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체제를 연구해온 학자 프랑크 디쾨터는 “독재에도 연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포와 폭력만으로는 권력 유지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받쳐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거와 주민투표를 앞세워 민주주의로 포장하는 것은 대표적인 연출 기법 중 하나다. 아이티와 콩고, 베트남 등에서도 과거 95∼99%가 넘는 찬성률이 나왔다. 100%를 넘어서는 기이한 투표율로 국제사회의 조롱을 받기도 했다.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투표의 기본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결과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에 점령한 지역 4곳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찬성률이 최대 99%로 집계됐다고 한다. 투표는 총으로 무장한 러시아 헌병과 선관위 직원이 가가호호 찾아가 투표용지를 받는 식으로 진행됐다. 투표소에는 러시아 용병기업 와그너그룹의 상징인 해골 모양 마크를 단 군인이 경계를 섰다. 배치된 투표함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박스였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투표하지 않는 것은 지하실로 끌려가는 직행 티켓”이라는 게 한 우크라이나 언론이 외신에 전한 분위기다.
▷러시아가 무리수를 써가며 우크라이나 동남부 병합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화력 보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게 정설이다. 병합 지역이 공격받게 되면 ‘영토 수호’를 주장하며 대대적인 총공세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새 병합지와의 조약 체결, 병합의 합헌 여부 검증, 의회와의 협의 및 비준 동의, 대통령 최종 서명 등 절차를 준비 중이다. 핵전쟁의 방아쇠가 될 수도 있는 ‘땅따먹기 쇼’가 21세기 지구촌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