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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삼의 한자 키워드로 읽는 동양문화(17)] 금(金): 청동의 제국, 황금의 나라

bindol 2022. 5. 28. 09:13

[하영삼의 한자 키워드로 읽는 동양문화(17)] 금(金): 청동의 제국, 황금의 나라 

국호(國號)에 영원불변의 염원을 담아 

간직해야 할, 지켜야 할 귀중한 보물의 상징
탐욕과 결합될 땐 인간들은 노예로 전락한다
중국 운남성 곤명시 외곽의 금전사. 천자문에 금(金)의 생산지로 등장하는 여수는 운남성 영창부라는 곳에 있던 지명이다.
1. “금생여수(金生麗水)”

“금생여수(金生麗水), 옥출곤강(玉出昆崗).”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구절이다. [천자문]에 나오는 문구이기도 하고, 전체 250구 중 상당히 앞에 자리한 제8구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금은 여수에서 생산되고, 옥은 곤강에서 나온다네.”

금과 옥, 금과 옥조(金科玉條)라는 말에서처럼 우리 문화 깊숙이 자리 잡은, 인간이 간직해야 할, 지켜야 할 귀중한 보물로 상징된다. 자본주의를 사는 오늘날, 특히 금은 그 무엇보다 귀중한 생명줄이 된 지 오래다.

여기서 금(金)의 생산지로 등장하는 여수는 중국 운남성(雲南省) 영창부(永昌府)라는 곳에 있던 땅이름인데, 지금의 보산시(保山市) 정도로 보면 된다. 보산시라고 하면 다소 낯설겠지만 그곳을 관할했던 대리국(大理國)이라면 쉽게 연상이 될 것이다.

대리는 이름 그대로 대리석이 많이 나는 곳이기도 하고, 옛날 중국의 남동쪽에서 강성한 국가로 존재했던 남조(南詔)국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또 서안에서 청도를 지나 대리를 거쳐 미얀마와 인도에 이르고, 다시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 로마까지 이르는 중국 최초의 실크로드, 서남 실크로드의 거점도시이기도 했다.

필자는 1994년 그곳을 처음 방문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1998년 가을 상하이에 머물 때 다시 찾았고, 그 후로도 두 번 정도 더 찾았다. 언제나 여전한 감동을 주는 곳이다. 서쪽으로는 해발 4000m나 되는 시퍼런 창산(蒼山)의 19봉우리가 하늘과 이어진 듯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사람의 귀(耳)’처럼 생겼다는 푸르디푸른 이해(洱海)가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그 사이로 익어 늘어진 황금벌판, 그곳에 흰색으로 외벽을 칠한 집들이 그림처럼 점점이 늘어서 있다. 그 사이로 따스한 햇살과 시원스런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로 달렸다.

다섯 가지 색을 내는 금속의 총칭

천국이 따로 없었다. 모든 시간이 정지하고 생각조차 멈춘듯했다. 자본의 최대 각축장으로 떠올랐던 상하이, 또 우리나라를 뒤엎었던 외환위기의 아수라장을 생각하면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까 싶었다. 그간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 시간의 속도도, 지향점도 전혀 다른 곳, 그곳을 달리며 생각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며 살아왔던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이곳이야말로 ‘샹그릴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곳을 근거지로 안빈낙도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삶, 그곳은 ‘도화원’이자 이 세상의 ‘유토피아’가 분명했다.

이곳에는 백족(白族)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집도 흰색, 제사에 쓰는 제물도 흰 돼지, 흰 닭, 입는 옷도 흰색, 모두가 흰색을 숭상한다. 그래서 민족 이름에도 백(白)이 붙었다.

여기서 살았던 사람들이 예로부터 산에서 흘러나온 계곡물에 섞인 모래를 건져내어 금(金)을 만들었다는 데서 [천자문]의 이 문구가 나왔을 것이다. 백 번 정련해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금(金)은 사금(砂金)이고, 사금을 채취해서 정련해 금을 생산하던 고대 중국의 금 생산 방법을 반영한 문구다. 지금도 여전히 이곳은 금이 많이 생산되고 대규모 금광도 많다.
대리 삼탑(三塔). 남조 시기인 824~859년 사이에 세워진 불교 탑으로, 중간 탑은 높이가 약 70m에 이른다.
2. 금(金)의 어원, 금과 쇠 이전의 청동

[천자문]에서 말한 금(金)은 황금이지만, 한자 금이 원래부터 황금을 지칭했던 것은 아니다. 최초의 한자 어원사전인 [설문해자]에서는 금을 두고 이렇게 풀이했다. “다섯 가지 색을 내는 금속의 총칭이다(五色金).”

그중에서도 황색이 최고다.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어도 녹이 슬지 않고, 수백 번 제련해도 가벼워지지 않으며, 사람의 뜻에 맞게 변형시켜 기물을 만든다. 오행 중에서 서방을 대표하는 물질이다. 흙(土)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토(土)로 구성됐다. 자형에서 토(土)의 왼편과 오른편에 더해진 두 획은 금덩어리가 흙(土) 속에 든 모습을 형상화했다. 윗부분의 금(今)은 소리부다.”

서기 100년에 만들어진 사전인데도 대단히 상세하고 구체적인 해설이 덧붙여졌다. 이에 대해 청나라 때의 단옥재는 “오색금(五色金), 즉 다섯 가지 색을 내는 금속은 백금(白金)·청금(靑金)·적금(赤金)·흑금(黑金)·황금(黃金)을 말한다”고 주석을 달았다. 여기서 말하는 백금(白金)은 은(銀), 청금(靑金)은 청동, 적금(赤金)은 황동 즉 구리, 흑금(黑金)은 철(鐵)을 말한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금속은 그 색깔처럼 각기 동·서·남·북·중앙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처럼 [설문해자]가 만들어진 한나라 때까지만 해도 금(金)은 ‘쇠’의 총칭이었고 ‘황금’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진(先秦) 시대의 역사 문헌과 출토된 고대 한자 자료에 반영된 것을 종합해 보면 ‘철’이나 ‘쇠’가 아닌 ‘청동’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청동’을 전문적으로 지칭하던 것이 철기시대가 되면서 철을 포함한 각종 ‘쇠’를 통칭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됐던 것이다.

그래서 한자 발전사에서 갑골문(甲骨文)과 짝을 이뤄 등장하는 금문(金文)은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를 뜻한다. 그렇다면 금(金)이 어떻게 해서 청동을 뜻했고, 또 금속의 통칭이 됐으며, 황금이라는 뜻까지 갖게 됐던 것일까? 또 금(金)이라는 한자는 무엇을 그린 것일까? 어떻게 만들어진 글자일까?

금(金)의 자형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청동’이라는 뜻 등과 연계시켜 볼 때 이는 청동 기물을 주조하려고 만든 틀, 즉 ‘거푸집’의 모양을 형상한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아쉬운 것은 갑골문은 물론 금문에서조차도 금(金)자가 독립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금(金)으로 구성된 글자들은 찾아볼 수 있다. 鑄(부어 만들 주)나 割(벨 할)을 보면 금(金)이 무엇을 그렸는지 쉽게 이해된다.

[그림 1] 주(鑄)와 할(割)의 금문 자형(字形) 비교.

주(鑄)는 [그림1]에서처럼 두 손으로 청동을 녹인 쇳물을 담은 용광로를 뒤집어 거푸집(金) 위로 붓고 있는 모습이다. 청동기물을 주조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적으로 그린 글자이다. 또 할(割)은 금문 자형에서 왼쪽이 거푸집(金)처럼 생겼고 이 거푸집을 칼(刀)로 자르는 모습이다.

수준 높은 청동기를 대량 생산했던 은나라

이는 여러 조각으로 된 황토 거푸집을 줄로 묶고 녹인 청동 쇳물을 부은 다음 굳은 후 묶어놓았던 줄을 자르는 모습이다. 이로부터 할(割)에는 ‘베다’, ‘자르다’는 뜻이 나왔고, 분할(分割)·할거(割據)·할인(割引)·할부(割賦)·할복(割腹) 등의 어휘를 만들어냈다.

금(金)의 옛날 자형에서 볼 수 있는 거푸집 주위의 여러 점은 청동의 재료인 원석을 상징하는데 이후 두 점으로 확정됐다. 이후 진(秦) 나라 때의 소전체에 들면서 두 점이 거푸집 안쪽으로 이동해 금( )으로 됐고, 자형이 조금 변해 지금의 금(金)이 됐다.

3. 중국의 청동기시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소장된 중국의 청동기들.
중국 문명사에서 청동기시대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은(殷)나라 하면 갑골문이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은 대단히 수준 높은 청동기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던 시기다. 갑골문은 상나라 후기, 즉 은나라 때로 한정되지만, 청동기는 그보다 훨씬 더 올라가 상나라 중기, 심지어 초기까지 올라가는 것도 있다.

청동은 황동(구리)에 주석과 납과 아연 등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용해점을 낮추고 강도는 높인 합금물이다. 순수 구리가 섭씨 1000도 이상에서 녹는 반면 청동은 700~900도에서도 녹는다. 주석이 10% 정도만 들어가도 강도는 홍동의 4.7배로 높아진다. 주석 등이 들어가 원래의 구리색이 청회색을 띠게 되기에 ‘청동(靑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런 청동이 발명됨으로써 인류는 석기시대와는 전혀 다른 문명으로 진입하게 된다. 스탈린(1879~1953)의 말처럼 도구의 혁명으로 생산량은 급증했으며, 대량의 살상 무기가 만들어져 상대를 지배함으로써 계급도 생겨났다. 이는 국가가 형성되는 토대를 만들었고, 국가가 탄생하자 늘어난 각종 사무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문자도 출현했다. 인류사에서 일어난 엄청난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은 언제쯤부터 청동기가 만들어졌고 청동기시대에 진입했던 것일까?

중국의 고고학적 성과들을 종합해 보면 중국 서부 섬서성 강채(姜寨) 유적지(B.C. 4700)에서는 홍동, 즉 합금이 되지 않는 순수한 구리 조각이 발견돼 당시에 이미 구리의 제련에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그 뒤를 이어 서안 반파(半坡) 유적지(B.C. 4500)에서는 합금이 된 청동 조각이 출토됐고, 서북 지역 감숙성 일대의 마가요(馬家窯) 문화 유적지(B.C.3000)에서 청동 칼(구리 65%, 납 6%, 주석 2%, 아연 25%)이 발견돼 초보적인 청동 제작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산동성 용산유적(B.C. 23~20세기)에서는 청동 송곳이 발견돼 청동기가 일반 도구로 확대됐고, 용광로까지 발견돼 청동기 제작이 대량으로 이뤄졌음을 확인해 줬다. 이를 거처 하남성의 이리두(二里頭) 문화(약 B.C. 2000)에 들면 진정한 의미의 청동기시대에 진입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바로 하(夏)나라 때의 유적지인데 중국 최초 국가의 등장과 맥을 같이한다.

황금은 하느님이 보내준 천사로도 불려

중국은 청동기 문화가 매우 발달했던 나라다. 그것은 1976년 은(殷)나라 때 부호(婦好)라는 젊어서 죽은 한 왕비의 무덤에서 청동기만 무려 468점이 쏟아져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상(商)나라 왕도 아니고 임금의 여럿 있는 아내 중 한 사람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3300년 전, 당시의 생산력으로 봤을 때 청동기 한 점 한 점이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해야 할 보물이었다.

뿐만 아니다. 은허에서 발견된 상나라 후기 때 만들어진 ‘사모무정(司母戊鼎)’이라는 청동 솥은 무게가 832.84㎏이나 된다. 실제 기물의 중량만 그러니, 이를 만드는 데 든 청동은 족히 1.2t은 돼야 했을 것이다. 최고 질 좋은 동(銅)의 원석이라고 해도 순 함량이 5%를 넘지 않으니, 이 기물을 만드는 데 최소 60t 정도의 원석이 필요했을 것이다.

3300년 전의 고대사회에서 이러한 엄청난 양의 원석을 녹이고, 그와 동시에 쇳물을 만들어 솥 하나를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공력과 비용이 필요했을까? 솥의 제작에 동원된 장인들만 해도 200~300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대공정 그 자체였다.

이런 전통은 상나라에 한정되지 않았다. 상을 이은 주(周)나라도 이러한 청동 제기를 수도 없이 만들어냈다. 지금까지 발견된 명문을 가진 주나라 이전의 청동기만 해도 무려 2만 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주나라는 철저한 봉건제를 시행하면서 청동기는 더더욱 신분과 권력의 상징이 됐다.

천자국은 천자국대로, 제후국은 제후국대로, 귀족들은 귀족들대로 서로 앞다퉈 진귀한 청동기를 만들었다. 주나라 후기 전국(戰國)시대에 들면서 제후들의 각축이 심해지자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왜 이런 엄청난 공력을 들이고 비용을 써 가며 청동 솥을 제작했던 것일까?

2001년 작고한 중국 고고학의 대부 장광직(張光直) 하버드대 교수에 의하면 중국의 청동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매우 특징적인 중요한 시기다. 또 다른 세계의 청동시대와는 달리 청동으로 도구를 만들어 내부의 생산력을 높이고 무기를 만들어 외부의 재화를 획득하는 데 쓴 것이 아니라, 신을 모시는 제기를 만드는 데 사용됐다. 청동으로 만든 화려한 각종의 제기는 통치자의 권위로 기능, 정치 권력의 하나가 됐고 권력을 장악하는 상징물로, 권력에 의해 내외부의 재부를 획득하는 도구의 하나로 쓰였다고 했다.

그랬다. 고대의 신화·미술·제사·문자가 다 그러했듯 상상을 뛰어넘는 고대 중국의 청동 제기는 모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 화려함과 장중함으로부터 신과 교통하는 권위를 부여받고, 이를 통해 지상의 권력과 부와 명예를 장악했던 것이었다.

이처럼 중국에서 청동기는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자 그것을 획득하는 수단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발명품 청동기로 무기나 생산 도구를 만드는 대신 제기를 더 많이 만들었다. 서구나 다른 문명에 비해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을 ‘청동기의 제국’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4. 세계사를 바꾼 황금, 제국의 탄생

사실 황금은 인류가 사랑한 가장 훌륭한 금속의 하나였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과 금이 갖는 환금성, 그리고 여명처럼 찬란한 색깔, 나아가 밝음과 태양을 연상시키고, 불후(不朽)·예지(叡智)·고귀(高貴)·명예(名譽)·초월(超越)·부(富) 등을 상징해 여러 문명에서 인류의 사랑을 받아왔다.

영어에서 ‘금’을 뜻하는 ‘gold’는 황금색에서 왔고, ‘금’을 뜻하는 원소기호 Au는 라틴어 ‘Aurum’와 ‘Aurora’에서 왔는데, ‘찬란한 여명’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금색이 주는 신성함과 고귀함을 반영한 단어다. 또 멕시코의 아즈텍어에서 황금을 뜻하는 ‘teocuitlati’는 “하느님이 보낸 천사”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황금에 대한 찬사가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제국들의 처참한 수탈지가 되고 말았던 조선반도

그러나 이런 특성과 상징을 가진 ‘금’은 세계의 역사를 바꾼 중요한 힘의 하나로도 지목받고 있다. 서구의 식민지 건설과 제국의 형성에 ‘금’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콜럼버스가 찾고자 했던 것도 향신료와 함께 ‘금’이었다.

그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기록됐던 동양의 풍요와 ‘황금의 나라’로 기록됐던 지방구(Japan)를 찾아 나섰던 의외의 결과가 신대륙의 발견이었다.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아메리카를 발견했을 때도 그는 여전히 그곳이 인도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가 처음 도착했던 섬들을 서인도제도, 거기에 살던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부르게 된 것도 여기에 연유한다.

그러나 그들은 금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진정한 금의 발견은 엄청난 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1518년 멕시코로 원정을 떠난 스페인의 에르난도 코르테스에 의해서다. 그들은 1521년 멕시코 중앙고원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아즈텍 왕국을 정복해 대량의 금제품을 약탈, 막대한 금을 유럽인에게 선물했다.

20년 후에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페루·에콰도르·칠레에 거쳐 있었던 잉카제국을 정복하는 등 일련의 과정들이 이뤄져 식민지 건설이 가속화됐다. 제국들의 식민지 건설을 중심축으로 세계 질서가 부단히 바뀌며 세계사를 바꿔갔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다. 특히 1848∼1849년 캘리포니아주(州)에서 발견된 금을 채취하기 위해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든 ‘골드러시’와 서부 개척은 미국 정신을 탄생시켜 오늘날의 세계 강국을 낳게 된다. 서부로 몰려든 프런티어들의 개인주의·민주주의·낙천주의·애국심·반지성주의 등이 미국 고유의 정신들을 형성했던 것이다.

한국도 제국의 수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1895년 한국에서 가장 질 좋은 금광으로 알려진 평안북도 운산(雲山) 금광의 채굴권이 미국의 사업가 모스에게 넘어갔다. 이를 시발로 이듬해 러시아는 경원의 경성 광산, 1897년 독일은 강원도의 당현 금광 채굴권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영국은 평남의 은산 금광, 일본은 직산 금광, 프랑스는 평북의 창성 금광, 이탈리아는 평북의 후창 금광 채굴권 등을 줄줄이 가져갔다. 이에는 1860년대부터 새로운 금광이 발견되지 않아 1870년대 금값이 세계적으로 폭등하고 있었던 배경도 한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강준만, '미국사산책'(4)].

그야말로 극동의 한구석에 조용히 남아 있던 조선반도조차도 제국들의 처참한 수탈지가 되고 말았다. “캐내려 하는 광물이 많이 묻혀 있는 광맥”이나 “손쉽게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 ‘노다지’도 이 수탈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부들이 금맥을 캐는 과정에서 광맥이 발견되면 영어로 ‘노터치(no touch), 노터치’라고 불렀던 말을 오해해서 ‘금맥’이라고 여겼다는 데서 나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은 금맥이 아니라 조선반도였는데도 말이다.

 

운산금광 전경.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 있던 한국 최대의 금 광산이다.

5. 성(姓)과 국호로 사용된 금(金)

필자가 사는 부산 옆에 김해(金海)라는 곳이 있다. 김해공항으로 잘 알려진 이곳은 한국 최대의 강 낙동강의 하구로 바다와 맞닿아 있고 기름진 평야를 갖고 있어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었다. 이곳에서 세워진 최초의 국가가 ‘금관(金冠) 가야(伽耶)’다.

가야가 성장했던 이 지역은 ‘쇠의 바다’라는 김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 철을 매개로 성장했던 고대국가다. 금관(金冠)도 그 자체가 최고를 뜻하기도 하지만, ‘쇠(金)의 으뜸(冠)’이라는 뜻을 품었을 수도 있다.

가야는 최근에 들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던 모습보다는 훨씬 확장된 영역을 살았고, 남방적 성격이 강하다. 때문에 한국 문명의 정체성에 관한 기존의 북방 중심 이외의 특성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혹자는 그 중요성을 강조해 우리의 고대사도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사가 아닌 가야가 포함된 ‘사국사’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는 물론, 함안 지역의 아라가야, 고성 지역의 소가야, 창녕 지역의 비화가야, 고령 지역의 대가야, 성주 지역의 성산가야, 상주 지역의 고령가야 등 경상남·북도 전체를 포함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전라도의 장수 지역에서도 중요한 유적이 발견돼 가야문화권이 전라도 지역까지 확장됐던 문명권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철의 왕국 가야, 해상실크로드 구축했던 듯

‘철의 왕국’이라 불리던 가야, 이들은 ‘철’이라는 새로운 발명품을 매개로 바다 건너 일본과 중국의 장강 이남 백월(百越) 지역과 환(環) 황해권, 나아가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해로로 이어진 ‘해상실크로드’를 통해 해양 문화권을 구축하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한국 문명이 북방계 외에도 남방계의 문명이 더해 형성된 복합적 문명이었을 가능성도 높아가고 있다.

한국의 성씨 중 최고의 대성(大姓)인 김씨(金氏) 또한 금관(金冠)가야와 관련돼 있다. 김해 김씨는 김해(金海)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으로부터 그 성씨가 시작됐으며, 그 출발이 ‘쇠의 바다’ 김해와 연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또 경주 김씨는 신라의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알지는 65년 경주 계림의 소나무에 걸려 있던 금 궤짝에서 나왔다고 해 탈해왕이 김(金)이라고 성씨를 지어줬다고 한다. 모두 쇠나 황금과 관련됐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서는 금(金)이라는 왕조가 세워지기도 했다. 여진족이 세웠던 나라로 1115년부터 1234년까지 약 120년 간 존속했던 나라다. 그들은 왕조를 건립하고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했다. 이는 영원히 변치 않는 금(金)처럼 나라의 운명이 영원하길 바랐다는 뜻을 반영했다고도 하고, 그들이 처음 성장했던 곳이 금이 많이 나는 강이라는 뜻의 금수(金水)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들이 발원했던 지역이든 황금처럼 영원히 변치 않기를 바랐던 염원이든, 금(金)이라는 국호도 황금과 직접 닿아 있다.

6. 황금에 취한 인간

이처럼 황금은 인간 역사에서 대단히 매력적이고, 최고로 귀한 존재로 대접을 받아왔지만, 돌이켜보면 그보다 더 위험하고, 더 추악한 것도 없어 보인다. 끝없는 인간의 탐욕과 결합해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 기꺼이 황금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극단적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들은 더욱 그 극점에 서 있다.

식민지 개척용으로 미국으로 팔려갔던 아프리카의 노예들, 아득한 옛날 일 같지만 사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그들을 ‘검은 황금’이라 불렀다. 이렇게 잔인하다. 인간을 한 푼 돈으로 계산했던 것이다. 돈 앞에서, 황금 앞에서, 자본 앞에서 그렇게 굴욕적이며 동물적일 수가 없다. 인간이 토해낸 물욕, 돈에 대한 숭배, 그것은 ‘황금’에 대한 욕망에 다름 아니다.

어느 네티즌의 말이 무척 와 닿는다. “그 누런 황금을 캐기 위해서 눈에 핏발이 서고, 손이 무르고, 발이 부르트는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그 와중에 있고, 나도 그중 하나다. 오늘도, 황금냄새를 맡고 황금빛에 취하다가, 피곤에 눈까풀이 파르르 떨린다.”(해도지, [황금의 노예])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다. [한국역대한자자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