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추운 한 해를 보낸 곳은 유학 시절 일본 도쿄의 북향(北向) 집이다. 어찌나 각도를 태양 반대 방향으로 정확히 맞췄는지 사시사철 햇빛이 한 조각도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내 전기장판 위에서 떨면서 잤다. 난방 시설이 없는 비좁은 방 하나와 부엌, 화장실이 전부였지만 이런 집 월세가 일본 신입 사원 월급의 절반 가까이 됐다. 일본을 “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이라고 한다. 살아보니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금 일본의 대졸 초임은 20만엔 약간 넘는다. 200만원 정도다. 30년 전과 비슷하다. 고졸 초임은 최저임금과 거의 같아졌다. 경제 논리론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다. 초임만 낮은 게 아니다. 작년 일본의 근로자 평균 임금은 OECD 34국 중 23위였다. 한국에 밀린 지 7년이 넘었고 공산권에서 벗어난 리투아니아나 슬로베니아보다 밑이다. 일본 정부가 “부장급 연봉이 태국만도 못하다”며 임금 인상을 압박해도 기업은 요지부동이다.
▶한국의 평균 임금은 30년 동안 두 배 올랐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파업이 일본에선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일본 노동자가 순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기업이 제품 가격을 크게 올리지 않았다. 특히 직장인이 자주 먹는 덮밥, 라면, 도시락 등 외식과 생필품 값이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집세는 오히려 떨어졌다. 옷에 몸을 맞추는 것처럼 온 사회가 쥐어짜듯 낮은 임금에 자신을 맞춰온 것이다.
▶덕분에 일본은 전통적 고용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기업은 비정규직을 늘리긴 했어도 웬만해선 사람을 자르지 않는다. 실업률이 세계 최저인 2%대다. 3년 뒤엔 65세 정년이 의무화된다. 70까지 회사에 다니는 날도 멀지 않다고 한다. 임금이 낮아도 고용이 길다 보니 일생 받는 ‘생애 임금’은 다른 나라보다 적다고 할 수 없다. 일본은 개인보다 전체를 중시하는 나라다. 일본 경제 시스템도 이런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부작용도 클 수밖에 없다. 일본 노동생산성은 임금만큼 하위권이다. 미국의 60%에 불과하다. 한 사람이 할 일을 둘이 하고 임금도 나눠 갖는다는 얘기다. 능력 있는 사람에겐 감옥처럼 답답한 사회다. 그들은 자기를 제대로 평가해 주는 나라로 떠난다. 30년 동안 일본에서 벌어진 일이다. 장점이 있다 해도 이런 시스템은 유지될 수 없다. 요즘 가파르게 하락하는 엔화 가치도 일본의 이런 한계를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생산성 향상 없이 임금만 올라가는 한국과 30년 임금 고정 일본, 참 다르다.
'만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물상] 블라인드 채용 (0) | 2022.10.29 |
---|---|
[만물상] ‘逆월세’라는 기현상 (0) | 2022.10.26 |
[만물상] 은마 아파트 (0) | 2022.10.21 |
[만물상] 정치 ‘탑압’ (0) | 2022.10.21 |
[만물상] 네옴시티 (0) | 2022.10.21 |