를 조기에 발견해 구성원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를 상징한다.
스승에게 상석 권한 한나라 황제
갑골문 당시의 고대사회에서는 최고 지도자이자 군대의 총사령관이 임금이었듯, 군사지도자는 최고의 지위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이후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고 생사의 근거가 됐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지도자는 최고의 지혜를 가진 식자의 상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사(師)는 군사 지도자에서 출발해 철학자를 거쳐 학문을 전수하는 존재에서 뭇사람들의 도덕적 모범이 되는 존재로 발전했다. 나아가 전문 지식을 강의하고 학생을 키우는 전문인을 지칭하기까지, 사(師)는 다양한 의미 변천을 경험했으며, 그에 따른 여러 명칭도 존재했다.
군사 지도자에서 출발한 사(師)는 공자(孔子) 시기에 이르러 학술의 전수자로 변해간 것으로 추정된다. 공자는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모아 교육해 교육의 대중화에 힘쓴 사람이다. 그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모아 자신의 이상과 세상을 이롭게 할 보편적 가치는 물론 인간이 살면서 사색하고 실천해야 할 일을 학생들에게 전수했다.
그래서 사표(師表: 학식과 독행이 높아 남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라는 말이 나왔다. 한나라에 들면서 유가사상이 지배 이념으로 채택됐고, 유가의 주요 경전을 전문적으로 담당할 오경박사가 만들어지면서 사(師)에는 전문지식을 체계화하고 전수하는 임무가 더해졌다. 그 후 전문지식이 사(師)의 중요한 요소로 기능했다.
그러다 당나라에 들어 한유의 [사설]이 나오고부터는 사(師)에는 전문지식의 전수 외에도 사회의 모범적 인격을 갖춘 도덕규범으로서의 임무가 더해졌다. 그리하여 ‘스승’은 더없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 받았다. 공자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한 만세사표(萬世師表)에서처럼 스승은 만세 동안 칭송될 높은 학문과 덕행을 함께 갖춰야만 하는 존재가 됐다.
특수한 지위를 가진 존재였던 만큼 ‘스승’에 대한 명칭도 다양했다. 역사적으로 가장 보편적 명칭은 우리말에서처럼 선생(先生)이었고, 이에 준하는 말로 노사(老師)가 있다. 선생(先生)은 ‘먼저 난 사람’, 노사(老師)는 ‘나이가 들어 노련한 스승’이라는 뜻을 담았는데, 모두 많은 사람이 경험도 많고 그것이 지식과 지혜의 원천이라는 농경사회의 전통이 반영된 명칭이다. 사장(師長)은 스승을 최고의 우두머리로 모신다는 뜻을 담았고, 사부(師父)는 스승을 부모와 동일시한 명칭이다. 사부(師傅)는 왕세자의 교육을 전담했던 태부(太傅)라는 명칭에서 보듯 스승을 존중해 불렀던 명칭이다. 이 외에도 한나라 때부터 등장한 박사(博士), 송나라 때부터 등장한 교수(敎授), 산속에 자리한 서원에서 강의하는 스승이라는 뜻을 반영한 산장(山長)이라는 명칭도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서석(西席)이나 서빈(西賓)이라는 말도 있다. 글자 그대로 ‘서쪽에 앉은 사람’이나 ‘서쪽에 앉은 귀빈’이라는 뜻인데 재미난 유래를 담고 있다. 한나라 명제(明帝) 유장(劉莊, 28~75)은 황제가 되고서도 옛 스승이었던 환영(桓榮)을 몹시 흠모하고 존경했다.
한 번은 스승의 강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황제의 신분이었음에도 환영을 상석인 서쪽 자리에 앉게 하고, 자신은 동쪽에 앉아 스승을 존중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환영이 죽었을 때도 장례식에까지 직접 참여할 정도로 명제는 환영을 흠모하고 존중했다고 한다.
5. 공부(工夫)와 학습(學習)의 차이는?
스승에게 상석 권한 한나라 황제
갑골문 당시의 고대사회에서는 최고 지도자이자 군대의 총사령관이 임금이었듯, 군사지도자는 최고의 지위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이후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고 생사의 근거가 됐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지도자는 최고의 지혜를 가진 식자의 상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사(師)는 군사 지도자에서 출발해 철학자를 거쳐 학문을 전수하는 존재에서 뭇사람들의 도덕적 모범이 되는 존재로 발전했다. 나아가 전문 지식을 강의하고 학생을 키우는 전문인을 지칭하기까지, 사(師)는 다양한 의미 변천을 경험했으며, 그에 따른 여러 명칭도 존재했다.
군사 지도자에서 출발한 사(師)는 공자(孔子) 시기에 이르러 학술의 전수자로 변해간 것으로 추정된다. 공자는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모아 교육해 교육의 대중화에 힘쓴 사람이다. 그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모아 자신의 이상과 세상을 이롭게 할 보편적 가치는 물론 인간이 살면서 사색하고 실천해야 할 일을 학생들에게 전수했다.
그래서 사표(師表: 학식과 독행이 높아 남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라는 말이 나왔다. 한나라에 들면서 유가사상이 지배 이념으로 채택됐고, 유가의 주요 경전을 전문적으로 담당할 오경박사가 만들어지면서 사(師)에는 전문지식을 체계화하고 전수하는 임무가 더해졌다. 그 후 전문지식이 사(師)의 중요한 요소로 기능했다.
그러다 당나라에 들어 한유의 [사설]이 나오고부터는 사(師)에는 전문지식의 전수 외에도 사회의 모범적 인격을 갖춘 도덕규범으로서의 임무가 더해졌다. 그리하여 ‘스승’은 더없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 받았다. 공자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한 만세사표(萬世師表)에서처럼 스승은 만세 동안 칭송될 높은 학문과 덕행을 함께 갖춰야만 하는 존재가 됐다.
특수한 지위를 가진 존재였던 만큼 ‘스승’에 대한 명칭도 다양했다. 역사적으로 가장 보편적 명칭은 우리말에서처럼 선생(先生)이었고, 이에 준하는 말로 노사(老師)가 있다. 선생(先生)은 ‘먼저 난 사람’, 노사(老師)는 ‘나이가 들어 노련한 스승’이라는 뜻을 담았는데, 모두 많은 사람이 경험도 많고 그것이 지식과 지혜의 원천이라는 농경사회의 전통이 반영된 명칭이다. 사장(師長)은 스승을 최고의 우두머리로 모신다는 뜻을 담았고, 사부(師父)는 스승을 부모와 동일시한 명칭이다. 사부(師傅)는 왕세자의 교육을 전담했던 태부(太傅)라는 명칭에서 보듯 스승을 존중해 불렀던 명칭이다. 이 외에도 한나라 때부터 등장한 박사(博士), 송나라 때부터 등장한 교수(敎授), 산속에 자리한 서원에서 강의하는 스승이라는 뜻을 반영한 산장(山長)이라는 명칭도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서석(西席)이나 서빈(西賓)이라는 말도 있다. 글자 그대로 ‘서쪽에 앉은 사람’이나 ‘서쪽에 앉은 귀빈’이라는 뜻인데 재미난 유래를 담고 있다. 한나라 명제(明帝) 유장(劉莊, 28~75)은 황제가 되고서도 옛 스승이었던 환영(桓榮)을 몹시 흠모하고 존경했다.
한 번은 스승의 강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황제의 신분이었음에도 환영을 상석인 서쪽 자리에 앉게 하고, 자신은 동쪽에 앉아 스승을 존중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환영이 죽었을 때도 장례식에까지 직접 참여할 정도로 명제는 환영을 흠모하고 존중했다고 한다.
5. 공부(工夫)와 학습(學習)의 차이는?
동아시아가 세계에서 가지는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학습에 대한 열망과 중시임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는 유학 이념에 따라 일찍부터 과거제를 도입했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시험에 의해 뽑아 썼기에 유가 경전에 대한 공부는 인생을 결정하는 요소가 됐다.
이 체제에서 이 사회에서 공부는 신분상승의 결정적 요소가 됐는데 지금도 학벌이 지배하는 전통은 이를 반영한다. 이러한 전통이 공부 열풍을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일본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중국도 한국도 베트남도 국가가 필요로 하는 지식을 측정하는 시험이라는 과거제에 의해 관료제가 유지됐다.
공부(工夫)는 중국어에서는 공력이나 시간을 뜻하지만, 한국에서는 ‘공부’를 뜻하는 우리만의 고유한 뜻을 담은 한자어다. 글자 그대로 푼다면, 공(工)은 도구나 장인을 뜻해 장인처럼 ‘전문성’을 말하고, 부(夫)는 성인 남성을 뜻한다. 그래서 ‘배우는 것’을 공부(工夫)라고 하지만, 이에는 전문성과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흔적을 담고 있다.
中-모방, 日-노력, 韓-전문성 강조
이에 비해 현대 중국에서는 학습(學習, xué xí)이라고 하는데 학(學)은 집 안(宀)에서 두 손(臼)으로 새끼 매듭(爻) 지우는 법을 아이(子)가 배우는 모습을 그렸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 기억의 보조 수단이었던 새끼 매듭(결승) 짓는 법을 배우는 모습을 반영했다. 배우다가 원래 뜻이며, 모방하다· 본받다·배우는 사람·학교·학과·학문·학설·학파 등의 뜻이 나왔다.
속자에서는 윗부분을 文(글월 문)으로 줄인 학(斈)으로 쓰기도 하는데 아이(子)가 글자(文)를 배운다는 뜻을 담았다. 습(習)은 원래 羽(깃 우)와 日(날 일)로 구성돼 ‘익히다’가 원래 뜻인데 어린 새가 오랜 세월(日) 동안 반복해 날갯짓(羽)을 ‘익히는’ 모습으로부터 반복 학습(學習)과 중복의 의미를 그렸다. 이후 일(日)이 白(흰 백)으로 변해 지금처럼 됐다.
학(學)과 습(習)은 모두 갑골문에서부터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매우 오랜 전통을 가진 글자다. 원래는 각각 따로 쓰여 배우다와 반복을 통한 복습의 의미로 쓰였으나, 한나라 때의 [사기]에 이르면 이미 한 단어로 결합해 쓰였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학(學)에는 매듭 지우는 법이나 글자 등 어떤 구체적인 것을 ‘모방해 배우다’는 의미가 들었고, 습(習)에는 날갯짓을 배우듯 무한 반복해 익히다는 뜻이 담겼다. 그래서 학습(學習)에는 어떤 구체적인 것을 배워 익숙할 때까지 반복하다는 의미를 담아 창조성보다는 모방과 반복의 의미를 담았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면강(勉强, べんきょう)은 ‘힘써서(勉) 강해지다(强)’는 뜻이므로 강해지기 위해 힘쓰는 것이 ‘공부’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강해질 수 있다는, 그래서 ‘공부’는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포함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공부’나 ‘학습’에 대한 표현이 동양 삼국에서 제각각인데 중국은 모방과 무한 반복을, 일본은 어떤 목적을 위한 노력(공부)을, 한국은 전문성과 함께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6. 이 시대의 스승
한유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스승인가? 도(道)를 갖춘 사람이 바로 스승이다. 스승은 나이가 낳고 적음도, 지위가 높고 낮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도를 갖춘 자가 스승이다. 그런 스승이라면 언제라도 찾아 모시고 의문되는 것을 여쭤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길 꺼려한다. 나이가 그보다 많고, 지위가 그보다 높고, 신분도 그보다 귀하고, 학벌도 그보다 높다고, 남에게 배우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옛날의 성인들은 가르침 구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보다 나은 부분이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가 가르침을 구했다.
세태 탓하기 전에 제 역할 하는지 돌아봐야
성인이라 불리는 공자도 담자(郯子)를 찾아가 행정제도를, 장홍(萇弘)을 찾아가 음악의 정신을, 사장(師襄)을 찾아가 악기연주법을, 노자(老子)를 찾아가 세상의 질서에 대해 여쭸다.
언제나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찾아 가르침을 구하고 배우는 자세, 이것이 성인이 가졌던 미덕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그러길 꺼린다. 자기보다 어리다고, 자기보다 지위가 낮다고, 자기보다 신분이 못하다고,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길 꺼리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더욱 성인이 되고, 소인배는 더욱 소인배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공자의 말처럼 “세 사람이 길을 걸어도 반드시 스승이 있는 법이다(三人行 必有我師).” 그런데 어찌 가르침을 구하지 않고, 사람을 따질 수 있겠는가? 나보다 더 나은 도(道)를 가졌으면 그가 바로 스승이다.
배움에 대한 갈망과 스승에 대한 존중, 이는 동양의 아름다운 전통이자 지켜야 할 유산이다. 어쩌면 미래사회를 대비해야 할 좋은 자산일지도 모른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나 ‘스승은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속담은 이에 대한 존중을 반영해 줄 것이다. 스승이 자신을 낳고 키워준 아버지나, 전통사회에서 최고의 지위에 놓였던 임금과 같은 대우를 받았던 것은 스승이 그만큼의 지대한 존재였고 그러한 사명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스승을 존중하던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졌다고, 교권(敎權)이 무너졌다고들 말이 많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시점, 스승의 권위와 대우라는 전통을 논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되물을 때이다. 지금의 스승은 한유가 말했던 그 세 가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실천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지식 장사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를 반성해 볼 때다.
4차 산업혁명에 시작된 지금,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빨라 10년 후의 내일도 예측하기가 어려워진 사회이다. 10년 후,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발전, 기후환경의 변화 등으로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 어떤 직업이 사라지고 존재할 것인가? 또 인간의 본질은 또 어떻게 설정될 것인가?
이런 근원적인 문제조차로 예측하기 어렵다. 지금 태어난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입할 2050년이라면 인류의 존속 가능조차 가늠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시기,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사색의 힘, 통찰의 힘, 소통의 힘은 더욱 절실하고 간절하다. 동양의 공부와 스승에 대한 훌륭한 전통이 이를 해결할 훌륭한 열쇠가 되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스승을 찾아 의문을 해소하고 미래에 대한 예지를 배우고 인류의 공존과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 이 땅의 선생들이라면 모름지기 이를 위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스승’으로 남을 것이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고, [한국역대한자자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
이 체제에서 이 사회에서 공부는 신분상승의 결정적 요소가 됐는데 지금도 학벌이 지배하는 전통은 이를 반영한다. 이러한 전통이 공부 열풍을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일본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중국도 한국도 베트남도 국가가 필요로 하는 지식을 측정하는 시험이라는 과거제에 의해 관료제가 유지됐다.
공부(工夫)는 중국어에서는 공력이나 시간을 뜻하지만, 한국에서는 ‘공부’를 뜻하는 우리만의 고유한 뜻을 담은 한자어다. 글자 그대로 푼다면, 공(工)은 도구나 장인을 뜻해 장인처럼 ‘전문성’을 말하고, 부(夫)는 성인 남성을 뜻한다. 그래서 ‘배우는 것’을 공부(工夫)라고 하지만, 이에는 전문성과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흔적을 담고 있다.
中-모방, 日-노력, 韓-전문성 강조
이에 비해 현대 중국에서는 학습(學習, xué xí)이라고 하는데 학(學)은 집 안(宀)에서 두 손(臼)으로 새끼 매듭(爻) 지우는 법을 아이(子)가 배우는 모습을 그렸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 기억의 보조 수단이었던 새끼 매듭(결승) 짓는 법을 배우는 모습을 반영했다. 배우다가 원래 뜻이며, 모방하다· 본받다·배우는 사람·학교·학과·학문·학설·학파 등의 뜻이 나왔다.
속자에서는 윗부분을 文(글월 문)으로 줄인 학(斈)으로 쓰기도 하는데 아이(子)가 글자(文)를 배운다는 뜻을 담았다. 습(習)은 원래 羽(깃 우)와 日(날 일)로 구성돼 ‘익히다’가 원래 뜻인데 어린 새가 오랜 세월(日) 동안 반복해 날갯짓(羽)을 ‘익히는’ 모습으로부터 반복 학습(學習)과 중복의 의미를 그렸다. 이후 일(日)이 白(흰 백)으로 변해 지금처럼 됐다.
학(學)과 습(習)은 모두 갑골문에서부터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매우 오랜 전통을 가진 글자다. 원래는 각각 따로 쓰여 배우다와 반복을 통한 복습의 의미로 쓰였으나, 한나라 때의 [사기]에 이르면 이미 한 단어로 결합해 쓰였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학(學)에는 매듭 지우는 법이나 글자 등 어떤 구체적인 것을 ‘모방해 배우다’는 의미가 들었고, 습(習)에는 날갯짓을 배우듯 무한 반복해 익히다는 뜻이 담겼다. 그래서 학습(學習)에는 어떤 구체적인 것을 배워 익숙할 때까지 반복하다는 의미를 담아 창조성보다는 모방과 반복의 의미를 담았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면강(勉强, べんきょう)은 ‘힘써서(勉) 강해지다(强)’는 뜻이므로 강해지기 위해 힘쓰는 것이 ‘공부’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강해질 수 있다는, 그래서 ‘공부’는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포함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공부’나 ‘학습’에 대한 표현이 동양 삼국에서 제각각인데 중국은 모방과 무한 반복을, 일본은 어떤 목적을 위한 노력(공부)을, 한국은 전문성과 함께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6. 이 시대의 스승
한유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스승인가? 도(道)를 갖춘 사람이 바로 스승이다. 스승은 나이가 낳고 적음도, 지위가 높고 낮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도를 갖춘 자가 스승이다. 그런 스승이라면 언제라도 찾아 모시고 의문되는 것을 여쭤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길 꺼려한다. 나이가 그보다 많고, 지위가 그보다 높고, 신분도 그보다 귀하고, 학벌도 그보다 높다고, 남에게 배우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옛날의 성인들은 가르침 구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보다 나은 부분이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가 가르침을 구했다.
세태 탓하기 전에 제 역할 하는지 돌아봐야
성인이라 불리는 공자도 담자(郯子)를 찾아가 행정제도를, 장홍(萇弘)을 찾아가 음악의 정신을, 사장(師襄)을 찾아가 악기연주법을, 노자(老子)를 찾아가 세상의 질서에 대해 여쭸다.
언제나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찾아 가르침을 구하고 배우는 자세, 이것이 성인이 가졌던 미덕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그러길 꺼린다. 자기보다 어리다고, 자기보다 지위가 낮다고, 자기보다 신분이 못하다고,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길 꺼리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더욱 성인이 되고, 소인배는 더욱 소인배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공자의 말처럼 “세 사람이 길을 걸어도 반드시 스승이 있는 법이다(三人行 必有我師).” 그런데 어찌 가르침을 구하지 않고, 사람을 따질 수 있겠는가? 나보다 더 나은 도(道)를 가졌으면 그가 바로 스승이다.
배움에 대한 갈망과 스승에 대한 존중, 이는 동양의 아름다운 전통이자 지켜야 할 유산이다. 어쩌면 미래사회를 대비해야 할 좋은 자산일지도 모른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나 ‘스승은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속담은 이에 대한 존중을 반영해 줄 것이다. 스승이 자신을 낳고 키워준 아버지나, 전통사회에서 최고의 지위에 놓였던 임금과 같은 대우를 받았던 것은 스승이 그만큼의 지대한 존재였고 그러한 사명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스승을 존중하던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졌다고, 교권(敎權)이 무너졌다고들 말이 많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시점, 스승의 권위와 대우라는 전통을 논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되물을 때이다. 지금의 스승은 한유가 말했던 그 세 가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실천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지식 장사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를 반성해 볼 때다.
4차 산업혁명에 시작된 지금,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빨라 10년 후의 내일도 예측하기가 어려워진 사회이다. 10년 후,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발전, 기후환경의 변화 등으로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 어떤 직업이 사라지고 존재할 것인가? 또 인간의 본질은 또 어떻게 설정될 것인가?
이런 근원적인 문제조차로 예측하기 어렵다. 지금 태어난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입할 2050년이라면 인류의 존속 가능조차 가늠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시기,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사색의 힘, 통찰의 힘, 소통의 힘은 더욱 절실하고 간절하다. 동양의 공부와 스승에 대한 훌륭한 전통이 이를 해결할 훌륭한 열쇠가 되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스승을 찾아 의문을 해소하고 미래에 대한 예지를 배우고 인류의 공존과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 이 땅의 선생들이라면 모름지기 이를 위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스승’으로 남을 것이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고, [한국역대한자자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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