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삼천리강토의 인민은 모두 노예요
- 則凡我三千里人民, 皆奴隸耳·즉범아삼천리인민, 개노예이
우리에게 국토와 인민이 있어도 스스로 주권을 행사할 수 없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통감(統監)하게 하니 이는 군주를 가지지 않은 것이다. 나라가 없고 군주가 없다면, 우리 삼천리강토의 인민은 모두 노예요, 신첩(臣妾)이다.
我有土地人民, 而不能自主, 使他人代監, 則是無君也. 無國無君, 則凡我三千里人民, 皆奴隸耳, 臣妾耳.(아유토지인민, 이 불능자주, 사타인대감, 즉시무군야. 무국무군, 즉범아삼천리인민, 개노예이. 신첩이.)
위 문장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7) 선생의 ‘布告八道士民’(포고팔도토민·팔도의 국민에게 포고하다)의 일부분으로, 그의 문집인 ‘면암집(勉菴集)’ 권16에 수록돼 있다.
1905년 양력 11월 17일(음력 10월 21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압하여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체결하자 최익현이 전 국민에게 궐기할 것을 호소하며 쓴 글이다. 이 조약은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고, 8월에는 제2차 영일(英日)동맹 조약을 통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9월 5일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권리를 승인받았다. 이어 일본은 한국에 보호조약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연일 반일 열기가 고조됐다. 장지연은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써 일제의 침략성과 조약에 조인한 매국 대신들을 비판했다. ‘대한매일신보’ 등도 조약 무효를 알리는 글을 싣고 반일 여론을 확산시켰다. 최익현은 이 조약이 체결되자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 등을 올려 조약 무효를 선포하고 망국 조약에 참여한 박제순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운동은 항일의병운동으로 전개됐다. 어제 목압서사 인근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다는 분이 서사 간판을 보고 들어와 차를 마시는 도중에 “요즘 시대에 면암 최익현 같은 분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해 그를 상기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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