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선택한다
입력 2022.05.31 00:22
최명원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우리가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를 택함으로써 바로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들 말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있다면 선택이 아니라 축복이니까. 선택이 고통이 되는 것은 하나를 택한 기쁨보다는 하나를 버려야 하는 아쉬움과 상실감이 언제나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것을 선택하던 그 결과는 또다시 후회와 미련을 품은 고통의 단초가 된다. 그렇게 결정을 향한 통과의례에는 갈등을 품은 선택의 고통스러움이 잠재해 있다.
사랑과 우정 사이, 자신의 의지를 꺾으려는 매몰찬 가족의 반대처럼 어쩌면 소소하고도 지극히 개인적인 갈등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의무에 대한 저항이나, 거국적 이념과 신봉하는 가치를 두고 자기 자신 혹은 저버릴 수 없는 사람들의 목숨과 저울질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 갈등의 이면에는 신체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문의 극한 고통이나, 타인의 생살여탈권이 내 선택에 달려있다는 심리적 압박을 세워두기도 한다.
우리들의 일상은 갈등의 연속체
선택의 결과는 오롯이 수용해야
우리 삶은 온통 이런 선택의 순간들로 채워져 있어, 크건 작건 어느 하나를 택할지 갈등하는 요소들이 우리의 일상을 꾸려가고 있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한 끼 밥을 무엇으로 할지. 생선가게 혹은 과일가게 앞에서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선뜻 하나를 챙기지 못하는 모습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선택의 고전적 과제라 할 수 있는 짬뽕과 짜장, 비빔냉면과 물냉면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1000원에 5개 혹은 500원에 2개인 붕어빵도 선택의 기로에서 한몫한다. 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짓궂은 장난기를 발동하면서 아이들에게 “엄마냐 아빠냐”를 묻는 무책임한 선택의 강요도 있다. 그런데 도대체 그걸 알아서 뭐하게?
선택이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가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따져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선택이 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 근거가 놀랍게도 명백한 논리나 이성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어떤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일이 허다하다.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결정을 앞두고 흔들리는 고뇌의 순간이 있다 한들, 또 어떤 한 선택이 그 고뇌의 결과인 것 같아도, 결정의 순간에는 모든 근거들이 아예 상실되는 경우가 더 많다. 긴 시간 갈등하며 고민하던 갈림길에서 막상 결정은 순간적이며 즉흥적으로 진행된다.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어”라는 다행스러운 뿌듯함은 드문 경우다. 오히려 “그때 내가 왜 그런 결정을 했지?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라는 후회와 아쉬움을 마음속에 눌러 담는다. 그렇게 선택과 후회는 한 몸의 두 얼굴처럼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말한다. “역사에 가정(假定)이란 없다” 그래서 “그때 그랬었더라면”, 혹은 “그 시간이 다시 온다면”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고.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그때 짜장면 대신 짬뽕을 선택했던 오류는 크게 남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한 굽이 돌아 마주하는 여러 갈래 길을 두고 어떤 길로 들어설지를 선택한 결과는 오래도록 아쉬움으로 곱씹히기도 한다. 더구나 가보지 못한 채 남겨진 길들은 언제나 미련의 꼬투리가 되어 후회의 넋두리로 재생된다. 간혹 듣게 되는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부질없는 희망고문 같다. 그런 걸 왜 물어야 하지?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기쁨이 될지, 후회와 슬픔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되돌려 놓고 싶은 그때, 그 순간의 선택을 자책하는 것은 현실을 과거로 되돌려버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녹슬게 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을 틀리다”라는 자조적인 읊조림과 함께.
우리는 때로 분리할 수 없는 것들을 분리해 놓고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속앓이를 할 때도 있다. 동전의 앞뒤는 누가 봐도 확연히 다른 두 면이지만, 이 두면은 분리될 수 없다.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동전의 어느 한 면만 가져가라는 선택을 강요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가 겪는 많은 갈등의 순간들 또한 이런 양면을 가진 동전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더구나 과감히 어떤 것들을 버리고 하나를 택하는 우리의 결정이 때로는 그 하나만이 정답으로 남는 질문지에 대한 답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후회와 아쉬움은 그대로 거기에 남겨두고 그 결정의 순간과 결과를 오롯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다시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헛된) 다짐과 함께.
최명원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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