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믿기 어려운 1000조 투자 계획
지방선거 직전 나온
1000조 투자, 40만명 고용 계획
시기도 현실성도 의문
기업 동원한 치적 홍보 그만
지난달 말 국내 주요 기업이 향후 5년간 투자 계획을 줄이어 발표했다. 삼성 450조원, SK 247조원, LG 106조원, 현대차 63조원 등 10개 그룹을 합쳐 1000조원을 넘었다. 5년간 40만명 이상을 신규 채용하겠다는 계획도 함께 내놨다. 후보자 시절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인은 업고 다니겠다”던 윤석열 대통령은 통 큰 투자 계획에 “이제는 정부가 기업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를 풀어 화답해야 한다”며 반색했다. 온라인에는 “역시 정권 바뀐 효과가 있다” “우리도 드디어 천조국이 됐다”같은 댓글이 달렸다.
기업이 투자와 고용을 늘리는 것은 언제나 환영할 일이지만, 이 계획이 실현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DI, 바이오로직스 등 계열사를 통틀어 삼성그룹은 지난해 61조원을 투자했다. 시설투자와 인수합병, 연구개발 비용을 모두 합친 액수다. 5년간 450조원 투자 목표를 달성하려면 연평균 투자액을 작년보다 50% 늘려야 한다. 지난해 6조원을 투자한 포스코그룹은 향후 5년간 53조원을 투자하겠다고 한다. 금리가 치솟고 성장보다 생존이 절박해진 시기에 투자를 갑자기 두 배 가까이 늘리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전체 직원수가 현재 102만명인 10개 그룹이 앞으로 5년간 40만명을 더 뽑겠다는 말도 허황되긴 마찬가지다.
대기업들이 약속이나 한듯 투자 계획을 내놓은 시점이 지방선거를 불과 일주일 앞둔 때였다는 점도 공교롭다. 1년도, 10년도 아닌 하필 대통령 임기와 딱 맞는 5년짜리 계획이라는 점도 특이하다. 대부분 기업은 연말에 다음 해 1년 치 투자 계획을 세운다. 간혹 장기 투자 계획을 발표하더라도 5년 단위 계획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1000조원 투자 계획이 급조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어느 대기업 임원은 “전날까지 아무 얘기도 없었는데 다음 날 갑자기 회사가 수십조원 투자를 발표해 솔직히 황당했다”고 말했다.
비슷한 일이 정권마다 반복된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대기업들을 불러모아 5대 신산업에 160조원을 투자하고 20만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감감무소식이다. 2016년엔 박근혜 대통령이 이란을 국빈 방문한 뒤 청와대는 한국 건설사들이 52조원 수주 잭팟을 터뜨렸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몇 달 만에 모두 없던 일이 됐고, 건설사들은 수주 가뭄에 시달렸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업계 관계자는 “몇몇 건설사가 수주를 추진 중이라는 보도가 나가자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직접 연락해 격려했는데,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건설사들이 가계약이나 양해각서(MOU) 등을 근거로 수주가 확정된 것처럼 경쟁적으로 발표했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1000조원 투자 계획을 새로 출범한 친(親)기업 정부를 환영하는 덕담쯤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투자와 고용은 기업의 주가와 실적, 더 길게는 흥망과 직결된다. 두산은 2007년 밥캣을 인수했다가 한때 그룹 전체가 존망 위기에 몰렸다. 현대차는 2014년 한전 부지를 인수한 날 주가가 9% 넘게 폭락했다. 이번 투자 계획 발표 때 해당 기업들의 주가가 미동도 안 한 걸 보면 투자자 누구도 진지하게 믿지는 않은 모양이다. 언제 어디에 얼마를 투자할지 구체적인 계획을 공시하지 않은 걸 보면 기업들 스스로도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선언적 의미 정도로 여긴 것 같다. 정부가 치적 홍보에 기업을 동원하고, 기업은 적당히 들러리 서는 구태는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정부나 기업 모두에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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