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만물상] 정치 ‘탑압’

bindol 2022. 10. 21. 17:13

[만물상] 정치 ‘탑압’

입력 2022.10.19 03:18
 
 

최근 책을 읽다 ‘르포이센’이란 단어를 발견했다. ‘프로이센’의 오자이지만, 이런 오류를 찾아내는 게 명백한 오탈자 찾기보다 더 어렵다. 뇌과학에선 ‘뇌가 가진 선입견이 시각을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객관적 정보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뇌가 대상의 기억을 떠올려 연상하는 과정이다. 뻔히 눈앞에 있었던 것을 못 봤다고 하는 사람도 나온다. 여러 사람이 공 뺏기 놀이를 하는 와중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을 그들 가운데 들어가게 한 실험이 있었다. 놀이가 끝난 뒤 참가자들에게 물었더니 60%가 “고릴라가 있었느냐?”고 했다.

▶공에만 집중하느라 고릴라를 못 보는 현상을 ‘무주의 맹시(盲視)’라 한다. 무주의 맹시는 원래 생존을 위한 진화의 결과였다. 동물은 눈앞에 나타난 것이 천적인지 사냥감인지 단숨에 파악해야 했다. 꾸물대다간 목숨이 날아가거나 굶는다. 이때 뇌의 전두엽과 두정엽이 주변 풍경 등 덜 중요한 정보를 삭제한다. 복잡한 사회 관계를 맺고 사는 인간은 여기에다 호불호와 윤리 등의 가위질까지 더한다.

▶민주당 의원 17명이 그제 서울 대통령실 앞에서 윤석열 정부가 야당을 탄압한다며 항의 시위를 했다. 그런데 손에 ‘정치 탑압’이라고 잘못 쓰인 피켓을 들고 있었다. 어른 손바닥만 한 큰 글씨였는데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뇌가 ‘정치 탄압’이라는 기억을 꺼내 연상 작용을 하면서 ‘탑’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이 사진이 신문에 실리자 인터넷에선 ‘국어 탑압’이라는 풍자도 나왔다.

 

▶정치 탄압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민주당과 문재인 정권 사람들이 ‘정치 탑압 말라’는 피켓을 들고 엄숙하게 선 모습은 묘한 아이러니도 느끼게 한다. 문 정권 시절 혹독한 수사를 받다 극단적 선택을 한 전 정권 사람이 4명이었다. 전 정권 사람들의 징역 합계는 100년을 넘었다. KBS·MBC를 장악하려 김밥 값까지 문제 삼았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선 수사 뭉개기, 재판 질질 끌기로 흐지부지시켰다. 그래 놓고 야당이 되자 ‘정치 탄압 말라’고 한다.

▶뇌에 대한 지식이 없던 고대에도 인간은 눈이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시인·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정신의 과오를 눈에 전가하지 말라”고 했다. ‘탄압’을 ‘탑압’으로 쓰고서 못 본 것도 단지 눈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불과 얼마 전 자신의 모습에 두 눈을 다 감은 이들의 정신적 과오가 아닐까 한다.

입력 2022.10.19 03:18
 
 
 
 
 

최근 책을 읽다 ‘르포이센’이란 단어를 발견했다. ‘프로이센’의 오자이지만, 이런 오류를 찾아내는 게 명백한 오탈자 찾기보다 더 어렵다. 뇌과학에선 ‘뇌가 가진 선입견이 시각을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객관적 정보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뇌가 대상의 기억을 떠올려 연상하는 과정이다. 뻔히 눈앞에 있었던 것을 못 봤다고 하는 사람도 나온다. 여러 사람이 공 뺏기 놀이를 하는 와중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을 그들 가운데 들어가게 한 실험이 있었다. 놀이가 끝난 뒤 참가자들에게 물었더니 60%가 “고릴라가 있었느냐?”고 했다.

▶공에만 집중하느라 고릴라를 못 보는 현상을 ‘무주의 맹시(盲視)’라 한다. 무주의 맹시는 원래 생존을 위한 진화의 결과였다. 동물은 눈앞에 나타난 것이 천적인지 사냥감인지 단숨에 파악해야 했다. 꾸물대다간 목숨이 날아가거나 굶는다. 이때 뇌의 전두엽과 두정엽이 주변 풍경 등 덜 중요한 정보를 삭제한다. 복잡한 사회 관계를 맺고 사는 인간은 여기에다 호불호와 윤리 등의 가위질까지 더한다.

▶민주당 의원 17명이 그제 서울 대통령실 앞에서 윤석열 정부가 야당을 탄압한다며 항의 시위를 했다. 그런데 손에 ‘정치 탑압’이라고 잘못 쓰인 피켓을 들고 있었다. 어른 손바닥만 한 큰 글씨였는데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뇌가 ‘정치 탄압’이라는 기억을 꺼내 연상 작용을 하면서 ‘탑’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이 사진이 신문에 실리자 인터넷에선 ‘국어 탑압’이라는 풍자도 나왔다.

 

▶정치 탄압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민주당과 문재인 정권 사람들이 ‘정치 탑압 말라’는 피켓을 들고 엄숙하게 선 모습은 묘한 아이러니도 느끼게 한다. 문 정권 시절 혹독한 수사를 받다 극단적 선택을 한 전 정권 사람이 4명이었다. 전 정권 사람들의 징역 합계는 100년을 넘었다. KBS·MBC를 장악하려 김밥 값까지 문제 삼았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선 수사 뭉개기, 재판 질질 끌기로 흐지부지시켰다. 그래 놓고 야당이 되자 ‘정치 탄압 말라’고 한다.

▶뇌에 대한 지식이 없던 고대에도 인간은 눈이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시인·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정신의 과오를 눈에 전가하지 말라”고 했다. ‘탄압’을 ‘탑압’으로 쓰고서 못 본 것도 단지 눈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불과 얼마 전 자신의 모습에 두 눈을 다 감은 이들의 정신적 과오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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