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의 조선

과거시험에서 묻다 “술이 빚는 재앙을 논하라

bindol 2022. 6. 25. 05:21

과거시험에서 묻다 “술이 빚는 재앙을 논하라”

중앙일보

입력 2022.04.29 00:32

업데이트 2022.05.02 07:00

권장과 경계, 술의 두 얼굴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손자가 횡설수설하길래 다그쳐 보니 술을 마셨단다. 말이 거칠고 비틀거렸다. 술이 깰 때를 기다려 종아리를 걷어 회초리를 쳤다.” 조선 명종(明宗) 때 이문건(李文楗)의 『손자 기른 이야기(양아록·養兒錄)』에 나오는 일화다. 13세 된 손자 숙길(나중에 수봉으로 이름 고침)을 데리고 정 생원 집에 갔는데, 돌아올 때 숙길이가 횡설수설하길래 다그쳐보니 술을 마셨던 거다. 이문건은 술이 깰 때를 기다려 종아리를 걷어 회초리를 쳤다. 숙길이는 누이들에게도 10대씩 맞았고, 어머니·할머니에게도 10대씩 맞았으며, 할아버지 이문건에게는 20대를 맞았다.

중종 때 답안 “술은 덕성 베는 도끼”
돼지·닭고기 등 안주류도 비판해

제사나 잔치에 빠질 수 없는 음식
흉년이 들면 금주령 내리며 단속

조선 후기 갈수록 술 종류 늘어나
농업생산성 높아지며 민생도 안정

술 취한 13세 손자에 회초리

풍속화가 김홍도의 ‘벼 타작’. 저 항아리에 든 건 술일까, 물일까? 타작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고 얼굴이 발그레한 걸 보면 술이 아니었을까.[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문건은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었는데, 을사사화(乙巳士禍·1545)에 연루돼 경상도 성주(星州)로 귀양 갔다. 그때 쓴 『묵재일기(默齋日記)』가 지금도 전해진다. 『양아록』에 따르면 숙길의 술주정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듬해인 14세 때, 동네 사람들이 술을 권하면 숙길이는 주저 없이 마셨다. 자주 취하고 토해서 할아버지를 애태웠다. 혹시 숙길이가 태어났을 때 이문건이 혼자 막걸리를 마시며 할아버지가 된 걸 자축했던 탓이 아니었을까.

연상되는 기억 하나. 마루 한쪽에 놓여있던 맷돌에 어디가 부딪힌 거 같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어렴풋이 할머니가 싸리비를 들고 쳐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날 감싸 안았다. 내가 술지게미를 먹었다고 한다. 아마 집에서 술 담그고 남은 걸 모르고 먹었던가 보다. 비틀거리는 어린 손자에게 화가 난 할머니는 싸리비를 들고 달려오시고, 이모는 나를 안고 피했다. 학교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동네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드물지 않았다. 적어도 논일 할 때면 고등학교 다니는 형들에게 막걸리를 허락했다. 나는 이문건의 손자 숙길이의 연장에 있었다.

풍석(楓石) 서유구가 집대성한 조선 후기 최대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 중 『정조지(鼎俎志)』. 조선의 술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망라했다.

중국 고전  『서경(書經)』에 보면 은(殷)나라 사람들이 지나치게 술을 즐기는 걸 경계했다. 임금이었던 주(紂)가 끼친 악영향으로 풍속이 타락한 것이었다. 주 임금은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고사를 만들어낸 인물인데, 그 고사는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주 임금은 술을 좋아하고… 달기(妲己)라는 여자를 사랑하여 그녀의 말은 무엇이나 들어 주었다… 술로 못을 만들고 고기를 달아 숲을 만든 다음 남녀가 벌거벗고 밤낮없이 술을 퍼마시며 즐겼다”고 했던 데서 나왔다.

하여 주(周)나라를 세운 문왕(文王)은 “제사 때만 술을 쓰고, 평소에는 마시지 말라”고 했다. “작은 나라나 큰 나라가 망한 것은 술의 죄가 아닌 것이 없다” “술 마시지 말고 농사에 힘쓴 뒤 교역을 해서 가족이 풍요로워지면 음식과 술을 마련해서 즐기라”는 말이었다. 이 문왕의 말을 아들 무왕(武王)이 전했는데, 그것이 『서경』의 ‘주고(酒誥)’였다.

임원경제 연구소에서 『정조지』에 나오는 각종 술을 재연한 모습.[사진 임원경제연구소]

조선조에도 세종(世宗), 성종(成宗) 역시 글을 지어 술을 경계했다. 그러나 사람 일이 어디 뜻대로 되던가. 급기야 1513년(중종8) 과거시험에는 ‘술이 초래하는 재앙(酒禍·주앙)’에 대한 논술 문제가 나왔다. 이는 잔치로 날을 지새웠던 연산군대를 지나며 흐트러진 민심을 다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시험문제는 이러했다. “요즘 술 마시기 좋아하는 것이 더욱 심해져 술에 빠져 할 일을 전폐하기도 하고, 정신이 혼미해져 덕성을 무너뜨린다. 흉년에 금주령을 내려도 민간에서 술 빚기를 그치지 않아 곡식이 남아나지 않는다. 이를 구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를 책문(策問)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도 ‘정책에 대한 질문’이다. 다행히 이 책문에 대한 답변, 즉 대책(對策) 한 편이 남아 있어, 당시 술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김구(金絿·1488~1534)라는 분의 답안이다.

조선 명종 때 문인 이문건이 쓴 『손자 기른 이야기(養兒錄)』. 이문건은 좋을 때나 슬플 때나 술을 즐겼다.

“재물로 생기는 화근보다 구제하기 어려운 것이 마음에 생기는 화근인데, 그 심화(心禍)는 술에서 비롯된다. 술은 덕성을 베는 도끼이다. 술을 마시면 인격자도 어리석어지고, 명철한 사람도 혼미해지며, 강한 사람도 나약해지기 때문이다. 술은 곧 마음을 공격하는 문(門)인 셈이다.” 책문에서 보다시피 사람들은 술을 없애고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술안주로 찾던 삶은 돼지나 닭곰탕까지 덩달아 도마에 올랐다.

음주 혁파하려다 공격당한 조광조

조광조

하지만 술의 쓰임도 만만치 않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술을 찾는 건 인류의 오랜 풍습 중 하나다. 동서, 고금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은 없었던 듯하다. 제사를 지내고 친지들과 잔치를 벌이는 행사에서 빠질 수 없었다. 더구나 술 때문에 병이 나거나 화를 당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먹어서 초래한 일 아닌가. 결국 먹은 건 자기 마음인데 구차하게 술을 탓하는 게 아닌가.

또한 사람들이 이를 연산군 때의 폐습이라고 하지만, ‘성상(=중종)이 즉위한 뒤에도’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이는 법으로만 금지하고 반정 공신인 고관대작의 집에서는 밤낮으로 시끌벅적하게 술 마시고 춤추며 떠드는 풍조가 여전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광조(趙光祖) 등이 이런 풍조를 혁신하려고 했다가 중종의 변심과, 훈구파인 심정(沈貞) 등 및 그에 동조한 남곤(南袞)의 반동으로 초래된 변고가 기묘사화였다. 위 답안의 작성자였던 김구 또한 경상도 남해로 귀양을 갔다.

금주령은 조선시대 어느 때나 있었다. 그러나 중종 때와 같은 사회 풍조의 해이 때문이라기보다 농업 기반의 사회가 지닌 민생 안정이라는 이유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가뭄이나 홍수로 인해 흉년이 들면 금주령을 발표했다가, 풍년이 들었을 때 해제하는 것이 그 예다. 흉년이 심하면 노인이나 환자가 약(藥)으로 먹는 술도 금지할 때가 있었다. 이외에 상을 당했을 때나, 태풍 등 기상 이변일 때는 조정에서부터 술을 금했다.

분명한 것은 이문건처럼 자손을 보았을 때, 친구가 왔거나 떠날 때, 귀양을 갈 때, 조정이든 마을에서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수고했다고 격려하거나 칭찬할 때 조선사람들에게서 술이 빠지지 않았다. 힘든 농사 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정조 때 민간 누룩 제조·판매 허용

전체적인 경향으로 보면 조선 전기보다 후기에는 금주령이 적었던 듯하다. 아마 농업 생산성이 높아져서 술을 빚는 일이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5, 16세기에는 수리 기술이 발달하여 벼농사에 이앙법이 확산됐다. 저수지에 의존하던 관개시설도 지류 하천을 막아 농지 곳곳에 물을 보낼 수 있는 보(洑·천방)가 설치돼 한결 안정됐다. 인분·재 등을 비료로 활용해서 지력을 높인 것도 생산성 향상에 기여했다. 그 때문에 장유(張維)가 ‘이 밭에 차조 밭 몇 이랑 일군다면 누룩 엿기름 충분히 쓰리라(兼須百畒秫 足充麴糵用, 겸수백묘출 족충국얼용)’고 읊었던 배경이다.

이제 누룩이 문제가 됐다. 술 빚을 여유가 생기자, 누룩 유통도 늘어나서 관청에서 제조했던 누룩을 상인이나 일반 백성도 만들기 시작했다. 영조 때 금주령은 누룩 제조 금지령까지 포함했다. 서강과 마포 일대 백성들은 밀이 익을 때 누룩을 만들어 영등포·노량진 지역 주민에게 팔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는 게 나아지면서 술 소비는 더 늘었고 그에 따라 누룩을 만드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정조 때가 되면 백성들도 10덩어리 미만의 누룩은 만들거나 팔 수 있었다. 아마 이런 흐름에서 조선의 집집마다 친구나 손님에게 내놓는 다양한 술이 생산될 수 있었지 않았나 한다.

‘임원경제지’에 소개된 술만 수백 종
1960~70년대 ‘술조사’라는 게 있었다. 술 담근 집을 적발하여, 술독을 깨고 벌금을 매겼다. 곡류 자급이 부족했을 때 개별적으로 쌀이나 밀로 술을 담그지 못하게 했던 것은 조선에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 강점기에 식량 공출 전후로 사라진 ‘조선술’은 대한민국이 건국한 뒤에도 살아나지 못했다.

술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서유구가 쓴 조선 최대 백과사전 『임원경제지』의 요리·음식편인 『정조지』에는 쌀로 빚은 청주인 이류, 2~3번 거듭 빚은 주류(酎類), 계절에 맞추어 빚는 시양류, 국화주 같은 향양류, 과실로 담그는 과라양류, 막걸리 종류인 앙료류, 이강주 같은 소주를 다룬 소로류까지 수백 가지 술이 소개됐다.

이 모든 술을 다 맛보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다. 하지만 약간 삶의 폭을 넉넉하게 만드는 데 술만한 것이 없으니 멀리할 수는 없겠다. 술 때문에 실수도 잦았던 터라, 경계하는 점도 있다. 마신 뒤 산책이나 가벼운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면 어떨까.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