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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1351] 방호산(方壺山) 민병태

bindol 2022. 6. 13. 03:39

[조용헌 살롱] [1351] 방호산(方壺山) 민병태

입력 2022.06.13 00:00
 
 

호리병의 생김새는 주둥이 부분이 좁고 들어가면 넓게 생겼다. 이 호리병이 지리산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별칭이기도 하다. “왜 지리산을 ‘사방이 다 호리병이다’라는 의미의 방호산(方壺山)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지리산 치밭목 산장에서 30년을 살았으며 현재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말단 임시직으로 있는 민병태(68)는 뜻밖에도 이렇게 답했다. “사방에 호리병이 있다. 그 호리병은 계곡이다. 계곡은 입구가 좁고 그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특성이 있다. 계곡을 타고 들어가 보아야 알 수 있는 산이 방호산이다.

화개도 그렇고, 남명이 살았던 산청군의 덕산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좁은 계곡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의 입덕문(入德門)에서부터 2㎞는 좁은 계곡 길을 걸어 들어가야만 하였다. 함양의 마천도 계곡길이고, 남원의 뱀사골도 계곡을 통해서 들어가야 하는 길이다” 방호산(지리산)은 사방이 다 이렇게 좁은 병목처럼 계곡이 흐르고 있어서 그 안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어떤 풍광이 있는지를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산이었다. 한마디로 방호산의 의미는 속세와 격리된 별천지라는 이야기이다. 일본 도쿄의 이름난 골동품 가게인 ‘고주교(壺中居)’ 간판도 이런 맥락이다. 방호산의 천왕봉 마니아들이 찾았던 치밭목 산장은 귀신도 많았다. 빨치산과 토벌대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많았기 때문에 근처에서 수백 명이 죽었다.

민병태가 1980년대 중반에 치밭목 산장에 산장지기로 살 때만 하더라도 날 궂은 밤에는 밖에서 낮은 목소리로 ‘병태야! 병태야!’ 하는 소리가 들리곤 하였다. 밖에 나가보면 아무도 없었다. 다시 방에 들어오면 또 ‘병태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날 궂은 날에는 무서워서 방문에다가 라면 박스를 네댓 개쯤 높게 쌓아 놓고 보냈던 시절도 있었다.

민병태는 30년간 치밭목에 있으면서 대략 2000건의 구조와 100여 명의 조난 사고 시체를 운반하기도 하였다. 조난 사고는 폭설이 내릴때 영랑대(永郎臺·1740m) 근방에서 많이 발생하였다. 조난 신고를 받고 현장의 골짜기나 암벽에 도착하면 밤 10~11시가 된다. 영하 20~30도의 추위를 견디며 조난자와 밤을 보내다가 아침에 본격 구조대가 도착하는 수가 많다. 언젠가는 마암(馬巖)의 눈썹바위 밑에서 텐트 치고 야영하던 등산객이 바위가 떨어져 깔려 죽는 사고가 났다. 나뭇가지에 시체를 묶고 국립공원 직원들 네댓 명이 2~3㎞를 눈밭에서 끌고 내려오는 작업을 했다. 민병태를 통해서 요즘 방호산 공부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