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한강 2.0′
1955년 상경한 아버지가 본 한강엔 백사장과 판잣집뿐이었다고 한다. 겨울 갈수기엔 50m인 강폭이 여름 홍수 땐 2000m를 넘었다. 그럴 땐 판잣집이 잠기고 사람이 쓸려 갔다. 최대 유량과 최소 유량의 비를 하상(河床)계수라 한다. 유럽의 강은 이 수치가 작아 50 안쪽이지만 그 시절 한강은 450을 넘었다. 전형적인 후진국 강이었다.
![](https://blog.kakaocdn.net/dn/oohmQ/btrNs3HL9ru/YHd7KffplFzSawCb6lbZs1/img.jpg)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 장군은 서울의 폐허를 목도하고 “이 나라를 재건하려면 최소 100년은 걸리겠다”고 했다. 그 예상을 뒤집고 연간 10% 넘나드는 성장률로 커가는 한국을 세계는 ‘한강의 기적’이라며 상찬했다. 정작 한강 자체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66년의 한강 개발,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1982년 시작한 한강 종합 개발은 문화 인프라까지 구축할 여력이 없었다. 올림픽도로가 뚫리며 교통은 좋아졌지만 시민의 한강 접근은 막혔다. 인구 폭증을 감당하느라 강변엔 아파트만 병풍처럼 들어섰다.
▶올해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자 세계 각국이 LED 조명으로 우크라이나 국기를 만들어 자국 명소를 비췄다. 한 외신은 이 소식을 전하며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 파리 에펠탑, 로마 콜로세움, 독일 브란덴부르크문과 함께 한강 세빛섬 사진을 실었다. 한국과 한강에 대한 세계의 인지도가 이 정도다. 경제만 잘나가던 시절엔 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강이 세계적 패션 회사와 IT 기업의 프레젠테이션 장소로 인기라는 뉴스가 어제 조선일보에 실렸다. 이탈리아 패션 업체 발렌티노, 프랑스의 카르티에가 잇달아 한강을 발표 무대로 택했다. 세계적 모델 타이라 뱅크스가 몇 해 전 한강에서 연 패션쇼는 전 세계 140나라에 중계됐다. 반포대교 아래서 사랑을 나누는 한류 드라마에 매혹된 외국 청춘 남녀는 ‘한류 명소 10′ 같은 지도를 들고 한강의 영화, 드라마 무대를 찾는다. 얼마 전 한강에 산책 갔다가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에 나오는 가면과 의상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이들도 봤다.
▶한국인이 땀 흘려 이룬 경제 기적이 ‘한강의 기적 1.0′이라면, K팝·드라마·영화가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은 한류 열풍은 ‘한강 2.0′일 것이다. 영국인들은 템스강을 ‘흐르는 역사(Liquid history)’라고 부른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시절 무역의 강이었던 위상이 20세기 국력 하강과 함께 추락했다가 21세기 테이트모던 미술관 등 미술·공연의 메카로 거듭난 것을 자랑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한강의 기적’도 3.0, 4.0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발전할 것이다.
'만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물상] 미사일 오작동 (0) | 2022.10.07 |
---|---|
[만물상] 황제 도피 (0) | 2022.10.01 |
[만물상] 다시 북적대는 명동 (0) | 2022.09.29 |
[만물상] 핵의 절차 (0) | 2022.09.28 |
[만물상] 들리는 소리, 안 들리는 소리 (0) | 2022.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