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의 조선

일제강점기 초등 교과서 “조선의 진짜 적은 명나라”

bindol 2022. 6. 25. 05:25

일제강점기 초등 교과서 “조선의 진짜 적은 명나라”

중앙일보

입력 2022.06.24 00:28

업데이트 2022.06.24 00:32

왜란·호란 왜곡한 식민주의 역사관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울타리 밑에서 어린아이가 어미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물어보니 그제 저녁 그 어미가 버리고 갔다고 한다. 오래지 않아 죽을 테니 불쌍하기 그지없다. 나도 머지않아 구덩이를 메우겠지. (…) 거지가 매우 드물다. 다 굶어 죽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은데, 육촌 친척을 죽여서 먹기까지 했단다. 이러다 가는 사람의 씨가 말라 버리겠다.”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쓴 임진왜란 때 피난 일기 『쇄미록(瑣尾錄)』에 나오는 참상이다.

건국 200년이 지나면서 조선은 두 차례의 큰 침략 전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다. 전쟁으로 망가진 일상이 평온을 대신했다. 미래도 불확실했지만, 무엇보다 당장의 목숨도 보전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분노와 좌절, 치욕과 자존, 책임과 회피가 공존하며, 서서히 사람들의 삶을 죄어들었다. 한 전쟁은 7년 동안 겪었다. 또 다른 전쟁은 한두 달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상(內傷)은 훨씬 크게 조선 사람들을 뒤흔들었다.

“일본군은 조선 위로, 명군은 약탈”
당쟁·사대성 들며 침략 사실 덮어

병자호란은 지리적 위치 탓 호도
조선의 유약성·비주체성에 방점

전란과 굶주림을 견뎌낸 백성들
삶의 터전 지키며 침략군에 맞서

오희문의 임진란 피난일기 『쇄미록』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평양성을 되찾는 모습을 그린 ‘평양성 탈환도’(부분). 왼쪽이 쫓겨가는 왜군이다. 작가 미상.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그 어느 것 하나 조선인이 원하거나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짓이겨진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수습해야 했다. 그래서 전쟁을 겪었던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 공과(功過)나 평가를 뒤로 미루게 되며, 공과나 평가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을 경우에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데 조선의 전쟁에 대한 접근에는 그런 조심스러움이 없다. 조심스럽기는커녕, 원래 조선은 약소국이라거나 사대주의에 찌든 결과라거나 하는 냉소나 패배주의가 사실과 해석을 대신한다. 그렇게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알아보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심상소학국사』 6단원 ‘임진란(壬辰亂)’의 ‘교수요지’, 즉 ‘핵심적으로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는 조항에서 이렇게 말했다. “본과에서는 사화(士禍)와 붕당(朋黨)이 이어지고, 그로 인해 국력이 차츰 쇠퇴해갈 즈음에 주변국들과 난리를 겪어 국력은 크게 피폐해졌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당시 일본의 국가 형편을 밝혀주며, 이른바 임진란(壬辰亂)에 관해 설명해야 한다.”

오희문의 임진왜란 피난 일기인 『쇄미록(瑣 尾錄)』. ‘자잘하고 볼품없는 피난민의 기록’을 뜻한다. 보물로 지정 된 『쇄미록』 원본. [사진 국립진주박물관]

이어서 교과서를 가르치는 지침에서는 이렇게 서술했다. “일본군이 조선 인민에 대해 안무(按撫)한 일부를 소개한다. 대부분 일본군은 난폭하게 어지럽히는 행위는 적었고, 거꾸로 구원하러 온 명나라 군대가 탈취와 약탈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여러 저서에 적지 않다.”

지침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조선인의 진짜 적은 일본 군대가 아니라 명나라 군대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제 식민사학의 ‘당쟁론’과 ‘사대주의론’이 ‘교육방침’의 형식으로 정식화했다. 일제강점기의 임진왜란 서술은 당쟁론과 결합해 침략전쟁으로서의 성격을 희석한 것이다.

『쇄미록』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번역본. [사진 전주대]

‘당쟁’에 대한 언급이 시작되면서 종종 그 ‘전쟁’을 잊고, 그 ‘침략성’을 잊는다. 침략성에 대한 주의가 사라지면 침략전쟁이 사람들의 심리에, 사고에, 처신에, 결국 삶에 미치는 외상(外傷)을 고려하지 않고 보통 평온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로 이해한다. 지금 비교적 평온한 일상을 살고 있어서 배려가 미치지 않는 것일까. 하긴 겪지 않은 일을 상상하는 데는 누구나 한계가 있을 것이다.

조선의 군사 지출비는 20%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전쟁의 원인을 안에서 찾는다. 이쯤에서 인간의 품위도 존엄도 어느덧 사라진다. 전쟁이 인간의 품위와 존엄을 뭉개는 것이 아니라, ‘당쟁’에 대한 사설(邪說)이 인간의 품위와 존엄을 뭉개게 된다. 당쟁하다 망했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너무도 쉽게 이 논리는 당해도 싸다는 냉소로 이어진다. 이같은 치환(置換)에 의한 사태의 역전은 침략당한 사회의 당쟁을 강조하여 전쟁의 침략성을 덮는 제국주의 프레임으로 종종 활용된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전쟁터가 됐던 조선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조선 사람들의 저력을 확인해준 전쟁이기도 했다. 명나라와 달리 조선은 평소에 농사를 짓다가 때가 되면 군사로 차출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시행했다. 이는 북방이 안정된 뒤로 상비군을 두지 않는 효율적인 군사비 절약 방안이었다. 지난해 3월 말 칼럼 ‘동아시아, 제국과 평화 사이’에서 살펴봤듯이 청나라의 약 50%, 에도 막부의 약 42%에 비해, 조선의 군사비 지출 비율은 약 20% 정도로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임진왜란 초반에 조선군이 밀린 이유일 것이다.

임진왜란 430주년을 맞아 지난달 25일 부산 충렬사에서 열린 제향 의식. 송봉근 기자

임진왜란이 진행되면서 차츰 조선 사람들은 대응 방향을 찾아 나갔다. 의주로 피난 갔던 조정은 전통적인 외교관계에 근거하여 명나라의 지원을 끌어냈고, 수군(水軍)을 시작으로 점차 관군들도 전투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선조 즉위 이후 사회적 지도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사림(士林)들과, 자신이 낳고 자란 삶의 터전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백성들은 힘을 합쳐 침략군과 맞서 싸우며 그 피해를 줄이는 데 앞장섰다.

일제강점기에 병자호란은 어떻게 가르쳤을까. 같은 『심상소학국사 보충교재』의 ‘교수요지’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본과에서는 청(淸)나라의 흥기(興起)와 더불어 조선이 그들에게 복속되기까지의 사정을 서술하고, 종래의 조선이 지리상으로 항상 북방의 억압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교재의 ‘강의요령’이나 ‘비고’에서 사실 중심으로 참고자료를 제시한 데 비하여, 전체 ‘교수요지’에서는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복속’과 ‘지리적 북방 억압’을 강조함으로써, 조선 역사에 대한 결과론적 접근과 지리 결정론적 역사 해석을 유도했다. 결과론은 현실을 합리화할뿐더러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왜곡된 자아의식을 내면화한다. 이를테면 조선이 약해서 당했다든지, 강한 나라에 붙어야 산다든지 같은 비주체적 감성이 그것이다. 또한 결정론은 사건이 발생한 여러 요인에 대한 탐구를 가로막는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결정론이 전제한 서사를 중심으로 사실에 대한 편협한 오해나 그릇된 왜곡이 이어진다.

호란 원인은 조선 내정의 혼란

오희문. 초상은 권오창 작가가 2020년 복원한 것이다. [사진 전주대]

이 무렵 여진족은 성장하고 있었다. 유목 민족의 경향이 그렇듯이 드문드문 떨어져 살다가 마치 소용돌이치듯이 힘이 집중되면서 세력을 형성해갔다. 여진족은 건주위(建州衛)의 누르하치(奴爾哈赤·1559~1626)를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만들어갔다.

1583년(선조16) 1월 니탕개의 난이 처음 발발하는데, 이 시점의 의미가 크다. 1467년 오오닌(應仁)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전국시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무력 통일로 끝나는데, 그해가 바로 1583년이었다. 도요토미는 그 기념으로 3월에 오사카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에서 병조판서로 군정(軍政) 개혁을 담당했던 인물이 이이(李珥·1536~1584)였다. 여진의 번호(藩胡) 중 하나였던 니탕개는 1만여 기(騎)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했다. 2차에 걸친 대규모 침입에도 니탕개는 진압당했다. 이때 참전한 장수는 신립(申砬)·정언신(鄭彦信)·이순신(李舜臣) 등 임진왜란 때 조선군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동아시아 정세로 볼 때 큰 문제는 임진왜란의 피해를 복구하고 국제적 세력 균형을 이룰 기회를 조선이 놓쳤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15년 동안 궁궐 공사에 골몰하며 민생과 재정을 망가트렸다. 그러므로 호란의 원인은 후금의 성장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조선 내정의 혼란이었다. 침략전쟁이 정당화될 수 없지만 “이 백성을 부양할 소임을 맡은 자가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했던 오희문의 말은 호란에도 적용된다.

비교적 평온했던 조선, 전쟁에 대한 오해
‘약소민족’‘시련’‘침략’ 등등, 조선시대를 설명할 때 곧잘 등장하는 콤플렉스의 수사학과는 달리 정작 조선시대에는 왜란과 호란 두 차례를 제외하면 몇몇 전투만 기억에 남을 뿐 대체로 탈 없이 평화롭게 지나갔던 편이다. 문약(文弱)에 빠졌다는 비하도 가능하지만, 굳이 머리맡에 총칼을 두고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폭력에 의존하는 일 없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즉 평화에 대한 탐구는 전쟁에 대한 탐구에 선행돼야 한다.

이것이 전쟁사 연구가 쉽지 않은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전쟁만큼 욕망과 명분의 괴리가 그토록 크고 어리석은 방식으로 합리화되는 행위가 또 있을까. 전쟁에서 가장 먼저 죽는 사람이 그 사회의 ‘최적 구성원’인 젊은이라는 것만 생각해도 황당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가.

언제나 그렇듯이 정의나 양심이 결핍되면 폭력이 사태를 결정한다. 손자(孫子)나 클라우제비츠의 말대로 전쟁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피할 수 없을 때는 자기 자신이나 자식을 최전선에 세울 수 있는 자들만이 전쟁을 결정하도록 시스템을 짜자. 희생에 대한 숙연함이라도 건질 수 있도록.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