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모방·답습 버릴 때 진정한 지혜 획득으로 이어져
새로운 한 해 시작하는 지금이 ‘배움’의 의미 생각해 볼 때
새로운 한 해 시작하는 지금이 ‘배움’의 의미 생각해 볼 때
1. 배움이란?
배우고 수시로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이 땅에 사는 우리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고, 웬만한 사람이면 외우고 있을 법한 매우 귀에 익은 말이 아니던가? 인류 최고 고전의 하나로 알려진 [논어]의 시작 맨 첫 구절이다.
[논어]는 그 많고 많은 개념과 가치 중에서도 이렇듯 ‘배움과 익힘’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공자가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고, 그의 핵심사상이라는 말이다. ‘배움과 익힘’ 즉 학습(學習)은 그 후 중국은 물론 유가문화권을 사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운명이 됐고, 살아가면서 언제나 간직해야 할 화두가 됐으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 그것은 [논어]로 대표되는 유가사상이 오랫동안 이들 제국의 핵심 가치관이자 주류 통치철학으로 기능해 왔던 때문이다.
배우고 수시로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이 땅에 사는 우리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고, 웬만한 사람이면 외우고 있을 법한 매우 귀에 익은 말이 아니던가? 인류 최고 고전의 하나로 알려진 [논어]의 시작 맨 첫 구절이다.
[논어]는 그 많고 많은 개념과 가치 중에서도 이렇듯 ‘배움과 익힘’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공자가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고, 그의 핵심사상이라는 말이다. ‘배움과 익힘’ 즉 학습(學習)은 그 후 중국은 물론 유가문화권을 사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운명이 됐고, 살아가면서 언제나 간직해야 할 화두가 됐으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 그것은 [논어]로 대표되는 유가사상이 오랫동안 이들 제국의 핵심 가치관이자 주류 통치철학으로 기능해 왔던 때문이다.
[논어]는 시작부터 이렇게 선언했지만, 배우고 익히는 것이 보통사람들에게 즐거울 리 만무하다. 즐겁기는커녕 오히려 괴롭거나 성가신 일이라고 해야 더 사실적일 것이다. 배우고 익히는 일이 즐거운 일이 되려면, 또 일상의 하나로 자리 잡으려면, 그 사회나 시민이 상당한 수준을 갖춘 문화적·철학적 경지에 올라야만 한다.
그럼에도 공자의 이러한 대담한 선언으로 학습이 동양에서는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고 모두가 이뤄야 할 꿈이 됐다. 이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 성공한 사람이 돼 가족과 가문을 빛내고, 사회의 우뚝 선 지도자가 됐다. 그것은 모두의 좌우명이 됐고, 그리고 늘 지니고 다녀야 했던 자신을 지켜주는 신비한 호신부 그 자체였다.
여하튼 이 지역을 살아온 사람들은 이 선언 덕택에 평생을 배움에 게을리하지 않았고, 배움을 삶과 인생의 자산으로 삼아 자신은 물론 가문과 사회와 나라를 풍요롭게 일궈왔다. 20세기 중·후반에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세상의 주목을 크게 받았었다.
근대화도 산업화도 늦었고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황무지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열정적인 배움과 가족과 국가에 대한 희생정신, 일에 대한 경건함과 특유의 근실함 등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유가문화권’, ‘한자문화권’, ‘유가자본주의’라 불리는 이들 지역, 그 찬사의 중심에 ‘배움’이 근원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한 지금, 동양의 찬란한 전통을 만들었던 이러한 학습(學習)에 대한 맹신과 숭배, 그리고 축적된 경험은 오히려 건강한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로 등장했다고 생각된다. 농경사회를 거쳐 근대 이후 지식산업 사회까지 ‘지식’이 개인과 사회 발전의 절대적 자산이 됐던 시절, ‘배우고 수시로 익힘’은 더없이 훌륭한 법보(法寶)였다.
그러나 지식을 넘어선 지식이 지식을 융합한 창의성이 세상을 이끌고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가 된 지금, ‘배우고 익히는’ 식의 전통적인 학습에 담긴 단순 학습과 반복과 답습의 인식이 오히려 창발(創發)적 발전을 저해하는 위험한 요소로 남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무엇일까? 학(學)과 습(習)의 어원을 따라 찾아가 보자.
2. 학(學)과 습(習): 구체적 지식의 무한 반복
그럼에도 공자의 이러한 대담한 선언으로 학습이 동양에서는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고 모두가 이뤄야 할 꿈이 됐다. 이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 성공한 사람이 돼 가족과 가문을 빛내고, 사회의 우뚝 선 지도자가 됐다. 그것은 모두의 좌우명이 됐고, 그리고 늘 지니고 다녀야 했던 자신을 지켜주는 신비한 호신부 그 자체였다.
여하튼 이 지역을 살아온 사람들은 이 선언 덕택에 평생을 배움에 게을리하지 않았고, 배움을 삶과 인생의 자산으로 삼아 자신은 물론 가문과 사회와 나라를 풍요롭게 일궈왔다. 20세기 중·후반에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세상의 주목을 크게 받았었다.
근대화도 산업화도 늦었고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황무지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열정적인 배움과 가족과 국가에 대한 희생정신, 일에 대한 경건함과 특유의 근실함 등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유가문화권’, ‘한자문화권’, ‘유가자본주의’라 불리는 이들 지역, 그 찬사의 중심에 ‘배움’이 근원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한 지금, 동양의 찬란한 전통을 만들었던 이러한 학습(學習)에 대한 맹신과 숭배, 그리고 축적된 경험은 오히려 건강한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로 등장했다고 생각된다. 농경사회를 거쳐 근대 이후 지식산업 사회까지 ‘지식’이 개인과 사회 발전의 절대적 자산이 됐던 시절, ‘배우고 수시로 익힘’은 더없이 훌륭한 법보(法寶)였다.
그러나 지식을 넘어선 지식이 지식을 융합한 창의성이 세상을 이끌고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가 된 지금, ‘배우고 익히는’ 식의 전통적인 학습에 담긴 단순 학습과 반복과 답습의 인식이 오히려 창발(創發)적 발전을 저해하는 위험한 요소로 남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무엇일까? 학(學)과 습(習)의 어원을 따라 찾아가 보자.
2. 학(學)과 습(習): 구체적 지식의 무한 반복
배워서 익히는 것’이라 정의되는 학습(學習)은 열독(閱讀)과 청취와 관찰과 연구와 실천 등의 과정을 거쳐 얻은 지식이나 기능, 혹은 인지 과정을 말한다. 사람이 남긴 축적된 지식을 읽어내려면 글자를 배워야 하고, 남의 설명이나 강의를 청취하려면 말을 배워야 한다. 관찰을 하려면 사물과 세계에 대한 체계와 질서를 배워야 하며, 연구를 하려면 과학적 사고 방법을 배워야 하고, 실천을 하려면 사회에 대한 객관적 시각과 능동성을 확보한 응용 능력을 배워야 한다.
배움이란 끝없는 반복 통해 날갯짓을 터득하는 것
이러한 ‘배움’은 모두 구체적인 것의 배움과 그에 대한 무한한 반복에서 오는 지식 축적을 출발점으로 삼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개념이 바로 ‘학습’이라는 사실을 한자라는 글자 속에 이미지화해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배움이란 끝없는 반복 통해 날갯짓을 터득하는 것
이러한 ‘배움’은 모두 구체적인 것의 배움과 그에 대한 무한한 반복에서 오는 지식 축적을 출발점으로 삼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개념이 바로 ‘학습’이라는 사실을 한자라는 글자 속에 이미지화해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학습(學習)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예기(禮記)]라는 책으로 알려졌다. ‘월령(月令)’편에서 “한여름이 되면 매가 배우기 시작한다[孟夏之月 (…) 鷹乃學習]”고 했는데, 진호(陳澔, 1260~1341)가 풀이한 [예기집설(禮記集說)]에서 “배운다(學習)는 것은 새끼 매가 끝없는 반복을 통해 날갯짓을 배우는 것을 말한다(雛學數飛也)”라고 했다.
학습(學習)은 학(學)과 습(習)이라는 전혀 다른 글자가 결합된 단어다. 학습(學習)에 대한 앞의 풀이는 사실 학(學)과 습(習)의 어원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먼저 학(學)은 갑골문에서부터 등장하는데, 새끼 매듭(爻) 짓는 법을 집(宀)에서 두 손(臼)으로 배우는 모습을 그렸다.
이후 대상을 강조하기 위해 아이(子)가 더해졌고, 강제하는 수단인 회초리(攴=攵·복)가 더해지기도 했다. 매듭짓는 법은 달리 결승(結繩)이라고 하는데, 문자가 생겨나기 전 기억의 보조수단으로 삼던 주요 방법 중의 하나였다. 잉카인들이 사용했던 퀴푸(Quipu)가 바로 결승의 일종이다.
인간 사회의 의사소통과 지혜의 전수를 위해 제일 먼저 말과 문자를 가르치지만, 문자가 없던 시절에는 당시의 소통도구였던 매듭짓는 법을 먼저 가르치고 배웠던 것이다. 이로부터 ‘ 배우다’는 뜻이 만들어졌으며, 모방하다, 본받다, 배우는 사람, 학교, 학과, 학문, 학설, 학파 등의 다양한 뜻이 나왔다.
또 어떤 경우에는 학(學)을 달리 斅(가르칠 효)라고도 썼는데, 이는 원래 글자인 학(學)에 매를 들고 있는 모습(攴=攵)이 더해진 형태다. 학습을 강제하는 옛날의 교육법이 반영된 모습이다. 지금은 독립된 글자로 분화했으나 여전히 학(學)과 같은 글자로도 쓰인다. 학(學)은 이후 복잡한 구조를 간단하게 하고자 윗부분을 줄여 쓰기도 했고, 현대 중국의 간화자에서는 더욱 간단한 모습의 학(学)으로 쓴다.
학(學)의 어원이 이처럼 기초적인 것을 모방하고 외운다는 의미를 담았다면 습(習)은 반복성을 강조한 글자다. 습(習)은 원래 羽(깃 우)와 日(날 일)로 구성돼 ‘익히다’가 원래 뜻인데, 어린 새가 오랜 세월(日) 동안 반복해 날갯짓(羽)을 ‘익히는’ 모습으로부터 반복 학습의 의미를 그렸다.
이후 일(日)이 白(흰 백)으로 변해 지금처럼 됐는데 백(白)은 自(스스로 자: 鼻의 원래 글자)의 잘못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스스로(自) 배우는 날갯짓(羽)’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간화자에서는 백(白)을 생략하고 또 우(羽)의 한쪽만 남겨 습(习)으로 쓴다.
우리는 학(學)과 습(習)의 어원을 통해 고대 중국인들이 생각했던 ‘배움’의 근본적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즉 학습(學習)은 인간의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인 새끼매듭(문자의 전신)을 어린 새가 날갯짓을 배우듯이 무한 반복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모습을 반영해 만든 단어다. ‘학습’이라는 극히 추상적 개념을 이렇듯 구상적으로 그려냈다. 기초적인 글자를 배우고, 그것을 무한 반복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이미지가 그대로 녹아 눈에 보이듯 선하다. 한 번 보기만 하면, 한 번 듣기만 하면, 쉽게 기억될 수 있도록 고안된 한자의 뛰어난 특성이 아닐 수 없다.
3. 배움(學)과 가르침(敎)의 특수관계
배움이 있으면 가르침이 있기 마련이다. 언뜻 보기에 이 둘은 대립하는 개념으로 보이지만, 한자에서는 서로 전화 가능한 개념이다. 그것은 ‘가르치다’는 뜻의 교(敎)의 어원이 학(學)과 같은 데서 나온 데서 근원했기 때문이다.
교(敎=教)도 오래된 글자로 갑골문에서부터 등장하는데 子(아들 자)와 攵(=攴, 칠 복)이 의미부이고 爻(효 효)가 소리부로 됐다. 아이(子)에게 새끼 매듭(爻) 짓는 법을 회초리로 치며(攵) 가르치는 모습을 그렸다. 학(學)에서처럼 문자 출현 이전의 기억 보조수단이었던 결승을 가르치는 것이 가르침 즉 교육(敎育)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지식이나 기능 등을 전수(傳授)하다는 뜻이 생겼고, 학술 등의 유파를 뜻해 종교(宗敎)라는 뜻까지 나왔다.
이후 남을 가르치다는 뜻으로부터 ‘시키다’는 사역동사로도 쓰였다. 교(敎)는 달리 孝(효도 효)가 소리부이고 복(攵)이 의미구조로 된 교(教)로 쓰기도 하는데, 그것은 유가사상이 지배하던 시절, ‘효’가 국가 지탱의 중요한 통치 개념이자 교육의 최고 대상의 하나였음을 적극 반영했다.
敎와 學은 같은 데서 출발… 敎學相長
이처럼 교(敎)와 학(學)은 자형 속에 집(宀)이 들었느냐의 차이일 뿐, 완전히 같은 데서 출발했다. 그래서 교(敎)는 학(學)이고 학(學)은 교(敎)이다. 이 때문에 교(敎)와 학(學)은 자주 짝을 이뤄 등장하기도 한다. 바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이 대표적이다. “배워 보고서야 부족함을 알고, 가르쳐 보고서야 어려움을 알게 된다. 부족함을 알고서야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으며, 어려움을 알고서야 스스로 강해질 수 있다. 그래서 가르침과 배움은 다 같이 자신을 자라나게 한다.” [예기] ‘학기(學記)’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대립하는 두 개념의 절묘한 결합이자 통일이 아니던가? 뛰어난 혜지가 돋보이는 해설이다. 가르침이 배움이요, 배움이 가르침이다. 마치 선문답과 같은 말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남을 잠시라도 가르쳐본 사람이라면 쉬 이해될 것이다.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도, 아무리 무지한 대상이라도, 아무리 천한 부류라 하더라도, 그들을 가르쳐보면 그 속에서 새로운 배움을 얻게 된다. 그래서 교학상장이라는 말이 나왔고,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도 나왔던 것이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중국어에서는 우리의 교육(敎育)에 해당하는 말에 교육 외에도 교학(教學)이라는 단어가 더 자주 쓰인다. 우리말에서는 ‘교육’ 하나로 번역되지만, 이들 둘 사이에는 제법 큰 차이가 존재한다. 즉 교육은 일방적으로 상대를 가르치다라는 뜻이지만, 교학은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의 상호교감과 소통을 통해 ‘교육’을 완성한다는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방의 일방적 가르침보다 상호 소통하고 이를 통해 진정한 가르침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이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고 더 현실적인 교육이 아니던가?
한자에서는 그 아득한 옛날, 갑골문 시대에 이미 이러한 지혜를 발견했던 것일까? 교(敎)와 학(學)을 독립된 글자가 아니라 같은 데서 분화한 글자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예기]의 교학상장에서처럼 교(敎)와 학(學)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철리적 해석이 이뤄지기 훨씬 이전에 고대 중국인들은 글자를 창제하면서 이미 그 전부터 축적돼온 이러한 혜지(慧智)를 글자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던 것이다.
나아가 교(敎)의 어원이 학(學)과 같다는 것은 배움의 궁극적 목표가 남을 가르치는 데 있음을 반영했다고도 할 수 있다. 유가에서 배움이란 도가나 불교에서처럼 현상을 넘어서는 깨우침에 이르러 진정한 ‘앎’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말처럼 대단히 현실적이고, 교학이라는 말처럼 대상을 교육하고 교화한다는 현실적 목표가 내재돼 있다.
노자 “道 행하는 것은 지식을 들어내는 것”
잘 알다시피 노자는 이러한 유가의 앎에 대한 태도를 극히 부정했다. 그래서 “배우는 것은 날로 지식을 더하는 것이요, 도를 행하는 것은 날로 지식을 들어내는 것이다(爲學日益爲道日損)”라고 했다. 날로 배워 ‘지식’이 쌓이면 그 지식으로 남을 가르치고 정치를 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져 진정한 앎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도를 행하게 되면 구체적인 지식이 없어져 이러한 욕망에서 해방되는 바 그것이 진정한 배움이요 해탈이다.
뿐만 아니다. 구체적 지식이 자꾸 쌓이면 그 지식에 옭매여 세상을 보는 눈이,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는 지혜로운 눈이 점차 좁아지고 줄어들어 제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를 행한다면 구체적 지식과 잣대가 줄어들어 세상을 보는 눈이, 사람을 보는 눈이, 만물을 보는 눈이 더욱 넓어지고 자유로워진다.
이처럼 고대 중국의 배움은 그 출발에서부터 현실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배움의 궁극적 목표는 나 자신의 진정한 득도나 해탈이 아니라 그 출발부터 남을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는 동양의 지식인들이 배움이라는 것을 입신양명의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삼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가르치면서까지 배움의 자세를 취했듯 끊임없는 배움의 추구, 이것이 바로 동아시아가 중시했던 전통이자 가치였다. 이를 통해 그들은 다른 문화권이 이루지 못했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던 것이다.
4. 학(學)에 담긴 부정성 제거
학습(學習)은 학(學)과 습(習)이라는 전혀 다른 글자가 결합된 단어다. 학습(學習)에 대한 앞의 풀이는 사실 학(學)과 습(習)의 어원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먼저 학(學)은 갑골문에서부터 등장하는데, 새끼 매듭(爻) 짓는 법을 집(宀)에서 두 손(臼)으로 배우는 모습을 그렸다.
이후 대상을 강조하기 위해 아이(子)가 더해졌고, 강제하는 수단인 회초리(攴=攵·복)가 더해지기도 했다. 매듭짓는 법은 달리 결승(結繩)이라고 하는데, 문자가 생겨나기 전 기억의 보조수단으로 삼던 주요 방법 중의 하나였다. 잉카인들이 사용했던 퀴푸(Quipu)가 바로 결승의 일종이다.
인간 사회의 의사소통과 지혜의 전수를 위해 제일 먼저 말과 문자를 가르치지만, 문자가 없던 시절에는 당시의 소통도구였던 매듭짓는 법을 먼저 가르치고 배웠던 것이다. 이로부터 ‘ 배우다’는 뜻이 만들어졌으며, 모방하다, 본받다, 배우는 사람, 학교, 학과, 학문, 학설, 학파 등의 다양한 뜻이 나왔다.
또 어떤 경우에는 학(學)을 달리 斅(가르칠 효)라고도 썼는데, 이는 원래 글자인 학(學)에 매를 들고 있는 모습(攴=攵)이 더해진 형태다. 학습을 강제하는 옛날의 교육법이 반영된 모습이다. 지금은 독립된 글자로 분화했으나 여전히 학(學)과 같은 글자로도 쓰인다. 학(學)은 이후 복잡한 구조를 간단하게 하고자 윗부분을 줄여 쓰기도 했고, 현대 중국의 간화자에서는 더욱 간단한 모습의 학(学)으로 쓴다.
학(學)의 어원이 이처럼 기초적인 것을 모방하고 외운다는 의미를 담았다면 습(習)은 반복성을 강조한 글자다. 습(習)은 원래 羽(깃 우)와 日(날 일)로 구성돼 ‘익히다’가 원래 뜻인데, 어린 새가 오랜 세월(日) 동안 반복해 날갯짓(羽)을 ‘익히는’ 모습으로부터 반복 학습의 의미를 그렸다.
이후 일(日)이 白(흰 백)으로 변해 지금처럼 됐는데 백(白)은 自(스스로 자: 鼻의 원래 글자)의 잘못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스스로(自) 배우는 날갯짓(羽)’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간화자에서는 백(白)을 생략하고 또 우(羽)의 한쪽만 남겨 습(习)으로 쓴다.
우리는 학(學)과 습(習)의 어원을 통해 고대 중국인들이 생각했던 ‘배움’의 근본적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즉 학습(學習)은 인간의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인 새끼매듭(문자의 전신)을 어린 새가 날갯짓을 배우듯이 무한 반복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모습을 반영해 만든 단어다. ‘학습’이라는 극히 추상적 개념을 이렇듯 구상적으로 그려냈다. 기초적인 글자를 배우고, 그것을 무한 반복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이미지가 그대로 녹아 눈에 보이듯 선하다. 한 번 보기만 하면, 한 번 듣기만 하면, 쉽게 기억될 수 있도록 고안된 한자의 뛰어난 특성이 아닐 수 없다.
3. 배움(學)과 가르침(敎)의 특수관계
배움이 있으면 가르침이 있기 마련이다. 언뜻 보기에 이 둘은 대립하는 개념으로 보이지만, 한자에서는 서로 전화 가능한 개념이다. 그것은 ‘가르치다’는 뜻의 교(敎)의 어원이 학(學)과 같은 데서 나온 데서 근원했기 때문이다.
교(敎=教)도 오래된 글자로 갑골문에서부터 등장하는데 子(아들 자)와 攵(=攴, 칠 복)이 의미부이고 爻(효 효)가 소리부로 됐다. 아이(子)에게 새끼 매듭(爻) 짓는 법을 회초리로 치며(攵) 가르치는 모습을 그렸다. 학(學)에서처럼 문자 출현 이전의 기억 보조수단이었던 결승을 가르치는 것이 가르침 즉 교육(敎育)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지식이나 기능 등을 전수(傳授)하다는 뜻이 생겼고, 학술 등의 유파를 뜻해 종교(宗敎)라는 뜻까지 나왔다.
이후 남을 가르치다는 뜻으로부터 ‘시키다’는 사역동사로도 쓰였다. 교(敎)는 달리 孝(효도 효)가 소리부이고 복(攵)이 의미구조로 된 교(教)로 쓰기도 하는데, 그것은 유가사상이 지배하던 시절, ‘효’가 국가 지탱의 중요한 통치 개념이자 교육의 최고 대상의 하나였음을 적극 반영했다.
敎와 學은 같은 데서 출발… 敎學相長
이처럼 교(敎)와 학(學)은 자형 속에 집(宀)이 들었느냐의 차이일 뿐, 완전히 같은 데서 출발했다. 그래서 교(敎)는 학(學)이고 학(學)은 교(敎)이다. 이 때문에 교(敎)와 학(學)은 자주 짝을 이뤄 등장하기도 한다. 바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이 대표적이다. “배워 보고서야 부족함을 알고, 가르쳐 보고서야 어려움을 알게 된다. 부족함을 알고서야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으며, 어려움을 알고서야 스스로 강해질 수 있다. 그래서 가르침과 배움은 다 같이 자신을 자라나게 한다.” [예기] ‘학기(學記)’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대립하는 두 개념의 절묘한 결합이자 통일이 아니던가? 뛰어난 혜지가 돋보이는 해설이다. 가르침이 배움이요, 배움이 가르침이다. 마치 선문답과 같은 말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남을 잠시라도 가르쳐본 사람이라면 쉬 이해될 것이다.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도, 아무리 무지한 대상이라도, 아무리 천한 부류라 하더라도, 그들을 가르쳐보면 그 속에서 새로운 배움을 얻게 된다. 그래서 교학상장이라는 말이 나왔고,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도 나왔던 것이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중국어에서는 우리의 교육(敎育)에 해당하는 말에 교육 외에도 교학(教學)이라는 단어가 더 자주 쓰인다. 우리말에서는 ‘교육’ 하나로 번역되지만, 이들 둘 사이에는 제법 큰 차이가 존재한다. 즉 교육은 일방적으로 상대를 가르치다라는 뜻이지만, 교학은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의 상호교감과 소통을 통해 ‘교육’을 완성한다는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방의 일방적 가르침보다 상호 소통하고 이를 통해 진정한 가르침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이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고 더 현실적인 교육이 아니던가?
한자에서는 그 아득한 옛날, 갑골문 시대에 이미 이러한 지혜를 발견했던 것일까? 교(敎)와 학(學)을 독립된 글자가 아니라 같은 데서 분화한 글자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예기]의 교학상장에서처럼 교(敎)와 학(學)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철리적 해석이 이뤄지기 훨씬 이전에 고대 중국인들은 글자를 창제하면서 이미 그 전부터 축적돼온 이러한 혜지(慧智)를 글자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던 것이다.
나아가 교(敎)의 어원이 학(學)과 같다는 것은 배움의 궁극적 목표가 남을 가르치는 데 있음을 반영했다고도 할 수 있다. 유가에서 배움이란 도가나 불교에서처럼 현상을 넘어서는 깨우침에 이르러 진정한 ‘앎’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말처럼 대단히 현실적이고, 교학이라는 말처럼 대상을 교육하고 교화한다는 현실적 목표가 내재돼 있다.
노자 “道 행하는 것은 지식을 들어내는 것”
잘 알다시피 노자는 이러한 유가의 앎에 대한 태도를 극히 부정했다. 그래서 “배우는 것은 날로 지식을 더하는 것이요, 도를 행하는 것은 날로 지식을 들어내는 것이다(爲學日益爲道日損)”라고 했다. 날로 배워 ‘지식’이 쌓이면 그 지식으로 남을 가르치고 정치를 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져 진정한 앎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도를 행하게 되면 구체적인 지식이 없어져 이러한 욕망에서 해방되는 바 그것이 진정한 배움이요 해탈이다.
뿐만 아니다. 구체적 지식이 자꾸 쌓이면 그 지식에 옭매여 세상을 보는 눈이,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는 지혜로운 눈이 점차 좁아지고 줄어들어 제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를 행한다면 구체적 지식과 잣대가 줄어들어 세상을 보는 눈이, 사람을 보는 눈이, 만물을 보는 눈이 더욱 넓어지고 자유로워진다.
이처럼 고대 중국의 배움은 그 출발에서부터 현실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배움의 궁극적 목표는 나 자신의 진정한 득도나 해탈이 아니라 그 출발부터 남을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는 동양의 지식인들이 배움이라는 것을 입신양명의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삼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가르치면서까지 배움의 자세를 취했듯 끊임없는 배움의 추구, 이것이 바로 동아시아가 중시했던 전통이자 가치였다. 이를 통해 그들은 다른 문화권이 이루지 못했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던 것이다.
4. 학(學)에 담긴 부정성 제거
배움이 한자문화권의 큰 특징의 하나였듯 학(學)은 한자에서 어떤 글자보다 중요한 글자였다. 중요했기에 사용 빈도도 높고 관심도도 높았다. 앞서 들었던 것처럼 다양한 이체자의 출현도 이를 반영한다.
학습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눈에 보이듯 그대로 그려낸 것은 한자의 커다란 장점이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단점일 때도 있다. 구상성이 너무 강해 한자의 자형을 보면서 그것이 그려낸 범주와 방식에 갇혀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부정적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학습(學習)도 그렇다. 단순한 지식의 무한 반복으로 상징되는 ‘학습’의 한계에 갇혀 그 이미지에 지배될 가능성이 크다. 즉 학습(學習)에 담긴 자형이 발신하는 이미지 속에 속박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공자도 [논어]의 제일 첫 구절에서 학습(學習)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지식의 단순한 학습이 가져올 위험성을 크게 염려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공자는 위정(爲政) 편에서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라고 말했다.
사(思)는 깊이 생각하다는 뜻이고, 망(罔)은 망(網)의 원래 글자로 ‘그물’을 말한다. 뒤 구절의 태(殆)는 위태롭다는 뜻인데, 죽음을 뜻하는 알(歹=歺)로 구성됐기에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의 위태로움이나 망함을 뜻한다. 그래서 이 말은 “배우기만 하되 사변하지 않으면 배운 지식의 그물 속에 갇혀버리고 말 것이며, 사변만 하되 배우지 않으면 죽음에 이를 정도의 위태로움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학습(學習)이 갖는 단순한 무한반복의 위험성 때문에 배우되 반드시 그것의 원리를, 그것의 의미를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배운 지식의 그물이라는 한계 속에 갇혀 정당성을, 객관성을, 지혜로움을 담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생각만 하고 구체적인 것을 학습하지 않으면 그것은 공상이나 망상이 돼 자신은 물론 온 백성을 죽음의 위태로움으로 내몰고 망하는 것이라는 경고이다. 최초의 어원사전 [설문해자]에서 학(學)을 두고 “각오(覺悟)” 즉 “깨우치다”는 뜻이라고 풀이해 배움이란 모름지기 깨우침에 이르러야만 진정한 배움이라 주장한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지식의 기억보다 창조적 행위와 철학적 사유 더 중요
이렇듯 공자는 배움을 중시했지만, 그 배움이 지식의 독단에 빠지지 않도록 사변(思辨)과 함께하기를 주장했다. 또한 사변이 지나쳐 공허한 지식이 되지 않기를 강조했다. 배우는 과정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항상 깊이 새겨야 할 금과옥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둘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할까? 공자는 그래도 학습을 우선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찍이 종일토록 먹지도 않고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으며 온종일 생각에 빠져본 적이 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배우는 것이 더 나았다 생각한다(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 _‘위령공(衛靈公)’ 편
물론 여기서 말한 학(學)이 배우는 행위에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앉아서 논쟁을 벌이는 시간에 나아가 실천하는 것이 낫다는 말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연못가에서 물고기를 보며 군침을 흘릴 시간에 돌아가 그물을 짜는 편이 더욱 현실적이고 그 편이 낫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봤듯 학(學)은 어원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것을 배우다는 뜻을 담아 ‘배움’이 갖는 모방성을 강조했다. 게다가 이후 습(習)까지 합쳐진 학습(學習)은 배운 지식의 무한 반복성을 담았다. 모방과 무한 반복과 답습은 상상과 창의와 창조의 대척점에 있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이러한 ‘학습’의 전통적 개념은 효용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구체적 지식의 기억이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상상과 창의와 창조적 행위, 철학적 사유가 더욱 중요해진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더 그렇다.
이러한 부정성은 어쩌면 글자 속에 구체적인 모습과 뜻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자가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자가 만들어졌던 고대사회, 원시시대의 생존환경과 생활상을 반영한 자형이 사회가 발전하고 시대가 바뀌어 생존환경과 가치관이 바뀌었음에도 처음의 이미지는 그대로 남아 과거의 기억을 자꾸 강제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자는 이러한 부정적 시선을 제거하려는 나름의 노력을 계속해 왔다. 학(學)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출현하는 청동기시대가 되자 문자가 만들어졌고, 문자가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경영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자 글자 매듭 즉 결승이 아닌 기초 글자를 배우는 것이 학습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도 ‘배움’을 뜻하는 학(學)에는 여전히 ‘집 안에서 결승을 배우는 아이’의 모습이 제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문자부호와 그것이 가리키는 실제가 달라졌을 뿐 아니라, 글자 속에 담긴 이미지가 오히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창발적 ‘배움’을 왜곡할 여지가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두 손으로 결승을 배우는’ 모습을 줄여 학( )이 나 학(学)으로 바꾸고 줄여서 이러한 부정적 간섭을 없애려 노력했을 것이다. 물론 서사의 경제성 때문에 필획을 줄이고자 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분명 지칭 부호와 실제 개념의 명칭의 불일치, 혹은 그것을 넘어서 시대적 사명을 간섭할 부정성을 제거하려는 무의식적 노력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에 한국에서 주로 쓰였던 학(斈)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학(斈)은 그러한 의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집에서 새끼매듭 짓는 법’을 그린 윗부분을 아예 문(文)으로 바꿔 ‘배움’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
한자는 무한히 변화하는 살아있는 존재
문(文)이 무엇이던가? 영혼이 육체로부터 나갈 수 있도록 시신에 낸 ‘영혼의 출입문’에서 출발한, 모든 정신적 행위, 예술적 행위, 철학적 행위 등 인간의 모든 문화를 포괄하는 숭고한 개념이 아니던가? 그렇게 됨으로써 학(學)은 단순히 결승이나 글자를 배우는 저급한 단계의 학습이 아니라 문화와 문명과 인간정신을 탐구하고 사변하는 고차원적 ‘배움’으로 승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중국의 간화자에서 채택한 학(学)보다는 우리의 선조들이 썼던 학(斈)이 훨씬 고차원적이고 철학적이며 창의적 지혜가 담긴 글자가 아닐 수 없다.
5. 이 시대의 ‘배움’
학습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눈에 보이듯 그대로 그려낸 것은 한자의 커다란 장점이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단점일 때도 있다. 구상성이 너무 강해 한자의 자형을 보면서 그것이 그려낸 범주와 방식에 갇혀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부정적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학습(學習)도 그렇다. 단순한 지식의 무한 반복으로 상징되는 ‘학습’의 한계에 갇혀 그 이미지에 지배될 가능성이 크다. 즉 학습(學習)에 담긴 자형이 발신하는 이미지 속에 속박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공자도 [논어]의 제일 첫 구절에서 학습(學習)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지식의 단순한 학습이 가져올 위험성을 크게 염려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공자는 위정(爲政) 편에서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라고 말했다.
사(思)는 깊이 생각하다는 뜻이고, 망(罔)은 망(網)의 원래 글자로 ‘그물’을 말한다. 뒤 구절의 태(殆)는 위태롭다는 뜻인데, 죽음을 뜻하는 알(歹=歺)로 구성됐기에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의 위태로움이나 망함을 뜻한다. 그래서 이 말은 “배우기만 하되 사변하지 않으면 배운 지식의 그물 속에 갇혀버리고 말 것이며, 사변만 하되 배우지 않으면 죽음에 이를 정도의 위태로움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학습(學習)이 갖는 단순한 무한반복의 위험성 때문에 배우되 반드시 그것의 원리를, 그것의 의미를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배운 지식의 그물이라는 한계 속에 갇혀 정당성을, 객관성을, 지혜로움을 담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생각만 하고 구체적인 것을 학습하지 않으면 그것은 공상이나 망상이 돼 자신은 물론 온 백성을 죽음의 위태로움으로 내몰고 망하는 것이라는 경고이다. 최초의 어원사전 [설문해자]에서 학(學)을 두고 “각오(覺悟)” 즉 “깨우치다”는 뜻이라고 풀이해 배움이란 모름지기 깨우침에 이르러야만 진정한 배움이라 주장한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지식의 기억보다 창조적 행위와 철학적 사유 더 중요
이렇듯 공자는 배움을 중시했지만, 그 배움이 지식의 독단에 빠지지 않도록 사변(思辨)과 함께하기를 주장했다. 또한 사변이 지나쳐 공허한 지식이 되지 않기를 강조했다. 배우는 과정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항상 깊이 새겨야 할 금과옥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둘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할까? 공자는 그래도 학습을 우선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찍이 종일토록 먹지도 않고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으며 온종일 생각에 빠져본 적이 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배우는 것이 더 나았다 생각한다(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 _‘위령공(衛靈公)’ 편
물론 여기서 말한 학(學)이 배우는 행위에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앉아서 논쟁을 벌이는 시간에 나아가 실천하는 것이 낫다는 말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연못가에서 물고기를 보며 군침을 흘릴 시간에 돌아가 그물을 짜는 편이 더욱 현실적이고 그 편이 낫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봤듯 학(學)은 어원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것을 배우다는 뜻을 담아 ‘배움’이 갖는 모방성을 강조했다. 게다가 이후 습(習)까지 합쳐진 학습(學習)은 배운 지식의 무한 반복성을 담았다. 모방과 무한 반복과 답습은 상상과 창의와 창조의 대척점에 있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이러한 ‘학습’의 전통적 개념은 효용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구체적 지식의 기억이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상상과 창의와 창조적 행위, 철학적 사유가 더욱 중요해진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더 그렇다.
이러한 부정성은 어쩌면 글자 속에 구체적인 모습과 뜻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자가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자가 만들어졌던 고대사회, 원시시대의 생존환경과 생활상을 반영한 자형이 사회가 발전하고 시대가 바뀌어 생존환경과 가치관이 바뀌었음에도 처음의 이미지는 그대로 남아 과거의 기억을 자꾸 강제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자는 이러한 부정적 시선을 제거하려는 나름의 노력을 계속해 왔다. 학(學)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출현하는 청동기시대가 되자 문자가 만들어졌고, 문자가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경영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자 글자 매듭 즉 결승이 아닌 기초 글자를 배우는 것이 학습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도 ‘배움’을 뜻하는 학(學)에는 여전히 ‘집 안에서 결승을 배우는 아이’의 모습이 제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문자부호와 그것이 가리키는 실제가 달라졌을 뿐 아니라, 글자 속에 담긴 이미지가 오히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창발적 ‘배움’을 왜곡할 여지가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두 손으로 결승을 배우는’ 모습을 줄여 학( )이 나 학(学)으로 바꾸고 줄여서 이러한 부정적 간섭을 없애려 노력했을 것이다. 물론 서사의 경제성 때문에 필획을 줄이고자 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분명 지칭 부호와 실제 개념의 명칭의 불일치, 혹은 그것을 넘어서 시대적 사명을 간섭할 부정성을 제거하려는 무의식적 노력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에 한국에서 주로 쓰였던 학(斈)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학(斈)은 그러한 의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집에서 새끼매듭 짓는 법’을 그린 윗부분을 아예 문(文)으로 바꿔 ‘배움’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
한자는 무한히 변화하는 살아있는 존재
문(文)이 무엇이던가? 영혼이 육체로부터 나갈 수 있도록 시신에 낸 ‘영혼의 출입문’에서 출발한, 모든 정신적 행위, 예술적 행위, 철학적 행위 등 인간의 모든 문화를 포괄하는 숭고한 개념이 아니던가? 그렇게 됨으로써 학(學)은 단순히 결승이나 글자를 배우는 저급한 단계의 학습이 아니라 문화와 문명과 인간정신을 탐구하고 사변하는 고차원적 ‘배움’으로 승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중국의 간화자에서 채택한 학(学)보다는 우리의 선조들이 썼던 학(斈)이 훨씬 고차원적이고 철학적이며 창의적 지혜가 담긴 글자가 아닐 수 없다.
5. 이 시대의 ‘배움’
한자는 알파벳 문자가 갖지 않는 여러 장점을 가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장점은 글자 속에 해당 개념의 이미지가 그림처럼 남아있어 한 번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쉽게 기억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처럼 강력한 이미지가 변화한 사회, 진화한 사상과 문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방해하기도 한다. 한자가 갖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자를 21세기 미래의 문자로 발전시키고 더욱 현실적인 문자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정적 요소를 제거하고 새로운 가치를 담아내는 작업을 부단히 해야 한다. 이전의 한자가 그랬던 것처럼 계속 변해야만 진정으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형체 변화가 아니라 새 시대에 맞지 않는 부정적 시선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환경의 시대적 정신을 반영할 수 있는 내용적 변신이 이뤄져야만 더욱 강한 생명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검은 것(黑)을 숭상하다(尙)’는 뜻의 당(黨)과 ‘감시와 감독 아래 피 토하며 노동하는 사람들’을 그린 중(衆)이 현대 중국의 간화자에서 당(党)과 중(众)으로 변신해 그 속에 담긴 부정적 요소들을 말끔히 씻어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면서 새 생명을 부여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주역]에서 “궁하면 변하게 되고, 변하면 통하게 되고, 통하게 되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계사’ 편)고 했다. 한자도 마찬가지다. 학(學)이 학(斈)이나 학(学)으로 변신해 새 생명을 가졌듯 끝없이 변신해야만 살 수 있다. 그래야 오래도록 갈 수 있다.
배움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지식의 습득과 모방과 답습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지혜의 획득으로, 새로운 상상 가득한 창의적인 사유의 창조로 이어져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그간 좋은 전통으로 남았던 배움의 동양적 한계를 극복해 21세기 새로운 시대의 진정한 자산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자는 무한히 변화하는 살아있는 존재이며, 21세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인류의 훌륭한 자산이자 활용 가능한 문자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하는 지금, 진정한 모두가 진정한 ‘배움’을 다시 생각해 볼 때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다. [한국역대한자자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
한자를 21세기 미래의 문자로 발전시키고 더욱 현실적인 문자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정적 요소를 제거하고 새로운 가치를 담아내는 작업을 부단히 해야 한다. 이전의 한자가 그랬던 것처럼 계속 변해야만 진정으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형체 변화가 아니라 새 시대에 맞지 않는 부정적 시선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환경의 시대적 정신을 반영할 수 있는 내용적 변신이 이뤄져야만 더욱 강한 생명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검은 것(黑)을 숭상하다(尙)’는 뜻의 당(黨)과 ‘감시와 감독 아래 피 토하며 노동하는 사람들’을 그린 중(衆)이 현대 중국의 간화자에서 당(党)과 중(众)으로 변신해 그 속에 담긴 부정적 요소들을 말끔히 씻어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면서 새 생명을 부여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주역]에서 “궁하면 변하게 되고, 변하면 통하게 되고, 통하게 되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계사’ 편)고 했다. 한자도 마찬가지다. 학(學)이 학(斈)이나 학(学)으로 변신해 새 생명을 가졌듯 끝없이 변신해야만 살 수 있다. 그래야 오래도록 갈 수 있다.
배움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지식의 습득과 모방과 답습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지혜의 획득으로, 새로운 상상 가득한 창의적인 사유의 창조로 이어져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그간 좋은 전통으로 남았던 배움의 동양적 한계를 극복해 21세기 새로운 시대의 진정한 자산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자는 무한히 변화하는 살아있는 존재이며, 21세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인류의 훌륭한 자산이자 활용 가능한 문자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하는 지금, 진정한 모두가 진정한 ‘배움’을 다시 생각해 볼 때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다. [한국역대한자자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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