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공비처(公非處)

bindol 2022. 10. 14. 08:26

[이규태 코너] 공비처(公非處)

조선일보
입력 2004.06.10 17:16
 
 
 
 

대통령 친인척, 국회의원, 장성, 검사, 국가정보원 간부 등 여태까지 비리의 미풍(微風) 지대에도 샅샅이 서릿바람을 넣는 고급공직자 비리 조사처(公非處)를 강화하는 법 개정을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초록이 동색이듯이 비리를 칼질하는 권력은 고위 권력자 앞에서 그 날이 무디어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제도보다 의지에 있다고 본다. 우리 역사 시기에도 공비처의 제도적 보장은 지금보다 잘 돼 있었지만 고위 공직사회의 부패는 그 실행의지에 따라 좌우됐을 뿐 제도 때문에 맑아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의 기강을 잡는 사헌부(司憲府)의 드러내지 않은 별도 조직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使)라는 병정직이 있었다. 지금 중앙청 종합청사께에 있었던 예조(禮曹) 이웃에 자리잡은 사헌부 정문인 삼문(三門)에 세조 때 학자 서거정(徐居正)이 쓴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 오늘의 공비처 정신이 명기돼 있었다. ‘시어사(侍御使)는 임금에게 과실이 있을 때에 노여움으로 거슬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장상대신(將相大臣)에게 허물이 있으면 규탄하여 바로잡고, 종실의 귀척으로 교만하고 간악하면 탄핵하며, 간사한 소인이 조정에 있으면 쫓아내고, 세도에 붙어 뇌물을 받거나 이권을 탐하면 물리쳐 모든 벼슬아치가 두려워하게 되니 그 직책이 어찌 중하지 아니한가’ 했다. 임금의 비행까지 다루었음에 주의하게 된다. 직명으로 보아 임금과 직결된 이 시어사인데도 평소의 행색은 망가진 안장과 테가 좁은 관모에 해진 옷과 신발, 그리고 베 조각으로 이은 띠를 맨 파락호 같은 차림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말로 예상 못했던 봉변을 ‘야다시’라 했는데, 이 시어사들이 암행에서 살핀 비리의 응징을 집행하는 모임을, 밤에 정해진 장소에 모여 차를 마시며 의논한다 하여 야다시(夜茶時)로 불렀다. 죄목을 널빤지에 적어 당사자인 고위공직자의 집에 가 대문에 내어걸고 담벽 둘레를 가시덤불로 둘러쌓아 폐쇄시킨다. 이렇게 야다시를 당하면 조정에 나아가 관복을 벗고 대죄해야 하며 영구히 버림받는 몸이 된다. 법 개정을 하는 김에 전통 비공처의 수위만큼 강도를 높였으면 한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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