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문일평 어록비

bindol 2022. 10. 6. 18:57

[이규태코너] 문일평 어록비

조선일보
입력 2005.06.26 21:51
 
 
 
 

기미 독립선언에 이어 '다시(又)독립선언'으로 불리는 독립선언이 있었다. 기미 만세물결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어지던 기미년 3월 12일 한반도의 정신적 중심지인 서울 보신각(普信閣) 앞에서였다. 두루마기 차림의 20대 청년이 손수 작성한 선언문을 억양을 높여가며 읽어내렸다. 이 청년은 그 길로 연행되어 8개월간의 옥살이를 치렀다. 그 청년이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이요 그가 낭독한 다시독립선언문 중의 핵심대목인 "조선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요 인도(人道)로서 대세 필연의 공리요 철칙이다"라고 새긴 어록비가 일전 목천 독립기념관 흑성산 기슭에서 제막되었다.

청년 호암은 도쿄 유학시절 신의학인 X레이로 전신을 찍은 일이 있었다. 그 골격사진을 보고 깨달음이 컸음을 자신의 전기에 적고 있다. 물론 장자(莊子)나 원효(元曉)처럼 해골에서 촉발된 심오한 것은 아닐지 모르나 그 하찮은 골격에 잠시 기생하는 정신의 값진 쓸모에 대해서 고민한 것이다.

당시 호암은 망명 중인 임시정부 요인인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그리고 김규식(金奎植) 조소앙(趙素昻) 홍명희(洪命熹) 등과 더불어 숙식을 하며 영향을 받고 정신의 값진 쓸모의 대상을 포섭했으며 그것이 '다시독립선언'으로 나타나고 일제의 민족소멸 수단인 언어 역사 문화 말살에 저항하는 조선학(朝鮮學) 운동에 여생을 바치기에 이른 것이다. 곧 민족이 사는 길은 조선심(朝鮮心)이 잠재된 조선 언어-역사-문학-민속-의식주 등 문화를 총망라한 조선학의 발굴 계몽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같은 이념으로 텃밭을 내준 조선일보에만도 원고지 10만여장에 400여편의 조선학 관계 글을 실어 희미하게 스러져가는 민족의 등불에 심지를 돋우었다.

그가 숨을 돌릴 때 그의 머리맡에는 야국(野菊) 한송이가 놓여 있었다 한다. 가꾸지 않아도 또 짓밟아도, 보아주는 이 없어도 야인의 외골수처럼 순백하게 피어나는 조선심이라 하여 가까이 했던 들국화다. 지금 세상에서 새삼 호암이 부각되는 것은 민족의 존재증명인 한국적 요인들이 일제 아닌 서양풍조에 무참하게 훼손당하고 있다는 공통성 때문이다. 발전하는 세계문명에 기여할 한국적 요인의 발굴 기여는 호암의 조선학 취지요 젖먹이 상태를 못 벗어나고 있는 이 한국학의 앞날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호암이기도 하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