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피하기만 하면 보호받는 안전장치로 치부
사법부에 깊은 불신…AI 법률가에게 판단 맡기자는 주장도
사법부에 깊은 불신…AI 법률가에게 판단 맡기자는 주장도
1. 법(法)과 양심
언제부터인가 피하기만 하면 보호를 받는 것이 법(法)이 되고 말았다. 쳐놓은 그물망에 걸려들지만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안전판이 돼버린 게 법이다. 특히 힘 있고 가진 자에게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이 규정해 놓은 그 그물망만 빠져 나가려고 애쓴다.
범법을 했다 해도, 아무리 위법을 해도 그 죄를 법률로 증명하지 못하면 합법이 되고, 무죄가 되는 시대다. “착한 사람들은 법이 없어도 책임감 있게 행동하지만, 나쁜 사람들은 법망을 피해간다”는 플라톤의 말처럼.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이 사회가 법치사회이니 ‘법’에 의거할 수밖에 없겠지만, 법이 만능 아님을, 법만이 최선이 아님을 보여 준다. 법이란 원래부터가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을 최소한으로 규정한 규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예전부터 법에 의한 통치를, 법의 효능을 그다지 믿지 않았고, 법의 정신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법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던 법가의 대표 인물인 상앙(商鞅)이나 한비자(韓非子) 조차도 법을 절대적 잣대로 삼지는 않았다.
한비자의 스승이었던 순자(荀子)는 더 그랬고, 순자 사상의 근원이 된 맹자(孟子)는 법보다는 덕(德), 즉 곧은 마음, 도덕과 정의가 더 근원적이라고 했다. 또 그보다 거슬러 올라가 공자는 아예 법(法)의 한계성을 적나라하게 설파했다. 그들 모두 법을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규약이자 의무 정도로 설정했지, 법을 절대화하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법이 많을수록 정의는 줄어든다(The more laws, the less justice)”라고 한 고대 로마의 키케로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행위를, 인간의 양심을, 인간의 도덕을 어떻게 법으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법으로 한정할 수 있겠는가?
2. 법의 어원과 정신
언제부터인가 피하기만 하면 보호를 받는 것이 법(法)이 되고 말았다. 쳐놓은 그물망에 걸려들지만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안전판이 돼버린 게 법이다. 특히 힘 있고 가진 자에게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이 규정해 놓은 그 그물망만 빠져 나가려고 애쓴다.
범법을 했다 해도, 아무리 위법을 해도 그 죄를 법률로 증명하지 못하면 합법이 되고, 무죄가 되는 시대다. “착한 사람들은 법이 없어도 책임감 있게 행동하지만, 나쁜 사람들은 법망을 피해간다”는 플라톤의 말처럼.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이 사회가 법치사회이니 ‘법’에 의거할 수밖에 없겠지만, 법이 만능 아님을, 법만이 최선이 아님을 보여 준다. 법이란 원래부터가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을 최소한으로 규정한 규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예전부터 법에 의한 통치를, 법의 효능을 그다지 믿지 않았고, 법의 정신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법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던 법가의 대표 인물인 상앙(商鞅)이나 한비자(韓非子) 조차도 법을 절대적 잣대로 삼지는 않았다.
한비자의 스승이었던 순자(荀子)는 더 그랬고, 순자 사상의 근원이 된 맹자(孟子)는 법보다는 덕(德), 즉 곧은 마음, 도덕과 정의가 더 근원적이라고 했다. 또 그보다 거슬러 올라가 공자는 아예 법(法)의 한계성을 적나라하게 설파했다. 그들 모두 법을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규약이자 의무 정도로 설정했지, 법을 절대화하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법이 많을수록 정의는 줄어든다(The more laws, the less justice)”라고 한 고대 로마의 키케로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행위를, 인간의 양심을, 인간의 도덕을 어떻게 법으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법으로 한정할 수 있겠는가?
2. 법의 어원과 정신
영어에서 법을 뜻하는 ‘law’는 고대 영어의 ‘lagu’에서 왔으며, “어떤 권위에 의해 제정된 규칙이나 규정”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는 법률이 입법기관에 의해 제정되고, 국가가 집행을 보증하는 행위 규칙을 뜻하는 현대적 의미와 와닿아 있다.
그전 원시 게르만어에서는 ‘놓인 것’을 뜻했는데, ‘놓다’는 뜻을 가진 ‘leg-, lag-’에서 기원했다. 합법을 뜻하는 ‘legal’도 라틴어 ‘legis’에서 왔는데 ‘수집된 규칙이나 법규나 법률’을 말한다. 그리고 그전 고대 그리스어의 노모스(nomos)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법률·규범·관행’을 뜻해 자연의 질서를 의미하는 피시스(physis)와 구분해 사용했다.
영어에서 ‘법’은 처음부터 어떤 권위에 의해 제정된 것이라는 의미가 강하며, 이 때문에 세우다, 제정하다, 설치하다는 의미도 함께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해진 법률에 부합하면 ‘합법’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이 지켜야 할 어떤 규칙을 규정하고 만들며 표준으로 세우는 것이 서양에서 ‘법’의 정신이고, 그것의 부합 여부가 합법과 위법을 가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입법(立法)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권위로 기능하고, 행정부보다는 입법부의 지위가 절대적인 미국의 정치 시스템을 생각하게 한다.
물은 최고의 선이자 가장 부드러운 존재
그렇다면 중국에서 ‘법’은 어떤 정신을 표상했을까? 법을 뜻하는 법(法)자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지금의 자형에 근거한다면 글자 그대로, 수(水)와 거(去)로 이뤄졌다. 수(水)는 물을 뜻한다. 거(去)는 가다는 뜻이지만, 제거(除去)하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물(水)이 가다(去)”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물(水)처럼 공평하게 항상 방향성을 갖고 부정(不正)한 자들을 제거한다는 의미로 풀 수도 있다. 허신의 [설문해자]에서는 법(法)에 든 거(去)를 제거하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법에 의한 처분을 강조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물’의 상징이다. 법을 정의하는 데 왜 ‘물’이 들었을까? ‘물’은 동양에서 매우 특별한 상징을 가진다. 도가에서 물은 도(道)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말에서처럼 노자(老子)는 ‘물’을 극찬했다.
언제나 위로 올라가고자 하고 높은 곳에 서고자 하는 인간과는 달리 항상 아래로 흐르며 인간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자리하는 것이 물이다. 게다가 물 없이 그 어떤 생물도 자랄 수가 없다. 그래서 모든 생물의 생장은 물에 기댄다.
그러나 물은 만물을 키워 내면서도 자신이 그랬노라고 절대 자랑하지 않는다. 조그만 공만 있어도 과장해 자랑하기 일쑤고, 없는 공도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인간과 차원이 다른 모습이다.
뿐만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존재도 물이 아니던가? 물은 너무나 부드럽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정해진 형상도 없어 그 어떤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다. 알고 보면 그 강한 돌도 뚫을 수 있는 것이 물 아니던가? 도에 가까운 존재라고 극찬한 노자처럼 크게 칭송받을 만한 존재다.
부정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미도
노자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송나라 때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도 흐르는 물에서 자연의 순환과 영원함을 봤다. “물이 이렇게 흘러가지만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요, 달이 차고 이지러지지만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한순간도 변화하지 않는 것 그것도 만물이지만, 거시적 입장에서 보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도 만물이다.”
달을 보면서 우주만물의 생성 변화와 순환의 진리를 봤던 것이다. 그전 공자도 강가에서 흘러가는 물을 보면서 자연의 영원함을 봤다.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 쉬지 않고(逝者如斯夫 不舍晝夜).” 물이 동양 사상의 근원적 개념(root conception)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숭고한 정신을 담은 ‘물’, 또 도(道)의 상징으로서의 ‘물’은 언제나 아래로 흐르는 속성을 가졌다. 절대 위로 흐를 수 없다. 위로 흐르면 그것은 역류(逆流)이고, 자연의 순리와 법칙에 대한 거스름이다.
동양의 전통 정원에 폭포는 있어도 분수가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언제나 아래로 흐르는 ‘물’,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법칙이고, 그것이 물의 정신이자 속성이다. 그래서 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에게서도 달리 적용돼서는 아니 된다. 그것이 바로 법이 가져야 할 가장 고귀한 정신의 하나다. 이를 반영한 것이 ‘법(法)’ 자다.
그러나 법(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더 옛날에는 법(灋)으로 썼다. 법(法)에 廌(해치 치)가 덧붙은 모습이다. 중국에서 해치(獬廌, 해태)는 부정한 자를 만나면 그 무서운 뿔로 받아 죽여 버린다고 전해지는 상상의 동물이다. 서울의 상징 동물이 해치(HAECHI)가 된 것도 ‘정의로운 서울’을 구현하겠다는 정신의 발로이다.
그렇다면 법(灋)자는 물의 흐름이 갖는 ‘항상성’에 ‘정의’라는 의미가 더해진 글자다. ‘정의로움’과 언제나 변함없고 누구에게나 하나같은 ‘항상성’, 그것이 법의 원래 정신이다. 그래서 ‘법(法=灋)’은 바로 바르지 않는 사람을 들이받아 죽여버리는 ‘해치’나 항상 낮은 곳으로 임하는 ‘물’처럼 언제나 정의롭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집행돼야 하는 정신을 담았다. 이로부터 법도(法道)·표준·규범·방법(方法) 등의 뜻까지 나왔다.
권력을 가진 자, 돈 있는 자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힘없고 돈 없는 자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지금의 법이 되돌아봐야 할 지점이다.
3. 법으로 구성된 어휘들
법은 다양한 어휘를 만들어냈다. 이들을 보면 법이 우리 생활 속에서 어떤 영역으로 영향을 미치게 됐는가, 어떤 방식으로 확장돼 왔는가를 살필 수 있다. 자주 쓰는 말에 법칙(法則)이 있고, 법률(法律)이 있고, 법령(法令)이 있고, 법규(法規)가 있고, 법치(法治)도 있고, 법전(法典)도 있다.
법전(法典)의 전(典)은 고대 한자에서 이나 과 같이 써 책(冊)을 두 손으로 받들거나 탁자 위에 올려놓은 모습을 그렸다. 보통의 책이 아닌, 받들어 모시고 살아야 할, 윗자리에 잘 진열해 둬야 할 중요한 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경전(經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담은 책을 말한다. 그처럼 법전(法典)은 법의 정신을 담은 영원불변의 중요한 책을 말한다. 법치시대를 사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법칙(法則)의 칙(則)은 패(貝)와 도(刀=刂)로 구성됐지만, 옛날 갑골문과 금문에서는 으로 써, 정(鼎)과 도(刀)로 구성됐다. 정(鼎)은 제기의 상징이고, 도(刀)는 무기의 상징이다.
‘전쟁과 제사’가 국가의 대사라고 했던가? 고대사회에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제사와 전쟁을 상징하는 세발 솥과 칼·청동으로 성질이 다른 이들을 주조할 때는 합금 비율이 중요했다. 즉 그에 들어가는 황동과 주석과 납과 아연의 황금 비율에 따라 각각의 용도에 맞는 강도는 물론 최상의 기물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래야 제기는 제기로서의 기능을 하고, 무기는 무기로서 기능을 할 수 있다.
어떤 기물을 만들 것인가, 어떻게 해야 최상의 기물이 탄생하는지, 그 합금 비율은 비밀이자 노하우였겠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후 제사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화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강해지면서 제기의 상징이었던 정(鼎)이 화폐를 뜻하는 패(貝)로 변했을 것이다.
법률(法律)의 율(律)은 척(彳)과 율(聿)로 구성됐는데 척(彳)은 사거리를 그린 행(行)의 줄임 형으로 ‘거리’를 뜻하고, 율(聿)은 ‘붓’을 그린 필(筆)의 원래 글자다. 그래서 율(律)은 도로나 거리에 늘어선 건축물의 설계도를 그리는 모습일 것으로 추정한다. 도로나 건축물 역시 반드시 정해진, 규정된 모습대로 지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부실이 되고,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율(律)에 법령이라는 뜻이 생겼다.
법령(法令)의 령(令)은 명령(命令)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 상당히 강압적이다. 고대 한자에서도 과 같이 써, 위에는 권위나 지배자의 상징인 ‘모자’를 그렸고, 그 아래로 ‘꿇어앉은 사람’이 그려졌다. 지배자의 명령이나 권위로 굴복시키는 모습이다. 명(命)은 여기에 구(口)가 더해진 글자다. ‘명령’을 더욱 구체화한 모습이다.
주나라의 엄정하고 공정했던 법 집행
법규(法規)의 규(規)는 ‘남성이 보는 그것이 바로 규칙’임을 천명했다. 부(夫)가 비녀를 꽂은 사람을 그려 ‘성인 남성’을 뜻하고, 견(見)은 사람의 눈을 크게 키워 그려 ‘보다/보이다’는 뜻을 담았기 때문이다. 남성이 세상의 주인이고, 세상의 질서를 규정(規定)하던 가부장적 사회의 가치를 담은 음험한 한자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오래전부터 다양한 어휘를 탄생시켰던 법(法)은 근대 이후, 특히 법치주의의 현대 사회로 들면서 더욱 중요한 글자로 기능했고, 더 많은, 더욱 다양한 어휘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합법(合法)·위법(違法)·범법(犯法)·입법(立法)·법정(法定)도 나왔다. 그런가 하면 헌법(憲法)·형법(刑法)·민법(民法)·상법(商法)·국제법(國際法)도 있다. 너무 많아 예시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글자의 하나가 됐다.
현대 한자의 법(法)에는 여러 가지 뜻이 스며 있다. ‘국가가 강제하는 통치 수단’을 일컫는 ‘법’이 가장 보편적이고 통용되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방법(方法)을 뜻하기도 하고, 어떤 표준을 뜻하기도 하고, 법술(法術)이나 술법(術法)에서처럼 어떤 ‘표준’의 응용을 뜻하기도 한다.
또 불법(佛法)에서처럼 ‘가르침’을 뜻하기도 한다. 어떤 표준이거나 가르침이라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법(法)에는 본뜨다나 본받다는 뜻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를 현대 중국에서는 법국(法國)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France/ française’의 음역어로 법란서(法蘭西)라고 번역했다가 줄어진 이름이다. 하지만 이에 현대사회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인 법(法)이라는 뜻이 들었고, 또 ‘본받다’는 의미가 든 이상 ‘프랑스’를 법국(法國)으로 번역한 것은 그다지 기분 나쁘거나 잘못된 번역어로 보이지는 않는다.
현대적인 법의 정신, 인권과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프랑스 시민혁명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법으로 보호 받아야 하는 시민들의 평등 권리를 보장했기에 그렇게 쉬 정착했던 것일까? 아니면 본받아야 할 나라로 프랑스를 설정했던 것일까?
4. 법의 역사
법전(法典)의 전(典)은 고대 한자에서 이나 과 같이 써 책(冊)을 두 손으로 받들거나 탁자 위에 올려놓은 모습을 그렸다. 보통의 책이 아닌, 받들어 모시고 살아야 할, 윗자리에 잘 진열해 둬야 할 중요한 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경전(經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담은 책을 말한다. 그처럼 법전(法典)은 법의 정신을 담은 영원불변의 중요한 책을 말한다. 법치시대를 사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법칙(法則)의 칙(則)은 패(貝)와 도(刀=刂)로 구성됐지만, 옛날 갑골문과 금문에서는 으로 써, 정(鼎)과 도(刀)로 구성됐다. 정(鼎)은 제기의 상징이고, 도(刀)는 무기의 상징이다.
‘전쟁과 제사’가 국가의 대사라고 했던가? 고대사회에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제사와 전쟁을 상징하는 세발 솥과 칼·청동으로 성질이 다른 이들을 주조할 때는 합금 비율이 중요했다. 즉 그에 들어가는 황동과 주석과 납과 아연의 황금 비율에 따라 각각의 용도에 맞는 강도는 물론 최상의 기물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래야 제기는 제기로서의 기능을 하고, 무기는 무기로서 기능을 할 수 있다.
어떤 기물을 만들 것인가, 어떻게 해야 최상의 기물이 탄생하는지, 그 합금 비율은 비밀이자 노하우였겠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후 제사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화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강해지면서 제기의 상징이었던 정(鼎)이 화폐를 뜻하는 패(貝)로 변했을 것이다.
법률(法律)의 율(律)은 척(彳)과 율(聿)로 구성됐는데 척(彳)은 사거리를 그린 행(行)의 줄임 형으로 ‘거리’를 뜻하고, 율(聿)은 ‘붓’을 그린 필(筆)의 원래 글자다. 그래서 율(律)은 도로나 거리에 늘어선 건축물의 설계도를 그리는 모습일 것으로 추정한다. 도로나 건축물 역시 반드시 정해진, 규정된 모습대로 지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부실이 되고,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율(律)에 법령이라는 뜻이 생겼다.
법령(法令)의 령(令)은 명령(命令)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 상당히 강압적이다. 고대 한자에서도 과 같이 써, 위에는 권위나 지배자의 상징인 ‘모자’를 그렸고, 그 아래로 ‘꿇어앉은 사람’이 그려졌다. 지배자의 명령이나 권위로 굴복시키는 모습이다. 명(命)은 여기에 구(口)가 더해진 글자다. ‘명령’을 더욱 구체화한 모습이다.
주나라의 엄정하고 공정했던 법 집행
법규(法規)의 규(規)는 ‘남성이 보는 그것이 바로 규칙’임을 천명했다. 부(夫)가 비녀를 꽂은 사람을 그려 ‘성인 남성’을 뜻하고, 견(見)은 사람의 눈을 크게 키워 그려 ‘보다/보이다’는 뜻을 담았기 때문이다. 남성이 세상의 주인이고, 세상의 질서를 규정(規定)하던 가부장적 사회의 가치를 담은 음험한 한자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오래전부터 다양한 어휘를 탄생시켰던 법(法)은 근대 이후, 특히 법치주의의 현대 사회로 들면서 더욱 중요한 글자로 기능했고, 더 많은, 더욱 다양한 어휘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합법(合法)·위법(違法)·범법(犯法)·입법(立法)·법정(法定)도 나왔다. 그런가 하면 헌법(憲法)·형법(刑法)·민법(民法)·상법(商法)·국제법(國際法)도 있다. 너무 많아 예시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글자의 하나가 됐다.
현대 한자의 법(法)에는 여러 가지 뜻이 스며 있다. ‘국가가 강제하는 통치 수단’을 일컫는 ‘법’이 가장 보편적이고 통용되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방법(方法)을 뜻하기도 하고, 어떤 표준을 뜻하기도 하고, 법술(法術)이나 술법(術法)에서처럼 어떤 ‘표준’의 응용을 뜻하기도 한다.
또 불법(佛法)에서처럼 ‘가르침’을 뜻하기도 한다. 어떤 표준이거나 가르침이라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법(法)에는 본뜨다나 본받다는 뜻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를 현대 중국에서는 법국(法國)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France/ française’의 음역어로 법란서(法蘭西)라고 번역했다가 줄어진 이름이다. 하지만 이에 현대사회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인 법(法)이라는 뜻이 들었고, 또 ‘본받다’는 의미가 든 이상 ‘프랑스’를 법국(法國)으로 번역한 것은 그다지 기분 나쁘거나 잘못된 번역어로 보이지는 않는다.
현대적인 법의 정신, 인권과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프랑스 시민혁명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법으로 보호 받아야 하는 시민들의 평등 권리를 보장했기에 그렇게 쉬 정착했던 것일까? 아니면 본받아야 할 나라로 프랑스를 설정했던 것일까?
4. 법의 역사
‘법’에 담긴 두 가지 정신, 즉 공평함과 정의로움은 사실 가장 지키기 어려운 근본정신임에 분명하다. 그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도 이를 지킨 사례를 청동기 명문에 남겨 후세에 영원히 전하고자 했다. 서주시대 공왕(恭王, 기원전 950년~기원전 936년 재위)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홀정(曶鼎)’이라는 청동기에 새겨진 기록이 그것인데, 당시 일어난 법률 소송에 관한 내용을 고스란히 담았다. 마지막 부분의 곡식 도난사건에 관한 내용을 보자.
“주나라 출신의 신흥 귀족 광계(匡季)의 가신 20명이 홀(曶)의 경작지를 침범해 벼를 훔쳐간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 홀은 이에 책임을 물어 그들의 주인 격인 광계를 동궁의 왕세자에게 고소했다. 심의 결과 광계에게 가신을 대신해 손해배상과 함께 직접 사죄할 것을 명하고, 이를 어길 시 본인도 함께 처벌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광계는 밭 5마지기와 노예 1명, 머슴 3명을 배상금 조로 내놓았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범한 범법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사죄는 하지 않았다. 그러자 홀은 다시 소송을 제기했다. 그 결과 지난번 훔쳤던 곡식의 2배를 다시 배상할 것이며, 이듬해까지 이행하지 않으면 다시 2배를 추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그리하여 광계는 훔쳤던 양만큼의 곡식은 물론 밭 2마지기와 하인 1명을 추가로 손해배상했다.”
대법원이 검찰 수사를 받는 대한민국의 현실
거의 3000년 전의 기록인데도 소송 과정이 이처럼 상세하고, 법의 집행도 매우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머슴들의 단순한 절도행위였지만 손해배상은 물론 주인이 사죄까지 하게 함으로써 도덕적 책임까지 함께 지게 해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했던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게다가 피소됐던 광계가 당시의 승전국인 주(周)나라의 신흥 귀족이었고, 소송 제기자인 홀은 주나라에 정복당한 은(殷)나라의 유민 출신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의 법이 출신성분이나 신분과 지위에 관계없이 상당히 공평하게 지켜지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법(法)자가 담은 ‘정의롭고 공평해야 한다’라는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법치사회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21세기 오늘날의 모습과 대비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5. 사법 불신의 시대
“주나라 출신의 신흥 귀족 광계(匡季)의 가신 20명이 홀(曶)의 경작지를 침범해 벼를 훔쳐간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 홀은 이에 책임을 물어 그들의 주인 격인 광계를 동궁의 왕세자에게 고소했다. 심의 결과 광계에게 가신을 대신해 손해배상과 함께 직접 사죄할 것을 명하고, 이를 어길 시 본인도 함께 처벌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광계는 밭 5마지기와 노예 1명, 머슴 3명을 배상금 조로 내놓았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범한 범법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사죄는 하지 않았다. 그러자 홀은 다시 소송을 제기했다. 그 결과 지난번 훔쳤던 곡식의 2배를 다시 배상할 것이며, 이듬해까지 이행하지 않으면 다시 2배를 추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그리하여 광계는 훔쳤던 양만큼의 곡식은 물론 밭 2마지기와 하인 1명을 추가로 손해배상했다.”
대법원이 검찰 수사를 받는 대한민국의 현실
거의 3000년 전의 기록인데도 소송 과정이 이처럼 상세하고, 법의 집행도 매우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머슴들의 단순한 절도행위였지만 손해배상은 물론 주인이 사죄까지 하게 함으로써 도덕적 책임까지 함께 지게 해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했던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게다가 피소됐던 광계가 당시의 승전국인 주(周)나라의 신흥 귀족이었고, 소송 제기자인 홀은 주나라에 정복당한 은(殷)나라의 유민 출신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의 법이 출신성분이나 신분과 지위에 관계없이 상당히 공평하게 지켜지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법(法)자가 담은 ‘정의롭고 공평해야 한다’라는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법치사회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21세기 오늘날의 모습과 대비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5. 사법 불신의 시대
지난 정권에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와 관련해 검찰에 의한 대법원의 압수수색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야말로 헌정 사상 상상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일이 정말 현실로 벌어진 것이다. 삼권분립에 의해 그 독립성이 완전하게 보장된 사법부가 검찰의 수사를 받은 것이다. 그것도 사법부의 가장 정점에 서 있는 대법원이 말이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물론 서로의 주장도 있고 실상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정말 한심하고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을 심판하고, 인간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리까지 결정하는 권한은 원래 신의 고유영역에 속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고 합리성이 담보되면서 신의 권한은 대행자였던 성직자로부터 법관에게로 넘어왔다. 신을 대신해 그 권한을 위임받은 법관,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신처럼 공평무사함이었고, 지켜야 할 정신은 ‘천지불인(天地不仁, 천지가 만물을 키움에 억지로 인심을 쓰지 아니하고 자연 그대로 맡김)’처럼의 사사로움 없음이었을 것이다.
신성을 부여받았기에 금단의 영역이었고, 그래서 그 속의 모습이 언제나 궁금하다. 신비롭고 궁금한 그들의 삶과 그것의 면면을 과장 없이, 또 따뜻한 비판의 시각으로, 인간적으로 그린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가 인기를 구가했던 것도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애정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고조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몇 년 전의 한 조사에서 이미 판결의 공정성을 묻는 질문에 70.6%가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으며, 더구나 미래세대인 20대는 80.2%가 그렇다고 답했다(‘2015 법원 신뢰도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 법원의 재판 결과와 재판 진행에 대한 불만의 진정과 청원도 해를 거듭하며 늘어가고 있다.
6. 인공지능 법률가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 영화 [부러진 화살]에 나오는 말이지만,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는 말이다. 영화를 통해, 드라마를 통해 또는 개인의 직접 경험을 통해 이 말은 진리처럼 공감을 높여가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법조계를 제외하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사법부에 대한 불신 때문일까? 이제는 아예 인공지능 법률가에게 판단을 맡기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그 존엄성과 명줄을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에게 맡길 수 있을까?
쉽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지켜야 할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운명이 인공지능에 의해 판단되고 결정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고유영역이 기계로 넘어가는 시대
그럼에도 현실은 인공지능이 이 신성의 영역에서조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모양새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2월 인공지능(AI) 변호사가 대형 법무법인에 처음으로 취직했다고 한다.
변호사만 150여 명을 거느린 국내 대형 로펌 대륙아주의 AI 변호사 ‘유렉스’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그간 한 팀이 길게는 몇 달씩 걸려 해야 했던 사전 법률 검토 작업을 20~30초 만에 해치우는 괴력을 발휘하며 업무에 빠르게 적응해 나가고 있다고 한다.
사실 AI 변호사는 미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2016년 5월 베이커&호스테틀러라는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 뉴욕의 로펌에서 로스라는 AI 변호사를 처음 채용,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었다. 약 1년 뒤 2017년 8월에는 일본의 홈즈라는 정보기술(IT) 서비스업체가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 ‘왓슨’을 이용해 계약서 작성 업무를 대행해 주는 서비스를 시작해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보통 1통 작성에 약 5만~10만 엔 하던 비용을 월정액 1000엔 정도만 내면 무한으로 작성해 주며, 시간도 5분이면 1통을 작성할 수 있다고 한다. 인공지능 법률가가 시장화에 성공해 시민의 생활 속으로 들어와 진정한 현실이 된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변호사의 상당수가 직장을 잃을 것이라는 걱정도 과장은 아니다. 소비자의 처지에서는 분명 환영할 일이다. 경제성과 편의성만 가지면 시장은 그곳으로 흐르게 돼 있다. 보호를 위한 법망을 아무리 친다 하더라도 결국엔 그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 법이다. 지금은 법무사이고, 세무사이고, 변호사의 일이겠지만, 궁극에는 검사와 판사의 일까지 상당 부분 대체하게 될 것이다.
심판의 판단에 의지하던 각종 스포츠도 이제는 기계 판독이 한껏 능력을 발휘하며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있지 않은가? 야구도 그렇고, 축구도 그렇고, 다른 영역도 이미 장악해 간다. 인간의 고유영역이 기계로 넘어가고, 점차 기계의 결과를 더 신뢰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우리 모두 내비게이션을 자신의 공간인지와 감각 능력보다 더욱 신뢰하 듯 말이다.
인간의 목숨과 직결되기에 신뢰가 특히 우려되던 무인자율주행도 점차 인간의 신뢰를 받아 빠른 속도로 정착해 가고 있다. 인간의 의지만 관여하지 않는다면 무인자율주행이 훨씬 더 안전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미 인간에 의한 사고보다 인공지능의 오류에 의한 사고율이 낮아졌다. 그렇다면 빠른 속도로 인간의 운전을 대체할 것이다.
딥러닝, ‘알파 제로’이 성공한 비결도 인간의 학습 경험이 관여하지 않은 데 있었다. 이젠 인간이 최고이고, 만물의 영장이며, 세상의 절대적 주인이라 생각했던 그 생각조차도 무너질 날만 남았다 생각된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다. [한국역대한자자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
인간을 심판하고, 인간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리까지 결정하는 권한은 원래 신의 고유영역에 속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고 합리성이 담보되면서 신의 권한은 대행자였던 성직자로부터 법관에게로 넘어왔다. 신을 대신해 그 권한을 위임받은 법관,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신처럼 공평무사함이었고, 지켜야 할 정신은 ‘천지불인(天地不仁, 천지가 만물을 키움에 억지로 인심을 쓰지 아니하고 자연 그대로 맡김)’처럼의 사사로움 없음이었을 것이다.
신성을 부여받았기에 금단의 영역이었고, 그래서 그 속의 모습이 언제나 궁금하다. 신비롭고 궁금한 그들의 삶과 그것의 면면을 과장 없이, 또 따뜻한 비판의 시각으로, 인간적으로 그린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가 인기를 구가했던 것도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애정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고조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몇 년 전의 한 조사에서 이미 판결의 공정성을 묻는 질문에 70.6%가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으며, 더구나 미래세대인 20대는 80.2%가 그렇다고 답했다(‘2015 법원 신뢰도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 법원의 재판 결과와 재판 진행에 대한 불만의 진정과 청원도 해를 거듭하며 늘어가고 있다.
6. 인공지능 법률가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 영화 [부러진 화살]에 나오는 말이지만,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는 말이다. 영화를 통해, 드라마를 통해 또는 개인의 직접 경험을 통해 이 말은 진리처럼 공감을 높여가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법조계를 제외하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사법부에 대한 불신 때문일까? 이제는 아예 인공지능 법률가에게 판단을 맡기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그 존엄성과 명줄을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에게 맡길 수 있을까?
쉽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지켜야 할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운명이 인공지능에 의해 판단되고 결정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고유영역이 기계로 넘어가는 시대
그럼에도 현실은 인공지능이 이 신성의 영역에서조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모양새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2월 인공지능(AI) 변호사가 대형 법무법인에 처음으로 취직했다고 한다.
변호사만 150여 명을 거느린 국내 대형 로펌 대륙아주의 AI 변호사 ‘유렉스’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그간 한 팀이 길게는 몇 달씩 걸려 해야 했던 사전 법률 검토 작업을 20~30초 만에 해치우는 괴력을 발휘하며 업무에 빠르게 적응해 나가고 있다고 한다.
사실 AI 변호사는 미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2016년 5월 베이커&호스테틀러라는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 뉴욕의 로펌에서 로스라는 AI 변호사를 처음 채용,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었다. 약 1년 뒤 2017년 8월에는 일본의 홈즈라는 정보기술(IT) 서비스업체가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 ‘왓슨’을 이용해 계약서 작성 업무를 대행해 주는 서비스를 시작해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보통 1통 작성에 약 5만~10만 엔 하던 비용을 월정액 1000엔 정도만 내면 무한으로 작성해 주며, 시간도 5분이면 1통을 작성할 수 있다고 한다. 인공지능 법률가가 시장화에 성공해 시민의 생활 속으로 들어와 진정한 현실이 된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변호사의 상당수가 직장을 잃을 것이라는 걱정도 과장은 아니다. 소비자의 처지에서는 분명 환영할 일이다. 경제성과 편의성만 가지면 시장은 그곳으로 흐르게 돼 있다. 보호를 위한 법망을 아무리 친다 하더라도 결국엔 그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 법이다. 지금은 법무사이고, 세무사이고, 변호사의 일이겠지만, 궁극에는 검사와 판사의 일까지 상당 부분 대체하게 될 것이다.
심판의 판단에 의지하던 각종 스포츠도 이제는 기계 판독이 한껏 능력을 발휘하며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있지 않은가? 야구도 그렇고, 축구도 그렇고, 다른 영역도 이미 장악해 간다. 인간의 고유영역이 기계로 넘어가고, 점차 기계의 결과를 더 신뢰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우리 모두 내비게이션을 자신의 공간인지와 감각 능력보다 더욱 신뢰하 듯 말이다.
인간의 목숨과 직결되기에 신뢰가 특히 우려되던 무인자율주행도 점차 인간의 신뢰를 받아 빠른 속도로 정착해 가고 있다. 인간의 의지만 관여하지 않는다면 무인자율주행이 훨씬 더 안전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미 인간에 의한 사고보다 인공지능의 오류에 의한 사고율이 낮아졌다. 그렇다면 빠른 속도로 인간의 운전을 대체할 것이다.
딥러닝, ‘알파 제로’이 성공한 비결도 인간의 학습 경험이 관여하지 않은 데 있었다. 이젠 인간이 최고이고, 만물의 영장이며, 세상의 절대적 주인이라 생각했던 그 생각조차도 무너질 날만 남았다 생각된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다. [한국역대한자자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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