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한수

서예 대가를 향한 경의[이준식의 한시 한 수]〈176〉

bindol 2022. 9. 2. 05:50

서예 대가를 향한 경의[이준식의 한시 한 수]〈176〉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09-02 03:00업데이트 2022-09-02 03:14
 

 

 

醉後贈張九旭  / 高適

世上謾相識  세상만상식
此翁殊不然  차옹수불연
興來書自聖  흥래서자성 
醉後語尤顚  취후어우전
白髮老閑事  백발노한사
靑雲再目前  청운재목전
床頭一壺酒  상두일호주
能更幾回眠  능갱기회안

 

세상에선 허투루 사람을 사귀기도 하지만
이 어르신은 전혀 딴판이지
흥 나서 글씨 쓰면 성인의 경지요
취한 후 뱉는 말은 거칠 게 없지
백발이 되도록 늘 한가롭게 지내기에
그저 푸른 구름만이 눈앞에 있었지
침상 머리맡엔 언제나 술병이 하나
얼마나 더 이분을 취해 잠들게 할는지

 
* 謾 ; 속일 만, 헐뜯을 만. 게으를 만.
* 殊 ; 죽일 수. 다를 수. 뛰어날 수.
―‘취한 뒤 장욱에게 주다(취후증장구욱·醉後贈張九旭)’ 고적(高適·약 704∼765)


당대의 서예가 장욱(張旭)은 술에 잔뜩 취한 후 붓을 내갈기는 기벽(奇癖)이 있어서 ‘장전’(張顚·미치광이 장욱), 또 초서(草書)의 대가라 하여 ‘초성(草聖)’이라 불렸다. 두보가 이백 등 8인을 뽑아 음주의 신선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장욱을 ‘술 석 잔이면 초서의 성인이 되지. 관모도 벗은 채 왕공(王公) 앞에 나아가, 종이 위에 휘호하면 글씨는 마치 구름 같고 안개 같았지’라 했다. 장욱에게 글씨와 술이 한 몸처럼 따라붙었다는 얘기다. 고적은 장욱보다 나이도 훨씬 어렸고, 장안에서 잠시 교류한 것 외에 그와 별 깊은 인연은 없었다. 하나 시인은 가식 없고 명리에 초연했던 이 노인의 인품을 오래 흠모했던 모양이다. 취기가 오른 어느 날 시인은 문득 장욱의 삶을 부러운 듯 떠올렸고 경의(敬意)를 표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이 서로 사귄다고 해서 꼭 진정성이 있는 건 아니다. 말로는 절친이라면서도 위선적일 때도 있기 마련인데 이분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취한 채 붓을 잡지만 그 글씨는 신묘한 경지에 이르고, 꾸밈이나 거짓이 없으니 언사도 거침 없다. 평생 한가롭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세상사에 무심한 채 푸른 하늘과 구름과 술을 곁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을 이리 흠모하긴 했어도 실제 고적은 변방의 전선을 오가는 등 관직 생활에 무척 적극적이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